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0화 〉서대륙 (120/274)



〈 120화 〉서대륙

"어떤가요?"

쭈그려 앉은 겨울의 신부는 몇 포기의 풀을 쥐더니, 냄새를 맡았다.

그녀가 뽑은 풀들은 내가 보기엔 그냥조금 삐죽삐죽한 풀이었는데,그녀에게는 다를 수도 있으니 나는 겨울의 의견을 구하고는 아가리를 닥치고 있었다. 원래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거니까.


"…독특하네요."

"그래요?"

그걸 냄새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건가, 싶었는데. 인간의 심박을 그냥 듣는 그녀에게는 있을  있는 일이겠거니 싶었다.


애초에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아는지 물어봤을 때 나올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알  없고.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렇게 뽑아낸 풀들을 내가 내민 배낭에 담았다. 곱게 아마포 같은 것에 싸서 가방에 넣는데, 그렇게 쭉 뻗은 손에 풀내음이 감돌았다.


"당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않고 설명드리자면… 저희가 있던 동대륙의 자생종과 유사점은 많지만, 그렇게 아주 유사하지만은 않습니다. 영양이 풍부하고 성분도 좋네요."

그녀는 인자하게 웃더니 다시 베일을 제 얼굴에 드리웠다.


영양이 풍부하다, 라.


그녀의 말에 새삼스러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거진 나무들, 밟을 때마다 옅은 물기가 베어나는 흙.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나와 겨울의 신부를 바라보다가 숲 한켠으로 몸을 날려 사라지는 동물들.

확실히, 우리가 있었던 동대륙과는 달리 지나치게 평화로운 느낌이 있었다. 마치 괴물이나 멸망의 전조들이 없어 평화롭다는 느낌.


진짜 그런지는 조사를 하다보면 알겠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자면 대공과 욘이 했던 말이 맞아보였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내 갑옷을 툭툭 두드렸다.

"…어, 왔냐?"


"응."

"표정이 왜 그래."


겨울의 신부가 풀을 조사하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던 메이는, 돌아와서는 몹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쾌한 표정인가 싶었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뭔 표정이야 이게.

메이는 잠시 우물쭈물 하더니 대답했다.

"…그, 현성이 정액이… 흘러내려서… 자꾸 나오고… 기분이 이상해…."

"…꼴리게 하지 마. 일해야 해."

"그, 그런  아냐! 진짜로 흘러내려서 그래…."


얘는 되게 느닷 없이 야한 말을 하네. 하마터면 설  했다. 풀발기를 간신히 막아내고는 숨을 돌리고 있자니, 메이는  다리를 비벼대면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뭐  찾았어?"


"으응, 아니. 아무것도. 난 정찰엔 재능이 없나봐…."

"왜  침울해지고 그래. 넌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그러진 말고, 같이 찾으면 나오겠지."


"으응…."

괜히 침울해하는 메이의 뺨을 쥐고 문지르니, 메이는 금방 기분이 풀려 실실 웃었다. 그나마 쉬운 녀석이라 다행이지.

겨울의 신부에게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제 몸집만한 거대한 가방을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짊어졌다.

"충분히 캐셨나요?"


"네, 이제 출발하셔도 된답니다."

확실히, 겨울이 짊어진 가방에서는 풀내음이 솔솔 풍기고 있었다.  많이 쥐어 뽑았나 본데.

그녀의 가방에서 눈을 돌려 주변을 살피니, 탁 트인 공터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숲길이 보였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닌 동물들이 자주 지나가기 때문에 만들어진 길인듯, 길 위로 동물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사슴인가?


어차피 갈 곳도 없었던 터라, 그 발자국 위로 걸음을 옮겼다.


"앗, 어디 가?  찾았어?"

그렇게 발을 뗀지 2초만에 메이가 물어와서, 바로 옆에 따라붙는 메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니, 찾으려고."

"응? 어떻게?"

"우선 여기 발자국 보이지?"

"응, 동물인가?"

"아마 동물일 거야. 동물들이 자주 다닌 길인지 풀들이 빗겨서 자라있잖아? 그렇다면 이 길을 따라갔을  수원이 나올 가능성이 높겠지?"

"응? 그런 거야?"

"응. 걔네도 물은 먹고 살아야할 거 아냐. 아무튼, 수원지를 찾으면 그 근처에서 인간이든, 괴물이든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봐."

"으으응… 그렇구나. 하긴, 겨울 언니도 물은 마시니까."

뭐 그렇게 논리가 전개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는 특유의 싹싹한 태도로 겨울의 팔을 붙들었다.

팔을 붙들린 겨울의 신부는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메이의 눈두덩을 제 차갑고 보드라운 엄지로 쓸었다.

