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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화 〉서대륙 (123/274)



〈 123화 〉서대륙

쿠―웅!

둔중하게 대지를 떨리게 하는 폭음이 울린다. 살아남은 이들은 그 소리에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들 중 한 명, 코넬지어 남작이라고 칭해지는 남자는 움츠러들면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얼마 전 투석기가 쏘아낸 돌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곤죽이 되어버린 제 집사장이었다.

본래 집사장이 그렇게 죽어버린 탓에, 지금 집사장의 자리를 이어받은 건 미숙한 집사 보조였다.

그는 어리숙한 얼굴과 현지에 어울리지 않는 발음으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거나 필요한 것들 갖다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낯선 발음에 짜증을 냈다.  낯선 발음이 동반하는 건 보통 어떤 것을 구해와라, 어떤 걸 하라고 남작님이 말하셨다, 하는 지시들 뿐이었으므로.


그들은 툴툴대거나 두려워하면서도 명령을 섬겼다. 지금만은 예외로. 날아올 돌이 빗나가지 않아, 인간을 명중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몸을 성벽 아래로 숨기거나 뒤로 숨기기 바빴다.


집사장이 된 소년은 그 사이로 뛰어다니며 병사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명령했다.

투툭!

성벽 너머에서 화살이 날아와, 방패를 두들겼다. 제 동료가 쇠뇌를 쏘기 쉽도록 방패를 내밀고 있던 남자는 충격에 놀라서 방패를 놓쳐버렸다.

그렇게 손을 떠난 방패는 떨어져, 해자를 나뒹굴다 물에 빠졌다.

몇 개  남은 방패는 그렇게 허비되었다.


집사장이  소년이  광경을 보고는 소리를 질렀다. 방패를 그렇게 허비하지 말라는 외침이었다.


그 외침은 폭력을 동반했다. 방금까지 죽음의 공포에 떨던 병사는 반사적으로 새 집사장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한 소년이 두들겨 맞는 동안에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저렇게 죽으나 함락되어 죽으나 별 차이가 없다고 여기는 건지 오히려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묵묵히 전장을 보고 있었다.


전황은 최악이었다.

화살은 동나간다. 앞으로 몇명이 연달아 쏘고나면 없을 것이다. 훈련에서도 이것보다는 많은 화살을 준다.

식량은배불리 먹이기엔 턱도 없었다. 이제는 성 안으로 대피한 영민들은 식사는 커녕 물이라도 조금 있는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사상자는 너무 많았다. 죽어나간 이들이 너무 많고, 부상자 역시 발에 치이게 많아 안뜰 곳곳에서는 앓는 소리를 내는 병사들이 전투 준비도 아니고 퇴각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걸쳐져 생사를 오고가고 있었다.


두들겨 맞는 집사장을 뒤로 하고, 나이는 가장 많으나 은퇴했었던 늙은 집사가 남작에게 다가왔다.

"항복하심이 어떠신지요…."

묻는 것도 아니었다. 거의 확신에 차서, 노인은 그렇게 제안했다. 반드시 이에 따르기를 바란다는 암묵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남작은 다행히 거의 40줄을 넘어선 나이였던지라, 노인보다는 정정했다. 그래서 남작은 그 제안에 따르지 않고도 노려볼  있었다.

"항복하면 과연 우리가 목숨을 부지할 수나 있겠소? 저들은 우리랑 거의 4백년 넘게 앙숙이었소! 항복한다면 돼지 살을 발라내듯  내장을 전부 끄집어내고는 벽에 내걸거나, 내 목을 자르고 개가 뜯어먹게 하겠지. 내가 잘린 목으로 그걸 지켜보게 두고서!"

사실, 집사는 그에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고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가능성은 높았다. 자작의 용병들은 남작이 패배해 끌려오면 바로 그럴 생각으로 굶은 사냥개와 전문적인 도축꾼도 불러두었다.


자작의 의지는 아니겠지만, 일부 용병의 고약한 취미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작의 그런 통찰은 다 스러져가는 영지의 주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그 놀라운 통찰로 항복이 옳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옳지 않음에도 행할  있는 건, 스스로 파멸로 걸어들어가는  인간의 가장 뛰어나고도 참담한 재능이었으므로.

늙은 집사 역시 참담한심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그 주변에 양립한 병사들 역시  절망에 동조하는 사이에, 폭음이 한  더 울렸다.

쿠우우우웅!!!

지금까지와는 격을 달리하는 폭음이었다.

그에 남작도 체통을 잊고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고, 병사들 몇은 오줌을 지리거나 하면서몸을 바닥에 낮게 깔았다.


