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서대륙
준신이 되겠다고 말한 후, 자작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가 된 기분으로 그 암살자를 따라갔다.
약간의 이동과 마법, 그리고 신성의 결과물로 그는 굉장히 빠르게 황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통이라면 은은히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어야 할 황궁은 어쩐지 미묘한 탁기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자작의 눈에는 그 광경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뻗어진 밤 안개가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초인적인 준신의 감각이 없다는 것도 한 몫 했지만, 그의 처참한 심상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알현하게 된 황제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새파란 애송이는 온데간데 없이 눈 앞에 있는 건 악신에게 자신의 제국을 팔아넘긴 악한.
그런 수식어도 부족하겠지만, 황제는 아무래도 좋은지 눈 앞에 부복한 자작을 보면서 턱을 괴었다.
부복과 보고. 그 보고에는 상세하진 않지만, 제 부하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 들어있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전장을 뒤집어놨으며, 인간이라 보기 힘든 무력을 내보이며 공성캠프 전체를 쓸어버렸다는 이야기.
언뜻 황당할 이야기임에도, 황제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게 가능한 존재를 바로 옆에 두고 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황제는 바로 옆의 봄의 순례자를 바라보았고, 봄의 순례자는 덤덤히 두려워 하면서도 애써 그것을 숨겼다.
그들이 모두 같은 곳을 향했다. 황궁 심처, 어떤 고대인의 무덤을 정벌하고 세워진 제국답게 아주 깊게 뻗어나가는 지하로.
내려갈 때마다 한기가 심해진다. 서늘한 공기가 불어와 그들의 몸을 식힘에도, 자작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떨지 않았다. 이제 육신의 기능이 인간의 궤를벗어나, 더 이상 추위에 떨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자작이 외투를 여미고 두툼한 근육 위로 오한을 드러낼 때, 아무도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덤덤히, 익숙한 일인듯 가장 깊은 곳에 뻗어지는 연구실에 들어섰을 뿐이었다.
들어선 연구실은 바깥보다 한 술 더 떴다.
어두운 공간은 아니었다. 되려 밝았다. 높이 걸린 등불에서는 빛이 일렁거리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촘촘하게 공간을 메우고 있기 때문인지 연구실에는 어둑한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더욱이 소름 돋는 지점이었다. 자작은 널려있는 실험대와 그 위의 시체들, 그리고 괴이한 형상의 괴물들이 온순한 양처럼 굴복한 채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았다.
자작의 경계심은 충분히 발휘되고 있었다. 스스로의 발로 들어온 곳이 아니었다면 진즉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렇기에 암살자도, 황제도, 봄의 순례자도 그에게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았다. 네 남자의 발걸음이 연구실 안을 떠돌았다.
"…준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나?"
갑작스러운 질문이 그 위로 덧씌워졌다. 소리는 울려 자작의 귀에 느릿하게 닿았다.
준신? 신에 준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완전하진 않지만 준하는 수준에 그치는 미숙한신인가?
갑작스러운 신학 문제는 아닌 듯 했다. 그의 목적 역시 준신이 되는 것이었으니.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니, 봄의 순례자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말했다.
"준신이란, 신이 덜 된 이들을 말하는 거지. 그럼 다시 묻겠네. 제대로 된 신에게는 뭐가 있겠는가?"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으나 이번엔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닌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나와 같은 진정한 신들에게는 막대한 신성과 권능, 관장하는 영역이 뒤따르지. 나의 경우엔 순환, 영원, 합일, 초월. 그야말로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대부분 잡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제대로 된 신들에게는 해당 영역에 부합하는 강력하고 명확한 권능들이 뒤따른다네."
이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왔는가. 자랑을 하기 위해서인가. 자작은 가늠하며 말을 기다렸다. 갑작스럽게 걸음을 우뚝 하고 멈춰세운 봄의 순례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들어올린 손에서 검은색 뿌리가 뻗어졌다.
"하지만 준신조차 되지 못하는 모조신들은 신성을 얄팍하게 갖고 있을 뿐, 권능은 없다네. 신성으로 인해 강화된 육체 등을 가질 순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 신성을 쓰는 법을 모르니 단지 신성을 가진 고깃덩이일 뿐이지. 반면."
