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서대륙
공성 캠프에 생존자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죽거나 도망쳤고, 제 몸을 운신할 수 있으면 바로 부리나케 몸을 빼냈으니 우리가 건진 건 다 죽어가거나 기절한 놈들 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예상 외로 포로가 존재했다는 거다.
특히나 나를 보자마자 기절했던 놈 덕분에 정보를 얻어내는데 문제는 없어보였다. 가장 지휘관스럽게 생긴 게 이 새끼였으니.
그렇게 우리는 성벽 안으로 들어섰다.
군데군데 무너지고, 깎여지고, 화살이 돌 틈새에 꽂혔는지 데롱거리는 참상을 가로질러 걸으며 우리는 초췌한 인상의 어떤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아아, 레베카. 무사했구나!"
초췌한 얼굴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던 남작은, 제 딸이 다가오자마자 표정이 풀어지더니 제 딸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
내게 은근히 까칠하게만 대하다 내 무력을 실감한 탓인지 한 풀 껶어진 태도를 보이던 레베카 역시 눈물을 터트렸다.
내가 남의 비극에 뭐라고 말을 놓을 정도의 개새끼는 아니었던지라, 나는 말 없이 그들 뒤에 서있었다.
눈물의 상봉을 구경하고 있던 찰나, 무언가 내 손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왜?"
메이였다.메이는 제 조막만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올리더니, 한 눈에 보기에도 나 걱정하고 있어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두 눈에 담긴걱정을 못 읽어낼 것도 없었다. 의아한 표정을 되돌려주니 메이가 그 손을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사람 죽였는데… 괜찮아?"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비난하는 거냐고 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메이의 표정에 담긴 건 비난은 커녕 나를 걱정하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울상이었다.
내가 힘들다고 한다면 금방이라도 저 큼직한 가슴으로 나를 껴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어줄 것만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음, 그러게. 괜찮네."
나도 안다. 이게 평범한 반응은 아니라는 걸. 보통 사람을 죽였다면 패닉이 오던가, 아니면 자기합리화를 하던가 하면서정신적으로 비척대야 할텐데, 내 정신은 한도 끝도 없이 명정했다.
영원의 정신의 숨겨진 효과는 아닐까. 반신이 된 탓에 인간의 생명에 무감각해진 건 아닐까. 그렇게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생각해봤지만, 대입된 요소들은 내게 이게 정답이라고 알려주진 않았다.
그래서 확신하지 못하고있자니, 메이가 내 얼굴을 빤히,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내 손을 들어올리며 쥐고는 눈을 꼭 감았다.
…얘 뭐하는 거래?
새삼스러운 행동이라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서 멍 때리고 있자니, 메이가 그렇게 내 손을 꼭 쥐고 있다가 눈을 슬그머니 떴다.
"뭐하냐?"
"…나는 겨울 언니처럼 말재주가 좋지도 않고… 사람을 잘 달래지도 못하니까. 그냥, 그… 내가 옆에 있으니까.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나한테 기대도 된다구… 그런,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어."
그럼 많이 틀리지 않았나, 싶었는데. 어쨌든 걱정이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이다.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고는 손을 뻗어 메이의 갈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메이는 내 손길에 눈을 크게 떴다가 헤헤 웃으면서 내 건틀렛에 제 뺨을 비볐다.
귀여운 년.
"고마워. 힘이 되네."
"지, 진짜? 다행이다."
메이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에 맞춰서 그 큼직한 가슴을 쓸어내리길래 그 가슴을 빤히 바라보니, 메이가 그 눈빛을 눈치채고는 웃었다.
아니지, 좀 색기 있게 웃었다. 은근히 유혹하는 듯 윙크까지 했다.
"대신, 밤에 언니랑 같이 달래줄게."
축축한 목소리로 말하길래, 나는 발기하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하면서 메이의 뺨을 주물렀다.
이 음탕한 년. 갑자기 그런 말 하기냐? 역시 저 G컵 빨통에는 색욕이 가득찬 게 분명했다.
"으히히."
메이는 제 말랑말랑한뺨을 만져지면서 행복한 듯 웃었는데, 그 탓에 나는 남작이 다가오고서도 놓지 못했다.