"예에, 저도 물은 마시죠. 식사도 하고요. 생명이라면당연한 일이니까요…. 당신께서 말하신대로, 물소리가 들리네요."


오, 정답인가.

겨울의 신부가 하는 말이라면 틀릴리는 없어서, 나는 메이에게 보란 듯이 웃었다. 메이는 대단하다며 한참간이나 추겨세운 후에야 조용해졌다.


정확히는 뭔가를 생각하는지 조용해진 거지만. 메이가 넘어지거나 나무에 부딪히지 않도록 손을 잡고 동물들이 지나는 오솔길을 따라갔다.


오솔길 중간중간에 뻗어난 뿌리들이 길을 막고 있었지만, 봄의 순례자의 뿌리나 괴물들의 무언가처럼 기형적으로 거대하거나 기괴한 마력, 신성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단지 평범한 나무의 뿌리였다.

겨울의 신부가 건너기 쉽도록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어 나무가 오솔길 옆으로 잔뜩 있는 길을 지나고 나니, 슬슬 목적지인 수원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 사슴이다."

"사슴 처음 봐?"


"아니!"

"뭐야."

내가 키득키득 웃으니 메이 역시 실실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슴  마리가 모여서 물을 마시고 있는 수원지로 다가섰다.

그건 연못이었다. 야트막하게 트인 개울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ㄴ자 형태로 꺾이는 곳에서 잔뜩 고여있었는데, 사슴들은 거기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 사슴들은 큼직한 눈동자로 잠시간 우리를 응시하더니 여유로운 걸음으로 멀어졌다.


"방금까지 마시던  보면 딱히 문제는 없어보이는데…."

사슴들이 마시던 연못을 흘긋 바라보는데, 물고기 몇 마리가 개울에서부터 흘러들어와 연못에서 떠도는  보자면 그다지 수질이 나빠보이진 않았다.


동대륙이었다면 여기서 튀어나온 식인 물고기가 내 발목을 물어뜯고 있었을텐데, 그런 것도 없는 걸 보면.

"…진짜 괴물 한 마리  나오나?"

대륙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정도로 차이가 나도 되는 건가. 동대륙은 한창 멸망해가서 기형이 아닌 동물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여기서는 동물들이 죄다 원형인데다 문제가 될만한 현상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스타팅  거면 이런데서 좀 스타트하지."

시작부터 좆같은 지저의 늪지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었나 회의가 들려는데, 메이가 연못 물을 들여다보다가 팍 튀어오른 물고기에 놀란 듯 꺅 소리를 냈다가 웃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니다, 서대륙에는 내가 필요했겠지. 서대륙에서 시작했던 탓에 겨울의 신부나 메이는 물론이고, 여러 사람들을 만날  있었으니까.

생각을 겨우 정리하는데, 겨울의 신부가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나한테 속삭였다.

"개울이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 뭔가 있는 것 같아요. 확인해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예? 아, 예. 그래야죠."


그녀가 먼저 제안하는 게 오랜만이라 놀라버렸다. 심지어 이렇게 구체적인 제안이라니?

뭔가 소리가 심상치 않았던 걸까, 싶어 우리는 개울을 거슬러올라가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향으로 다가갈 수록, 그 소리는 확실히 들렸다.

딱, 딱, 딱


무척 주기적으로 부딪히는 소리였다. 마치 나무판 같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같은 소리.


 정체는… 이게 뭐지 씨발.


생긴 건 얼추 물레방아에서 여러가지를 떼어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제대로  수차에 비해서 크기는 작아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역할을 위한 부속품 역시 존재하지 않았고.

물이 흘러내릴 때마다 돌덩이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는  외에는 그다지하는 일이 없어보이는 물건이었는데, 나는 무심결에 겨울의 신부를 돌아보았다.


여기  현대인 새끼들은 모르지만, 겨울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그녀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께 도움이 되지 못해 죄스럽네요."


그리고는 진짜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이길래, 나는 그녀의 뺨을 문질러주며 달래야만 했다.

기분을  겨울의 신부가 따라붙고서야 나는 그 장치를 보면서 의견을 내놓을  있었다.


"뭔지 짐작도  가네. 목이 마를 때 물이라도 빨리 찾으라 이런 의미에서 설치한 건가?"


"으응… 혹시 근처에 건물이나 그런 거 있는 거 아닐까? 은신처라던가? 비밀기지 같은 거! 숲에서 찾아오기 힘드니까 이런 게 있다던가?"

 말에 대답하는 메이의 의견은 몹시 그럴 듯 했다.순간적으로 그 메이가 맞나 의심될 정도로.


메이도 자신이 그런  말한 게 놀라운지 눈을 크게 뜨고는 어, 하는 소리를 흘렸다.

