소설리스트

〈 118화 〉바다의 주인 (118/274)



〈 118화 〉바다의 주인

어둑한 바다 위,   척이 서있다.


그 배에 이름은 별달리 붙어있진 않았다. 정하려거든 정할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업적을 쌓아본 적이 없는 단순한 원정선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 배 위에, 한 무리의 전사들과 소녀, 두 여인이 서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바다 한 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돌아올런지…."

전사 중 가장 경험이 많은 편인 선장, 욘이 그렇게 읊조리자 세네카가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다.

그 눈가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이 그녀의 마음 고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지라, 다른 전사들과 선장인 욘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는 경험이 많은 선장이자 전사다. 그 어떤 강대한 전사라고 해도, 저런 대자연에 삼켜진다면 죽음 밖에는 없었다.


욘은 지금 이 시간이 시간낭비 같았다.

물론 겨울의 힘을 가진 대전사가 죽어버린 건 가슴 아픈 일이고 명백한 손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죽을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다른 전사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세네카의 권위와 아직까진 상황이 괜찮다는 점, 그리고 그 대전사의 종자가 울다가 기절해버렸다는 점이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알고있겠지만, 대전사 나으리를 영원히기다릴  없는  아니오. 조금  지켜보다가…."

메이에게는 그 음성이 귀를 막은 것처럼 흐리게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흐릿한 의식을 헤집어 겨우 깨어나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 잠에서 깨어나던 그녀는, 겨울의 신부의 허벅지 위에서 갑작스럽게 퍼뜩 눈을 떴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겨울의 신부는 반응하지 않고 그저 메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언니도 느끼고 있는 걸까? 메이는 그렇게 의문을 표하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제서야 의견을 주고 받고 있던 전사들도, 선장도, 세네카도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메이씨, 아직…."

"잠시만요."

평소의 싹싹하고 물렁물렁한 말투가 아닌, 어딘가 날이 돋힌 말투로 메이가  쏘아붙이더니 앞으로 나아갔다. 메이의 다리가 몇 번 널빤지로 이뤄진 갑판을 나아가더니 난간 앞에 멈춰섰다.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애꿎은 상상을 하던 욘에게, 메이의 말은 갑작스러운 선언처럼 들렸다.

"…현성아?"

사람들이 애틋한 애정, 그런 걸 예상하던 때에.

세네카는 익숙한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세네카는 무심결에 그 감각에 대한 통찰을 입에 담아냈다.

"마력?"

그 말에 바다를 바라보던 메이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 눈동자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소녀는 확신에  눈으로 난간을 단단히 붙들고는, 다른 손을 휘저어 주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

갑자기 바다가 흔들리기시작했다.

"어어어…."

노련한 전사들은 갑작스러운 해저 지진에 당황하면서도 난간을 단단히 붙들고, 바닥에 몸을 낮추고, 기물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그렇게 거센 지진이 멈추려는 찰나에, 그들은 보았다.

꽈릉….

투화아아아아아악!!!


마치 바다의 뱃속에서 울린 듯, 감쇠되어 들리는 선명한 천둥소리와 함께 치솟는 막대한 양의 바다를.


용의 승천처럼 떠오른 그 바닷물은 용오름을 만들어내며 그 자리에서 체류했다. 무언가가 그 아래에서 밀어올리는 것처럼.


"…저, 저거…!"

그렇게 밀어올려진 바닷물이 둘로 갈라져  동포에게 몸을 부딪히는 순간에, 그들은 보았다. 그 거대한 질량의 물을 가르며 나타난 거대한 빛의 기둥을.

가히 신화적이라고 할  있을 풍경에 모두가 입을 다무는 순간, 메이는 환희에  목소리로 외쳤다.


"꽉 잡아요! 한 밖에 못 막아요!"

밀려난 물줄기를 메우려, 해저 깊은 곳에서부터 물이 밀려들어 급류가 생겨난다. 자연스럽지 않은 대자연의 행사에 배가 거칠게 요동치고, 중심부로 끌려간다.


전사들이 숨을 들이키며 경계하는 사이에, 그들의 배를 향해 거대한 자연의 폭거가 들이닥쳤다.

꽈아아앙!

쿠오오오오오오


금속 방패에 부딪힌 맹수가 울부짖듯, 날아온 쓰나미는 메이가 손을 뻗자 생겨난 붉은색 보호막에 부딪혀 튕겨났다. 튕겨나면서 울부짖었다. 그들은 그렇게 밀려난 파도가 몸을 수면에 부딪혀 사그라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보호막이 살얼음처럼 깨어나고, 잔파도가 몇 번 배에 몸을 부딪혔다.

철썩, 철―썩!

