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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화 〉서대륙 (122/274)



〈 122화 〉서대륙

이후 레베카라고 자신을 지칭한 소녀의 말은 간단했다.


전황은 좆되었으며, 남작령은 사실상 좆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


자작가는 오랜 앙숙이었던 남작가를 이번 기회로 완전히 담궈버릴 생각인지, 인근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렇게 끌어모아진 병력은 상당했는데, 다종다양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년간 전장에서 구른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라는 점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개중에는 용을 잡기 위한 용병대들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대목에서는 눈쌀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용을 잡는다고? 어떻게?

뭐 화력 투사라도 하나?


군인은 아니지만, 날아다니는 비만 도마뱀을 잡으려면 똑같이 날아다니는 수단이 아니면 힘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 당연한 의문에 레베카 코넬지어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일 거예요. 제 눈으로 본  아니지만, 첫날 그 용병대가 사용하는 독특한 쇠뇌 덕에 저희 궁수들이 많이 죽어나갔으니까요."


그 뒤로 레베카가 늘어놓는 용병대들은 하나 같이 내가 들어본 적은 없지만  번 쯤은 구경하고 싶은 무언가였다.

뭐랄까, 차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카탈로그를 늘어놓고 스펙을 짚어주고 있으면 흥미가 돋아나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라고나 할지.


괴물을 전문적으로 잡는 용병대, 용을 잡는 용병대, 마법사를 부리는 소규모 용병단까지.


레베카가 늘어놓는 용병대들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동시에 여러가지를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는 이야기였다.

이 대륙에도 괴물이, 용이 존재한다. 거기에 그런 용과 괴물에 단신으로 대항할 수 있다는 강한 놈들이 드물지만 있다고 한다.


나처럼 쉽게 잡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야기만 얼추 듣자면, 내가 온 동대륙은 씹창난 다크 판타지인 반면 서대륙은 제대로 된 판타지처럼 들렸다.


내가 흥미로워 하는 기색이 짙으니, 그녀는 눈쌀을 좁혔다.

"다른 대륙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진짜인 모양이네요."

"그럼, 진짜죠. 그딴 거로 구라쳐서 뭐 이득 본다고."

레베카 코넬지어는 내 말에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하진 않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좋았다. 레베카 코넬지어가 전해준 이야기로 판단하자면, 상황은 꽤 심플하고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코넬지어 남작령은 좆됐다.


지원은 아주 시급하게 필요하다.


그렇게 판단하고 나니 해야할 질문은 명확했다.


"…우리가 뭘 해주길 바랍니까? 제가 군사 전문가는 아닌데… 제가 보기에도 얼추 좆된 것 같은데요?"

코넬지어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대놓고 귀족 앞에서 욕을 하는 새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한, 그런 눈이라서 나는 피식 웃고는 팔짱을 꼈다.

"…우선 군사가 필요합니다. 그걸 도와주시면…."


레베카는 내 무례 정도는 그냥 눈 감아주기로 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뭐, 그렇게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 없을 겁니다."


"예?"


"필요 없을 거라고요.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내가 틀릴 것이다. 내가 만약에 핸섬하고 강력한 반신이 아니고, 혼자서 군대를 쳐부순 이력이 없는 평범한 놈이라면.

하지만 지금 내 위치를 생각하면 군대를 구하느라 싸돌아 다니는  괜한 시간 낭비였다.

그걸  턱이 없는 레베카는 내 말에 의아해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물론 당신이 강하신  맞지만, 상대는 군대입니다. 아무리 강한 전사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군대를 상대할  없어요. 수는 언제나 인간의 강점이었습니다. 어떤 강력한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떼를 이룬 인간의 군대 앞에서는 패배할 수 밖에 없었죠. 당신의 대륙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이 대륙에서는 괴물들은 제 몸을 숨기며군대를 피해다닙니다. 야음에 숨어서 인간들을 습격하죠."

우다다 쏟아내는 날카로운 말들. 말하다보니 감정이 격해진 건지, 그녀는 높아진 언성으로 마지막 말을 뱉어내고는 째려보고 있었다.

도와준대도 지랄이네.