바닥 위에 깔린 배 위로 잔잔히 올라오는 냉기에 그들이 덜덜 떨었다. 공포 때문에 떠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날아오는 돌덩이는 없었다.


'투석기 소리가 아니었던 건가? 그럼 그 대포?'


남작은 바로 얼마 전, 그의 성벽 윗부분을 깎아냈던 어떤 위험한 대포를 떠올렸다.  번 쏘는 것만으로도 병사 수십을 죽였던 그 질량병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그게 자신들을 향해 쏘아낸 공성 병기가 아닌 것처럼. 그래서 그는 의구심 섞인 표정으로 망루 위를 보았다. 망루는 멀쩡했다. 어떤 병사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기까지했다.

"나으리! 바깥을 보십시오! 바깥에… 바깥에…."

뭐가 있길래?


남작이 의구심을 품으며 몸을 일으키자, 병사가 겁에 질려 외쳤다.

"괴물이 있습니다!"

남작은 그제서야 뒤늦게 성벽 위로 올라와, 밖을 내다봤다.


정말 그랬다. 무언가, 자신을 몇주간 공포와 위기로 몰아넣었던 공성캠프를 때려부수고 있었다.

 괴물은 혼자였다.


*


"대장, 좌익에 뭔가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새삼스러운 말이었지만, 대장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도 소리는 들었으니까.

처음에는 누가자신의 허가 없이 공성 병기를 쏘아낸 것이라 짐작했으나, 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위치상으로도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공성 병기가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복병이냐? 쯧, 갑자기 웬 복병인지…왼쪽이면 우리 '거인 살해자' 용병단 아니었나? 그럼 적 전열을 막는 동안 저기서 푸른 새 용병단을…."

"그게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 대장이 눈을 찌푸리자, 병사는 공포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 싶어 대장이 의뭉스러워 하는 것도 잠시, 그 병사가 뒤이어 말했다.

"적은  한 명입니다!그놈이 전열을…."


콰아아앙!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내쫓으려는 것도 잠시, 다시 한 번 폭음이 울렸다. 이번 폭음은 무척이나 가까워서, 그도 이번에는  들을 수 있었다.


그건 뭔가… 부숴지는 소리였다. 그 부숴지는 소리에 살짝, 다른 소리도 섞여있었다. 마치 공성 병기를 쏘아내는 것 같은 소리가.

적은 공성 병기를 운용한단 말인가? 병사가 했던 말은 잊고 생각을 재조립하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천막을 부수며 쳐들어왔다.


콰지직!

우르릉―

"그악!"


천막의  켠을 부수고 들어온 그것은, 공성 병기의 조악하게 뜯어낸 조각이었다. 금속부가 무언가에 꿰뚫려 튕겨져나간 듯, 그 파편은 무척이나 명확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 조각에 두들겨 맞은 병사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져 죽는 동안, 천막이 쓰러져 내렸다.


용병대장은 그에 밖으로 나섰다.

"…이게 무슨, 씨발…?"

공성 병기는 산산히 부숴져 있었다. 뭐에 얻어맞았는지 완전히 우그러져 있었는데, 설치에 힘을 쏟았음에도 일주일이나 걸렸던 기물인 걸 생각하면 무척이나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공성 병기로 용병대장이 다가섰을 때, 그는 그 분통함보다 어이없음이 먼저 올라왔다.


그 공성 병기에 꽂힌 건, 투창이었다.


완전히 쇠로 이뤄져 던지기에는 조금 무거운 투창. 길쭉해서, 단순 근거리 교전을 위해서 만들어진 창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창.

뭐가 이런  던진 거지? 일단 인간은 아닐 것이다.

그는 남작이 드디어 갈 때까지 갔구나 하고 오판했다. 괴물을 부려야할 정도로 심각하게 몰렸다고.


이런 걸 교단이 좋아할리가….


쿠우우웅!

그는 생각을 중단할  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폭음이 무척이나 귀를 잡아끌었음에.


만약 쳐들어온 게 괴물이라면, 그를 전문으로 맡는 용병들이 해결하면 되는 일이다.

그는 지휘를 위해 지휘용 장식 메이스를 뽑아들고 폭음이 들려오는곳으로 향했다.


"막아, 막, 으으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익!"

"크륵… 그르륵…."


그렇게 도착한 전열은 아비규환이었다.


차라리 그냥 개판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괴물을 전문적으로 맡는, 거인 살해자 용병단은 단단한 전열로 거대한 괴물을 묶어두고, 궁병과 마법사로 마무리한다는 전형적이지만 정석에 가까운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이 공성캠프를 이끄는 용병대장인 그가  거인 살해자 용병단의 단장이었으므로,  위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있었다.