그 파도 자체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고, 배는 거세게 흔들렸으나 메이가 외친 경고 덕분인지 아무도 다치거나 바다로 떨어지진 않았다.

사실, 그랬더라도 아무도 뭐라고 하진 못했을 것이다.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 너무도 놀랍기 때문에.

세네카와 메이, 겨울의 신부만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는 와중에, 메이가 불쑥 외쳤다.

"저기, 저 빛이 솟아난 곳으로 가야해요! 빨리!"


욘이 그 말에 거부하려고 굳어버린 뇌세포를 꿈틀거리고 있을 때, 메이가 다시 빼액 외쳤다.

"현성이가 살아있어요!"




*

"씨이발…!"


철썩!

무슨 물싸대기 맞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밀려온 급류에 투구가 두들겨진다.

물이라고 무시할만한 압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은 존나게 무거웠다. 무슨 거인이 주먹이 두들기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내 머리가 홱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 팔과 다리를 휘저어 억지로 내 몸을 위로 올려보냈다.

이대로 심해에 가둬진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걸어서 뭍을 찾을 때까지 거닐거나 억지로 헤엄치는  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끔찍하지만, 내가 어떤 전망을 맞이하게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배워본 적도 없는 수영을 그야말로 억지로하고 있었다.


"씨발, 씨발!"


그나마 다행인 건, 수영이라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내 근력이 뛰어나 거인의 힘이 켜진 채로 다리를 휘젓기만 하면 얼추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으어억!"


 빌어먹을 투구가 수중호흡인 덕에 숨이 막혀 뒈질 일이 없다는 거였다.


다만 다행인 점은 그 둘 뿐이었다. 여전히 물살이 내 몸을 두들길 때마다 존나게 아팠다.

"이러니 존나 튼튼, 어억!"


철썩!

심해 엘프들의 왕의 존나 튼튼함을 납득하려는데, 물살이 다시 밀려들어와 내 어깨를 두들겼다.


존나게 아팠다. 아까  새끼들이 내지르는 창보다 더.


하지만 억지로라도 팔을 움직여야 한다. 왠지 뻗뻗해지고 있는 왼팔을슬쩍 보고는 억지로 그 팔을 움직였다.


"윽, 으극…."


방패의 데미지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갑주와 사슬갑주, 내 근육을 갈라내고 뼈에 닿을 정도라서, 만약 마지막 순간 팔에 사슬갑주를 집중시키지 않았으면 그대로 팔을 잃을 수도 있어보였다.

다행이긴 했지만 안심 하기에는 수영을 하느라 팔을 휘두를 때마다 찌르는 듯한 격통과 함께 상당량의 출혈이 있었다.

결국 타임어택이었다. 억지라로도 해수면에 도착하지 못하면 뒈지는 타임어택.

나는 지금 손짓 한 번에 생사가 달린 것처럼 거세게 팔을 휘젓고, 다리를 내뻗었다.

"…흐억!"


그렇게 겨우, 나는 개헤엄을 계속한 끝에 해수면에 도착했다.


"허억, 허억… 씨발, 수영 좆같네…."

언제 한 번 배우던가 해야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기적으로 솟아오르고 내려앉는 물들 때문에 진짜 물이랑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씨발, 언제 밤이 된 거야."


심지어 어두우니 좆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어디에 있지?


설마 올라오면서 방향을 틀렸나?

아니면 내가 빠지고 나서 바로 도망간 건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내지른 검기에 휩쓸려서….

불길한 예측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서리쳤다.


심지어 피를 너무 흘렸는지 머리도 둔했다. 왠지 몽롱하게 기분이 묘한 게, 딱 봐도 여기서 잠들면 뒈질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불길한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 존나게 막막했다. 그래서 숨을 들이키면서 진정하려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진정해라, 주현성.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생생하게 먹혀 뒈지겠지, 씨발  진짜.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려는 때였다.


"…어."

나는 그렇게 들어올린 시야 끄트머리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볼  있었다.


만약 여기가 지구였으면 북극성이겠거니 하겠는데, 그런 반짝임이 아니었다.

뭔가 타오르고 있는 반짝임이었다.

멀쩡한 팔을 휘저어 몸을돌리니, 그제서야 나는 그 반짝임을 제대로 볼  있었다.


그건 불기둥이었다. 해수면에서부터 피어오른 듯, 하늘을 향해 뻗어지다가 사그라드는 불기둥.


"…메이?"

내가 올라오면서 방향을 잃었을 걸 예측하고, 불을 피워주고 있는 건가.


괜히 가슴이 벅차오를 것 같길래, 입술을  깨물어 참고는 다친 팔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몰라 씨발,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개헤엄을 재개했다.



*

"…흐음."


넓찍한 홀, 누군가 앉아있다. 그 앉아있는 남자는 10대 후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동안이나 어떤 시술의 결과물이 아닌 실제로도 10대 후반이었다.