픽 웃으니,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제 제안에 따라주세요. 이 인근 마을은 아직 저희 가문을 지지하고 있으니, 그들 중에서 힘 좋은 장정을 모아 민병대를 꾸립시다. 훈련은 필요하긴 하지만 급하니 빠르게 해내고, 수를 채우고 인원을 불리는 겁니다."


오래 생각해왔던 건지 그녀의 계획은 막힘 없이 토해내졌다.

"그렇게 불어난 수를 가지고 영지로 갑니다. 시간이 늦었을테니 아마 영지는… 수복할  없을테고, 가주님도 좋지 않은 상황에 쳐해있겠지만… 이쪽 병력의 수를 보고는 생각을 달리 할 겁니다. 싸우면 귀찮아질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되겠죠. 그걸로 화평을 제안하는 겁니다. 인질의 석방과 남작령의 정식적인 양도를 걸고요. 비록 저희는 영지를 잃게 되겠지만,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의탁할  있는 곳이 있을지 모릅니다. 수도회에 의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리고…."


레베카 코넬지어는 그렇게 말을 우다다 쏟아내더니,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더욱이 긴 계획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인 것도 있지만, 모르는 용어가 많으니 별로 와닿지는 않았다.


멍청한 표정으로 입가를 긁적이다가, 내 옆에 잠자코 서서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는 세네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거 뭐, 얼추 되는 얘기입니까?"

세네카는 내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듣다, 회색 눈을 내게 돌려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주 유효한 방법입니다. 도와주는게 저희가 아니거나, 도와줄 사람이 없이 혼자 빠져나왔으면 어쩌면 가장 최선인 방법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했겠는데요."


오, 그정도야?

내가 놀라워 하며 레베카에게 고개를 돌리자, 레베카는 한창  설명을 늘어놓다가 메이가 건네는 물주전자를 받아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녀의설명은 한참간이나 이어졌다. 이야기 중간에 끊는  예의가 아니라서 잠자코 있었을 뿐, 그녀는 그게 뭐 중요한 것처럼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내 무력이 정확히 와닿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누가 예상이나 하겠나. 평범한인간의 몸으로 군대와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레베카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그녀가 말을 멈추더니 나를 보고 있었다. 은근히 노려보면서.


"…오, 우리 남작가 후계자 분 유능하시네. 되게 많이 아신다. 레베카 코넬지어님은 다 계획이 있구나?"

레베카는 그 말이 비꼬는 거라는 걸 알았는지 눈쌀을 더 찌푸렸다.


화내기 전에 해결해야겠네. 나는 피식 웃으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화내지 마시고, 제 얘기를 잘 들어보세요."


듣고 생각하자고 생각했는지 대답하지 않고 내 말을 기다렸다.


"그 계획,  좋고 되게 휘황찬란하긴 한데… 중간에 하나라도 꼬이면 그 길고 장황한 뒷단계는 좆되는 거 아닙니까?"

정곡이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뭐, 예를 들자면 저 자작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던가. 아니면 시골 쪽에서 귀족 사칭하는 애새끼인  알고 잡아다가 신부랍시고 돌려먹는다던가. 아니면… 더 나아가서 자작가에 그 시골 농부들이 넘겨버린다던가."


레베카의 표정이, 내가 한 몇 마디의 말에 푸르죽죽해졌다.

그럼 그렇지. 보통 저렇게 계획이 장황한 책상물림들은, 막상 어디서 무너질지 예상하지 못하다가 무너지면 당황하고는 한다. 그녀는 적나라하게 당황을 드러내며 눈동자를 떨었다.


메이가 내 언행에 옆구리를 툭 치긴 했지만, 실린 힘이 약했던  보면메이도  얘기 자체에는 동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한테  좋은계획이 있는데, 그거대로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귀족님?"

"…무슨 계획이죠?"


불안한, 어쩐지 불신도 좀 섞인 목소리로 내게 질문하는  맹랑한 꼬맹이의 모습에 살짝 짜증이 올라왔으나, 바로 억눌렀다.