한참을 주무르던 뺨을 놓으니, 그제서야 초췌한 인상의 남작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 모를 기사님. 저는 이 코넬지어 영지의 주인이자 제국에서 남작위를 하사받은 필립 코넬지어 남작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는, 전사라고 볼 수 없는 체구와 체형이었다.
마른 팔다리에는 뼈와 가죽 정도만 붙어있는지 무척이나 얇았고, 그 위를 감싼 옷가지는 품이 남는 것처럼 보였다.
이정도면 자기 딸보다 자기가 더 가벼운 거 아냐?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남작이 힘겹게 웃었다.
"수성전이 길어지다보니 부득이하게 몸을 관리하지 못해 이런 꼴이 되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측은하게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남작의 모습을 상세히 살폈다.
그 얇은 체구에 어울리게, 남자의 눈동자에서는 미미한 현기가 감돌았다. 지능이 높다기 보다는 좀 더… 직관적인 센스가 좋은 느낌이었다.
훌륭한 정치인이나 상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면 내가 바로 납득할만한 외모였다.
남작의 주홍빛 머리칼과 초록색 눈동자는 되려 그런 병약한 외모와 괴리되어 눈에 띄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주신 도움에도 불구하고 제가 드릴 수 있는 재산이나 보상이 없습니다. 당장에 수성전에 힘쓰느라 가산도얼마 남지 않았고… 영지를 유지하는데 사용할 재산조차 없어 당장이 막막합니다."
확실히, 영주 본인도 저 꼬라지가 될 정도인데 뭐가 남아있을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거점을 틀더라도 허튼 짓 안 하고 성실하게 관리해줄 가능성이 높았다. 허튼 짓을 할 힘도 없거니와 내가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했으니까.
만약 여기에 거점을 틀더라도 방어만 잘해준다면 잘 꾸려나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남작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그거라면 달리 바라는 게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작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가구 대부분이 멀쩡하진 않은 집무실, 남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집무실 탁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있다.
언뜻 거절당했나 생각하게 될 정도로 진중한 모습이라, 나는 괜히 다리를 꼬고는 바로 옆에 앉은 세네카를 흘긋 보았다.
세네카의 표정은 무기질적이다. 얼마 전 나랑 동침했던 거짓말인 것처럼 무표정한 태도로 남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확실히 그랬다.
나 같아도 눈 앞에 반신이자 신살자가 있는데, 그 신살자가 다른 신이 도망쳐오는 걸 쫓아 대륙을 건너왔으며 이 대륙에 좀비를 뿌리고 다니는 미친 신 새끼가 있다고 하면 믿지 않을 거다.
남작은 평범한 귀족이다. 그것도 다크 판타지가 아닌 일반 판타지의 귀족. 그는 한 번 고개를 들어올려 나를 빤히 보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본 게 있으니 믿을 수 밖에 없군요…."
세네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다리를 꼰 채로 남작을 바라봤다.
"저희 코넬지어 남작령에 거점을 트셔도 좋습니다. 원하신다면 적절한 땅을 알아보고 수배해드리겠으며, 자재와 건설을 위한 인력은 저희 측에서 제공하겠습니다. 영주성 재건과 영지의 부활에 힘이 부치겠지만… 반신께서 저희 영지를 굽어살피고 밀려오는 외적을 격퇴해주겠다는데 못해드릴 것도 없겠죠."
거래는 간단했다. 영지 내에 거점을, 그것도 매우 고가치의 마법적 거점을 지을테니 그에 대한 방어 병력과 땅, 지원을 주는 대신 내가 영지 방어에 가담한다.
남작이 아무리 판타지 주민이라고하지만 눈으로 직접 본 나의 무력을 실감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세한 딜에 대해서는 세네카와 상담한 끝에 깔끔하게 정해졌고, 남작은 한층 더 초췌해진 얼굴로 서류를 작성했다.
펼쳐진 양피지에 글자가 새겨진다. 새겨지는 글자는 내가 알아볼 수 없었으나, 잠시 기다리니 바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내용은 말한 것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만 차이가 있었지.
내가 그 양피지를 받아들어 세네카에게 말로 번역해주며 설명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 눈과 마주친 회색 눈동자가 잠시 떨렸다.