그런 남자가 앉아있는 옥좌는, 대륙 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일궈낸 선황들의 유골이 들어가 미묘한 상아색을 띄었다.


그는 황제였다.  때는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준신이 된 황제.


황제가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자, 누군가 다가왔다.

"…아, 왔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부복하지도, 조아리지도 않은 채로 여유로운 태도로 걸어왔다.


황제에게 보여서는 안될 태도이나,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황제도 모두 신이었으니.


"봄의 순례자, 그대가 말했던 이를 수색할 병력을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와야할 정기보고도 오지 않았어."

"그런데?"

"그대는 아는 게 없는가? 그대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했잖나."


봄의 순례자는 황제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검은색 로브가 꿈틀대며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움직이자, 황제는 은은한 혐오감을 감추며 턱을 괴었다.

"한 번 알아봐줄 수도 없는 건가? 그대가 당부한 일이잖나."


"…아니, 알아볼 필요도 없다."

봄의 순례자의 단호한 대답에, 황제가 눈썹을 꿈틀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덧붙여 해설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안으로 조용히 파고들어, 의식의 한 경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받아낸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대의 도시보다 살짝 클, 대도시라고 할 수 있을 그 풍경에는 그의 뿌리가 빈틈 없이 파고들어 있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도시의 전경이 잡히자, 그는 새로 방문한 이들에게 새로이 뿌리를 심었다. 그렇게 도시는 봄의 순례자가 되었다.

황제는 그 침묵이 달갑지 않았다. 분명히 그에게 하사했던 어떤 도시를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황제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렇게할 필요까지있는 건가? 그대를 쓰러트릴 정도라면, 그대도 전력을 다하면 되는  아닌가? 그 자에게도 본거지가 있다고 했잖나. 거기에 '그 도시'에 했던 것처럼 하면 되는 아닌가?"

하.


봄의 순례자가 그 말에 비웃음을 흘렸다. 황제는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감추었다.


자신은 황제에 준신이지만, 눈앞의 존재가 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불편한 동맹이긴 하지만 심기를 어지럽혀서 좋을 게 없었다. 황제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어린 황제야,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구나. 군주라면 군주라는 자리에 어울리게끔 사고하라."

갑자기 업신여겨진 것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황제는 침착하게 받아쳤다.

"질문에 대답이나 해라. 어째서 그러지 않는지 묻지 않았나."


봄의 순례자는 그제서야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평소라면 황제는 사과했을테지만, 저 불편함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알기에 조용히 지켜봤다.

과연, 봄의 순례자는 어떤 남자를 떠올리고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 놈은… 잃어버릴  없어지면 더욱 위험해질 놈이다. 그리 교양적이진 않지만 신의는 있다. 하지만 그것에 목을 메진 않는다. 명예에도 딱히 얽메이지 않으니 내가 나서서 놈의 근거지를 쓸어버린다면  놈은 나를 반드시 사냥하러 올테지. 녀석이 사는 도시 전체에 나의 뿌리를 뻗어내어 점령한다고 해도… 도시 전체를 불태우는데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거다. 신성의 낭비지."


봄의 순례자는 지켜보고 있던 도시를 자신의 심상 속에서 밀어냈다.


"차라리 지금처럼… 얽메일 곳을 남겨두는 게 낫다. 그게 놈을 무디게 만들어주고, 놈이 무작정 전진하는  막아줄테니."

황제는 그 말에서 봄의 순례자가 드물게 고평가를 하는 듯하다고 느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봄의 순례자는 자존심이 강하므로, 자신을 쓰러트린 상대를 업신여겼다간  자신의 품격도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 점이 신기한 한 편,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그정도로 위험하다면 한 번 쯤 만나보고 싶군."

하하, 하고 봄의 순례자가 짧게 웃었다. 업신여긴다기 보다는 즐거워서 웃은 것 같았다.

"아서라. 그대가 아리따운 여인이었다면 생존 가능성이 아주극소하게나마 올랐겠지만, 지금 그대의 모습이라면 분명히 죽을 것이다."

황제, 군주들의 아버지라는 신명을 가진 그 준신은 그 설명에도 흥미로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턱을 괴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군단이 먹히지도 않거니와, 강력한 개인을 가져가도 확실하게 쓰러트릴 수는 없다.


그야말로 신살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전사. 이미 신격에 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대전사.


답도 없을 적임에도, 봄의 순례자는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했다.


"군대를 만들어야지."


군대는 먹히지 않는 게 아니었나? 의아해하는 황제에게 봄의 순례자는 덧붙였다.

"괴물조차 떨어트릴 수 있을, 신들의 군대를."

봄의 순례자는 후드 속에서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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