전열을 맡는 중장보병들은, 기사들의 기마 돌격에도 버틸  있도록 온갖 괴물들의 뼈, 가죽에 특수한 금속으로 갑주를 만들어 확실히 어떤 적이 오더라도 버틸  있었다.


궁병은  어떤가. 활대부터가 그들이 잡은 거인의 뼈로 만들어, 장력이 무척이나 높고 위력 역시 그에 비례하여 강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거인을 잡아대는 용병단이었으므로,  전략은 대인전에 적용해도 완벽했다.


전열들이 적들의 병력을 묶어두는 동안, 거인의 뼈로 만들어진 강력한 화살이 백발백중의 솜씨로 쏘아져 적을 도륙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제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아아악!"

그의 자랑하는 중장보병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상대는 정말로  명이었다.

키가 큰 편이긴 하지만, 절대 거대하다고  수준은 아닌 키.


전신에 두른 검붉은갑주, 붉은 망토와 후드.


마치 신화적인 풍경으로 그 망토를 휘날리면서, 남자는 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뭣한 거검을 휘둘러댔다.


어지간한 인간보다 크고 두꺼운 그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방패를 들고 달려들던 중장보병의 방패 위로 공격이 내리꽂혀 날아간다.

거인의 주먹질과 몽둥이찜질에도 버티는 갑주는 찌그러져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간다.

"뭣…."

그나마 그들이 후퇴하지 않는 건,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물러섰다가는 전열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며, 궁수들이 온다면 결과가 아주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 덕분이었다.

아니면 마법사라도 온다면….

그의 상념을 가르고, 다시  번 폭음이 울렸다.

투콰아아앙!


마치 대포라도 쏘는  같은 소리가 들리고, 중장보병들이 날아오른다. 날아간 이들은 다른 보병들과 뒤섞여 더 큰 피해를 불러왔다. 갑주에 깔린 이들이 기절하거나, 사지가 뭉개져 비명을 질렀다.


사기가 삽시간에 떨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대장!"

황망하게  그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건 그의 동료였다. 마법사들의 담당자이자 그의 친형제, 훌륭한 마법 폭격 능력을 가진 그의 전우였다.


대장은 그를 보자마자 헐떡이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딴 거 물을 시간이 아냐! 저 새끼, 저 새끼 죽여버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어떤 기사가 거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겨눠진 창대 다섯 개를 동시에 부러트리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거물이었다. 마법사는 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뻗어낸 손에서 푸른색 글자들이 둥둥 떠다니며 주문을 조립했다. 푸른 주문의 대가인 그는 자연 현상에 대한 개입에 능했다. 특히나 번개에 특화된 그의 능력은, 폭격에는 무척이나 적합했다.

대장은 저걸 빨리 침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불안한 눈으로 그 주문을 바라봤다.

그렇게 만들어진 주문이 빛을 갖추고, 쏘아지려는 찰나.


파직

실 없는 소리를 내며 주문이 사그라들었다.


마치 불에 물이라도 부운 듯,  주문에 붉은 기가 감돌더니 완전히 사라져 흩어졌다.


마법사는 반사적으로 어, 하는 소리를 낸 뒤에 다시 주문을 조립하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주문을 만들어낼 때마다, 주문은 파직 하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이제보니  마법사 뿐만이 아니라, 용병단의 다른 마법사들 역시 같은 꼴이었다. 주문을 만드려고 할 때마다 집단적으로 주문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장이 이제 다가오고 있는 기사를 보고는, 소리를 빽 질렀다.


"빨리 써, 씨발, 마법 쓰라고!"


"안된다고 씨발! 어떤 새끼인지는 모르겠는데, 주문을 만들 때마다 조금씩 비틀어서 없애고 있다고! 이런 씨발, 내가 마법만 몇년 짬밥을 먹었는데, 이걸 전부 받아친다고? 뭐하는 새끼야!"


마법사의 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눈물 짓는 이유는 자신의 재능이 추월당하는데에서 오는 열등감이었을 것이다.

대장은 마법사를 의지할 수 없음을 알고는 바로 계획을 바꿨다.

"용살포 가져와!"


그의 물건은아니었다. 그저 술잔 같이 기울이던 중에, 용사냥꾼 용병단이 가져왔다는 걸 들었던 것이다.

용의 날개를 쏘아 떨어트리는, 한 개인에게 쏘기에는 너무도 고화력인 무기.