"…존나 그럴  한데. 잘했어."


"아, 응. 헤헤, 좋다."

내가 칭찬해주니 좋다고 우쭐해져서는 가슴을 내밀길래, 괜히 그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놓았다.


나무가 우거져서 딱히 뭔가 보이지는 않는데, 확실히 지형이 완만한  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아마 물은 필요할테니, 개울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결정만을 남겨놓고 있는지 두 여자는 내 손을 잡아오거나 바라보거나 하면서 의견을 구했고, 내가 결정한 후에야 우리는 개울을 거슬러 올랐다.

*

걷다보니 보이는  많았다. 예를 들자면 페광.

고갈된 건지, 아니면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 아예 버려진 광산이었는데, 인간이 얼마 전에도 사용했는지 광차 같은 게 놓여있어  대륙의 초입에도 인간이 살고 있음을 체감하게 했다.


그렇게 정찰의 결과를 정리하자면 대충 이러했다.

괴물의 존재 여부 확인 못함, 동물 기형 없음, 식물은 평범, 인간의 흔적 있음.


즉, 완전 평화로운 땅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런 모습이라면 정찰의 필요성도 그다지 없었다. 인간의 흔적이 있다고 한들, 숙련된 전사들과 병사들로 이뤄진  병력 앞에서는 그렇게 아주 큰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봄의 순례자는 내가 따라오리란 모르는지 딱히 뭔가를 시도하지도 않았고.

상대가 신격이 아닌 이상에야 질리가 없는 나와 메이라서, 위기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가기로 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면 드디어 배 위가 아닌 육지에서 야영지를 펼쳐서 쉴 수 있을테니, 빠르게 돌아가고자 우리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 왔던 길을 따라 개울을 따라서 연못에 도달하고, 연못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강을 따라서 걷던 때였다.

"…어? 현성아, 이거 봐."

메이가 갑자기 나를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바닥에 놓여있던 걸 집어드는데, 그 물건은 무척이나 인간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물건이었다.


"활이야."

"그러게?"

활 뿐만이 아니라, 바닥에는  역시 있었다. 그렇게 깊은 상처는 아닌 듯 피가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출혈은 출혈이었다.

차라리 피가 흥건했으면 동물의 공격흔이라고 생각하겠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메이가 내게 보여준 활은, 명확하게 인간의 무기로 끊어진 흔적이 있었다.

"…두 번 내리찍었네."

"헉,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응, 근데 빨리가야겠다. 꼬라지면 마냥 멀쩡하진 않겠는데."


활대에는 두 번의 참격이 내리꽂힌 흔적이 있었는데, 두  다 궤도는 다르지만 힘이 충분히 실려서 단단한 활대를 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도끼, 아니면 묵직한 칼을 가진 도검. 어느 쪽이든 단숨에 목숨을 끊는데는 좋은 무기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피가 흘러있는 흔적과 드문드문 뭉게진 풀들을 보았다.

"…겨울님, 피냄새 납니까?"


"…예,저 방향이예요."

왜 굳이 이 자리에서 안 죽이고 끌고 간 건지 알 수 없지만,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거나 여기가 사람이 많이 다니거나 야생동물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피한 거라면 얼추 납득은 되었다.

그래서 나와 메이, 겨울의 신부는  길을 더듬어 그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쫓았다.

부러진 나뭇가지. 급하게 움직였다는 증거. 누군가한테 쫓기고 있다는 건가?


슬쩍 보니 남아있는 혈흔. 거기서 방향이 엇나간 채 새겨진 두번째 혈흔. 끌려가는 말고도 다친 이가 있다는 뜻.


얼추 어떤 그림인지 눈에 보이기 시작해서, 도끼를 뽑아들고는 흔적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우거진 수풀이 보였다. 그 수풀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는  아깝지."


"그럼 어쩌게? 언제든 쫓아올 수도―"


부스럭


들리는 목소리로 짐작하건대, 어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그리 길게 남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수풀을 가르고 그들의 뒤에 나타났다.

그들은 얼추 다섯 명이었는데, 내가 본  맞는지 한 명은 어깨에 화살을 꽂고 있었다.


얼추  보기에도 도적처럼 보이는 험상궂은 사내들이었다.각기 무기를 들고 있는데, 도끼나 도검, 철퇴는 물론이고 창과 같은 장병기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여자를 중앙에 두고 있었는데, 여자는 철퇴에 맞은 건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입에 둘러진  때문에 말은 못하지만 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너, 넌  뭐야, 씨발."

그 산적 중 하나가 내게 창을 겨누면서 말하자 그게 신호인 듯, 그 산적들이 넓게 퍼져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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