뻗어진 검은 뿌리가 피부를 타고 기어오르자, 눈이 없이 얼굴에 커다란 뼈가 가면처럼 씌워진 괴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뿌리에 닿는 행위 자체가 무척이나 공포스러운 듯, 몸을 비틀고 두려워 했지만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비명을 질렀을 때 일어나는 일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이 공포에 떠는 동안, 봄의 설명은 이어졌다.
"준신부터는 권능을 가지고는 하지. 하지만 복수의 권능을 사역할 정도로 신성을 갖진 않는다네. 가진다고 하더라도 평균적이고 평범한 권능들 뿐이지…."
실망감이 짙게 묻어났다. 묻어나는 실망감을 읽어낸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무슨 기준에서의 평균인가?"
"…흐음."
봄의 순례자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처음 볼 때부터 이유는 모르겠지만, 겨울의 권능을 옅게 갖고 있었던 자신의 숙적을.
말하다보니 떠오른 것이었지만, 그 인간은 어떻게 그리 많은 권능을 사역하고 있었지?
단순하게 신이 내려준다고 해서 권능을 모두 사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황제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에, 그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봄의 순례자가 손가락을 흔들자, 흔들린 손가락을 따라 검은 뿌리가 뻗어나갔다.
뻗어나간 검은 뿌리가 괴물의 팔을 타고 오른다. 실험대에 묶인 괴물은 제 근력이라면 뜯어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더 큰 체벌을 두려워하는 동물의 그것이었다.
크르아아아악!
고통스러울 때 지르는 비명은 괜찮다. 괴물이 학습한 지식을 뽐내는 동안, 검은 뿌리가 충실하게 괴물의 팔을 으깨놓았다. 으깨진 살점은 죽처럼 되어 붉은색과 피륙 특유의 역한 색깔을 실험대에 덕지덕지 묻혔다.
그 으깨진 상처가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자작이 지금껏 본 트롤들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괴물들 기준으로의 평범이지. 평범하고… 특색이랄 것도 없는 특질들. 다른 누군가 갖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 말일세."
황제가 흐음, 하는 침음성을 흘리자 봄이 설명을 보충했다.
"재생, 신속, 입에서 불을 뿜는다거나, 힘이 강하다던가. 인간적이진 않고 인간의 능력은 아니지만, 신의 범주라기에는 애매한 능력들 말일세. 흔히들 괴물들이 갖고 있다면 그러려니 하고 납득할 특질이지."
암살자와 황제 모두 그런 권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경청하는 동안, 자작은 등에 짊어진 망치가 한 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게 준신들의 권능이지."
으드득
크르르르아악!
다시 괴물의 팔다리가 뜯겨진다. 뜯겨질 때마다 충실하게 살점은 부풀고, 뼈는 자라나고, 혈관은 자리한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한 살점이 박살난 살점을 밀어내자,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실험대 아래로 떨어진다.
"그게 실패한 준신이든, 성공한 준신이든 말이야."
황제는 그 말에 한 때는 자신을 섬기는 이들 중 하나였던 전사를 보았다. 지금은 얼굴에 가면이 씌워진 곰 같은 모습으로, 제 주인의 모진 학대에 비명을 겨우 지르고 있을 뿐인 재생력만 좋은 괴물.
그 괴물은 실패한 준신이었다. 신성에 그릇이 버티지 못한 결과 변질된 모습.
황제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불쑥 말했다.
"그럼 반신은 어떻지? 자네가 말하기로는 그 대전사는 반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반신은 좀 더… 신에 부합하는 권능을 사역하지."
신에 부합한다니. 그는 눈 앞의 존재가 뿜어내는 검은 뿌리나 역병처럼 뻗어나가는 조종 능력을 떠올렸다.
그런 걸 말하는 건가?
황제의 의문에 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성 역시 준신에 비할 바 없이강대하고, 독자적인 영역이나 권능을 갖추진 못했지만 신의 이적이라고 할만한권능을 행사하지. 반신부터는 사실상 신으로 보아도 이상할 게 없다."
황제는 그 말에 호기심을 품었다. 과연 그 반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할지,그리고 포섭이 가능할지.
눈 앞의 신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다. 지금은 명목상 협력하고 있지만, 대체할 수만 있다면 대체하고 싶다.
반면, 봄의 순례자는 주현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명확한 적의이자 경의였다. 창조신을 죽일 때조차 이렇게 애를 먹진 않았건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고는, 등을 돌려 세 명에게 고했다.
"그러니 그대들은 괜히 주현성에게 덤비지 마라. 신성을 상납하는 꼴이 될테니."