이거라면 저 괴물딱지도 침묵시킬  있다. 그런 확신을 갖고 명령했고, 다른 이들에게 그 생각이 전염이라도 됐는지 그들은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병기를 끌어왔다.

"씨발, 씨발."

장전수는 갑자기 전열로 끌려나온 것에 욕지거리를 뱉어내면서 무기를 장전했다. 당황하고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장전하는 손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대포알을 포신에 밀어넣고, 빠르게 화염석과 약간의 마석을 때려박았다.

순식간에 발포 준비가  포신의 황금색 장식이 섬뜩하게 빛났다.

"쏴, 쏴, 쏴!"

그들은 장전이 끝나자마자 그 기사가 자신들의 방향을 보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레버를 당겼다. 걸쇠에 걸린 듯 포신 중앙에 위치하고 있던 대포알은그렇게 쏘아졌다.

투콰아아아아앙!!!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리를 울리며, 화염석과  가지 배합의 약초와 마석에 의해 강철탄환이 용의 날개조차 따라잡아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쏘아졌다.

한 개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막대한 위력. 어떤 인간이든 맞닥드린다면 곤죽이 될 거력.

쐐애애애애액!!!

그 대포알이 전장을 가로지르며, 섬뜩한 바람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포탄이 날아가는 것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용병대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만약 반신이 이 자리에 서있는 게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대로 잔잔한 승리를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반신이 움직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움직여, 양손으로 쥔 거검을 비스듬하게 들어올렸다가 휘둘렀다.

까아아앙!

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몇 낙관적인 이들은 그 소리가 기사의 갑주가 우그러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몇 번 그 갑주를 무기로 두드릴 수 있었던, 기절하지 않은 중장보병들은 그리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포알이 역류했다. 연어가 폭포를 거슬러오르는 것처럼 날아든 대포알이 포신에 정확히 꽂혔다.

누워서 죽은 척을 하고 있던 중장보병은, 그 기사가 오, 하는 소리를 터트렸음을 들었다.

한 박자 늦게, 대포가 폭발했다.


―퍼어어엉!


안에 담긴 높은 순도의 화염석은 충격에 발화했고, 그 발화는 몇 가지 풀조각의 유독성을 타고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용병대장이 그 희끗한 대포알의 움직임을 포착하자마자 몸을 던진 때에, 그 화염은 뿜어져나와 사람들을 태웠다.


"그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악, 으윽…."


불에 휩싸인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지면에 눕힌다. 드러누운 병사들의 몸에서도 불은 꺼지지 않는다. 삽시간에 인간의 골육을 살라먹은 불은 꺼지지 않고 탄화된 살결을 태우며 일렁였다.


순식간에 지옥이 나타났다. 지옥이란 구체적인 개념이 종교관에 존재하는 서대륙인들은 눈 앞에 벌어지는 참상에 두려워했다.

"쿨럭, 쿨럭."

지휘관 역시 마냥 멀쩡하진 않았다. 대포가 터지며 뿜어져나온 압력에 내장을 좀 다친 탓이었다.

그는 정신 없이 기침을 하다가, 제 앞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눈을 번쩍 떴다.


용병대장의 앞에는 반신이 있었다.


인간이 들 수도 없는 거검을 한손으로 들고, 죽음을 흩뿌리며 그의  앞에 도달한 인간 형태의 종말.


무심히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투구 속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묵묵한 공허만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마치 죽음처럼 차갑고 고요한 공허.

용병대장은 그 투구를보는 순간 두 가지 욕망에 휩싸였다.

이 거리라면, 어쩌면, 무기를 찔러넣는다면 죽일 수라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하다못해 저항이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칼밥 먹는 신세에서 이렇게 압도적인 굴복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손을 등허리로 가져갔다. 단검이 걸려있는 자리였다.

단검을, 단검을 뽑아서. 저놈 고간이라도… 아니면 다리라도…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 앞의 기사가 뿜어내는 흉포한 기색이, 너무도 강력해서 그는 울고 이를 부딪혀대면서 단검으로 손을 천천히 가져갔다.

찌른다, 찌를 거야. 반드시 찌른다.  찌른다. 더뎌지는 이성과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 얄팍한 생존 의지에 힘입어 단검에 손을 가져가던 그는.


풀썩

쓰러졌다. 입에 게거품을 물고, 눈은 까뒤집힌 게 제 의지로 의식을 잃은  같진 않았다.


어쩌면 처참할 수도 있는 그 광경을 보면서, 주현성은 짧게 읊조렸다.

"뭐야 씨발, 아무것도  했는데 지 혼자 뻗네."


그리고 그렇게 비웃었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절실하게 살고 싶어 달리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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