편의점 점장하면서 미성년자 하루 이틀 상대해보는 것도 아니고, 얘네는 괜히 지들 자존감 깔아뭉개려고 들면 더 바득바득 대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그럴듯 하게 말하기 위해 내 계획을 거창한 말들로 포장하려고 머리를 굴리다가.

"…메이랑 내가 가서, 전부 까뒤집고 방해하는 놈들 아구창 다 박살내기?"


포기했다.

레베카는 언뜻 듣기에는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ㅖ? 하는 입모양을 흘리고 있었다.

솔직히 이해할만한 당황감이었다.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는 의미 없겠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협탁에 내려놓았던 투구를 집어들었다.


"뭐,  믿겠으면 따라와서 보시던가. 내 계획대로면 그쪽 영지도 지키고, 저 새끼들 아구창에도 주먹  발씩 꽂을 기회도 생길테니까."

내가 방을 나가면서  건,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베카였다.




*

"흐음, 진짜네."

그렇게  시간, 말을 달려서 우리는 그 영지 접경지에 있는 숲에 도착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보초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본래라면 이런 장소는 보초병들이 꼼꼼히 지켜보고 있겠지만, 나타난 무리의 규모가 무척이나 작으니 그다지 경계조차 하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 펼쳐진 초목지의 틈틈이로 들어선 공성병기와 수많은 인파를  수 있었다.


"…벌써 저렇게까지…."

얼추 보기에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성은 여기저기가 깨져나가 제대로 방어 역할을 해내지 못했고, 수분마다 한 번씩 공성병기가 묵직한 것들을 쏘아내어 성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모래성처럼, 코넬지어 남작의 성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설령 내가 달려가서 다 줘팬다고 하더라도 재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레베카도 그걸 아는지, 황망한 눈으로 그 참상을 바라보며 굳어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에서 몸을 끌어내리고, 메이를 레베카가 탄 말에서 내려주니 세네카는 문득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떤 불안감이나 공포, 착잡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두 회색 눈에 감도는 건 나에 대한 신뢰와 적들이 맞이하게 될 파멸을 안타까워 하는, 그런 연민 밖에 없었다.


아니면 바로 옆의 레베카를 연민하는 거일 수도.

내가 턱을 더듬다가 메이가 건네는 투구를 받아든 후에도, 세네카는 별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어떻게 하고 자시고가 어딨나.

그냥 다 줘패는 거지.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라 씩 웃으면서 등에 짊어진 폭군의 검을 끌어내렸다.

후우우웅!

인간이 들기엔 너무도 무거운 거검이 끌어내려지자, 그 무게에서 만들어지는 폭력적인 압력 때문인지 숲에 낮게 깔린 먼지가 치솟았다. 치솟는 모양은 마치 하늘로 승천하려는 용을 닮아있었다.


레베카의 황망하게 전장을 바라보던 눈이, 나를 따라오더니 번쩍 뜨였다.

"…어, 어떻게 그런… 그런 걸…."

 영지가 좆되는 와중에도 신기한 건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 손에 들려진 거검을 보더니 레베카는 당황한 눈치로 어버버 거렸다.


치솟은 먼지가 낮게 가라앉는 와중에도 레베카는 당황한 눈치라서,  웃으며 대충 손을 휘저었다.


"세네카씨, 여기 귀족분 잘 모시고 물러나주실래요? 적당히 안전한 곳에서요."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면 턱도 없을 말, 전장에 안전한 곳이 어딨겠냐며 윽박 질러도 할 말이 없는 제안.

레베카는 정확히 그렇게 하고 싶은지 표정을 굳혔다가, 세네카가 말의 고삐를 잡고 이끌자 저항 없이 숲 한켠으로 들어갔다.


세네카는 그렇게 숲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성은 수리하기 힘듭니다."

그녀의 경험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뭔지. 나는  수 없어 어물쩍 웃어넘기고는 메이를 바라봤다.


메이는 이미 준비를 끝냈는지 적조를 뽑아들어 불을 두르고, 방패를 고쳐메고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끝낸 메이는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어떻게 할 거야?"


굳이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다 뒤집어야지."

메이가 내 말에 웃으며 마력을 끌어올리고, 그러는 메이를 뒤로 하고 나는 전장으로 향했다.

한 걸음,  걸음. 느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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