암살자는 잔잔한 반발심을, 황제는 흥미를, 자작은 어리둥절함을 느꼈지만 봄의 순례자는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주현성에 대해서 떠올렸다.
사실, 따라올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낸 해상 병력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병력은 사라져 버렸으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반신이 되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나, 보냈어도 상대도 안됐겠지만.
반신. 봄의 순례자조차 한 번 거쳐갔던 경지. 그는 잔잔히 눈을 감고 떠올렸다. 황제에게 주현성이 오고 있을 수도 있음을 알리고, 전역에 자신의 권속을 뿌려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렇게 감시하던 끝에 해안가에 접해있는 어떤 약소 남작령에서그를 찾았다.
주현성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안 그래도 상성이 좋지 않아 싸우기 쉽지 않거늘, 이제는 반신마저 되었다. 이번에 죽는다면 진짜 죽을 수도 있음에 체감이 되자, 잔잔한 고양감마저 느껴졌다.
전사가 아닌 학자 출신임에도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봄의 순례자는 그 점을 신기해하면서 생각했다.
'미리 반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좋다. 차라리 다행이군. 반신이되기 전에도 여름을 죽였던 놈이니, 반신이 된 지금은 얼마나 괴물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적어도 느긋하게 준비할 수 있겠어.'
봄의 순례자는 검은 뿌리로 한창 괴물을 학대하던 것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대들 중 누가 반신이 된다고 그정도 수준으로 강해지진 않을테니, 신중히 하라. 내가 그대들에게 힘을 빌려주고 돕는 것은 그런 이유이니."
애초에 그들 중 누군가 반신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명목상으로 말했다.
"지금 하고 있는 발굴이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그대들 중 몇명은 반신의 격에 오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승산은 당연히 오를테고, 그대들은 종국엔 신으로 군림하게 될 거다."
황제는 그 호언장담에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호기로운 표정이 지워지기도 전에, 황제는 제 암살자에게 슬쩍 몸을 기울였다. 암살자는 도끼처럼 휜 특이한 가면을 쓴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 귓가에 황제가 작게 속삭였다.
"저렇게 말하니 흥미롭구나. 가서 조사해보고, 언제든 빈틈을 찾는다면 죽이거라. 죽여서 내게 가져오도록."
봄의 순례자는 썩어도 신이라, 그 말을 듣지 못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아둔한 시도다. 잘못한다면 기껏 만들어놓은 준신이 죽어나갈 결과가 될텐데도, 봄은 말리지 않았다.
지금 말려봤자 듣지 않은 것은 자명했다. 직접 그 힘을 겪어봐야 허튼 시도를 하지 않을테니.
오히려, 그 허튼 시도로 인해 황제가 위기감을 느낀다면 무척이나 좋았다. 겁에 질린 황제는 봄의 순례자에게 의존하게 될테니. 순례자는 그래서 말리지 않았다.
게다가 대전사가 그간 해왔던 걸 떠올린다면, 암살자 정도는 위협도 되지 않는다. 그 근처에 있던 왠지 존재감이 희미한 계집이 감각이 좋았으니, 암살을 시도하기도 전에 들켜서 두들겨 맞을 수도 있을테고.
결국 봄의 순례자는 관심을 드디어 자작에게 돌렸다. 자작은 장대망치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는데, 언제든 그 망치를 끌어내릴 수 있게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지만, 충분히 무에 숙달된 이들에게는 전투 직전의 자세임을 눈치챌 수 있을 법한 기색이었다.
경계하고 있는 건가. 좋았다. 쾌락주의자처럼 단락적인 흥미를 쫓는 황제나 그런 황제의 말이 아니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 암살자와는 달리, 자작은 훌륭한 준신이 될 수 있어보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훌륭한 장기말 같았다.
"실험대로 올라가라, 자흐렌 자작."
자흐렌 자작은 그간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경계만 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호명당해 곤란해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거부할 수도 없었다. 자흐렌 자작은 망치를 내려놓고, 실험대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렇게 드러누운 실험대는 상상 이상으로 차갑고, 무기질적이었다.위에서 무수한 생명이 죽어나갔는지 탁한 색을 빛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등골이 아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토록 생명이 깃들었던 실험대임에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정하다는 게 그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
자작은 다가오는 봄의 순례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이 신성 주입이 끝나면, 괴물이 되어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아내와 자식도 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묵묵히 밀려들어오는 신성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