"이대로 하셔도 될 겁니다. 제가 보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네요."
"반신을 상대로 사기치다 걸리면 피보는 건 저희 아니겠습니까."
오, 이 새끼 눈치 존나 빨라.
내가 감탄한 표정을 짓자, 남작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끄덕였다.
확실히, 정치질이든 뭐 계약에서 뭘 하든 간에 꼬우면 내가 엎어버리면 그만이다.
형식상의 계약임에도 남작은 작성한 서류를 되돌려받고는 인장을 찍었다.
"…끝났습니다. 서류는 제가 보관하고 있을테니 언제든 필요하면 들려주시고, 곧 제 집사장이 지내실 곳을 안내해드릴테니 급하신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내성 안뜰쪽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귀인께서 타고 오신 배는 저희 항구에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남작의 공손한 인삿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자리에 일어났다. 세네카는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 내게 눈짓했다.
"저는 남작과 상세한 군사 계획이나 재건 계획을 수립하겠습니다. 현성씨는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나는 그녀의 따스한 배려 하에 방 밖으로 나섰다.
황폐화된 복도에는 군데군데 가구를 끌어낸 흔적이 가득했다.
재건에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거점이 만들어지는데로 거기서 살 생각이니 나랑은 상관 없는 황폐함이었다.
그래도 널려진 가구를 짓밟지 않으려 슬그머니 지나가, 목재 계단을 내려갔다.
"아, 현성아!"
그렇게 내려와 선 안뜰에는 두 명의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다소곳하게 모은 손을 꼼질거리며 나를 만지고 싶어하는 겨울의 신부와, 내가 다가오는 사실이 기쁜지 집강아지처럼 헤실헤실 웃어대는 메이.
난 나와 가장 많이 몸을 섞었을 두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다 끝났어? 이제 뭐하면 된대?"
"방 안내해줄 거니까 기다리다가 방으로 가서 쉬래."
"엑, 벌써? 뭐 한 것두 없는데…."
확실히 신이랑 온갖 괴물들을 상대하던 우리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이었다.
물론 내가 반신이 아니라면 좀 힘들었을 수도 있긴 한데… 반신인데 뭐 어째.
만약에 어쩌니 뭐니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응. 그냥 뭐… 쉬자고. 어차피 우리가 지금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메이는 마법 수련 정도가 전부일테고, 나는 진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끽해야 늘어지게 낮잠을 자던가, 겨울의 신부나 메이와 섹스를 질펀하게 한다는 것 정도 밖에 없는데, 겨울의 신부는 몰라도 메이는 메이가 하고 싶을 때에 하는 거지, 아무 때나 내가 할 게 없다고 불러다가 박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부탁하면 와서 박혀주긴 하겠지만.
내 생각과는 별개로, 메이가 침울하게 끄덕였다.
"으응… 알겠어…."
메이는 간단히 납득하길래, 겨울의 신부에게 고개를 돌렸다. 겨울의 신부는 손을 여전히 다소곳이 모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겨울님도 괜찮으시죠? 혹시 뭐 하고 싶으신 거 있으시다던가."
"…예에, 당신과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오, 진짜?
겨울의 신부가 뭘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처음이라, 놀라워 눈을 크게 떴다.
뭐, 데이트라도 하고 싶은 걸까? 근처에 상점이고 뭐고 전혀 없지만, 자연 경관은 훌륭한 편이니 그런 곳을 그녀랑 걷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그간 가만히 있었던 겨울의 신부가 내게 다가왔다. 다소곳이 모아두고 있던 손을 뻗어, 내 뺨에 얹었다.
뭘 하려는 걸까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니, 그녀는 제 베일을 손으로 걷어내고는 내게 입맞췄다.
쪽
언뜻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고, 겨울의 신부의 입술이 내 입술 위를 미끄러지듯 두 어번 쓸고서 떨어졌다.
딥키스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애틋하고 애정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프렌치 키스였다.
내가 그녀의 행위에 얼타는 것도 잠시, 그녀가 수줍게 웃더니 베일을 내렸다.
겨울의 신부는 나 들으라는 듯 요염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