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7화 〉서대륙 (127/274)



〈 127화 〉서대륙

"확실히 복구는 힘들겠군요."

세네카의 목소리가 침통한 가운데, 나는 혼난 애새끼처럼  앞에 앉아있었다. 표정에서 그렇게 티는 안 나겠지만, 솔직히 좀 잘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들던 차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게 넘겼던 가보를 분지르는 걸 넘어 완전 개박살을 내버렸으니, 내가 세네카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빡칠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정당하게 일해서 받은 대가라지만, 막 쓰다 분질러 먹었으니.


솔직히 세네카가 화내더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었는데, 세네카는 나를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다소 후련한 모습으로 칼날 한 토막도 남아있지 않은 칼자루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걸 테이블 위에 얹어두었다.


"겨울씨, 확실한 겁니까?"


그 후련함과 침통함이 적당히뒤섞인 목소리로 세네카가 물었다. 그러자 겨울의 신부는 다시 칼자루를 집어들었다.

집어드는 손길에서 조심성은 없었으나,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세계를 뒤져도 그녀보다 수리를 잘 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누가 와도 고나리질  수는 없었다.


겨울의 길고 하얀, 소복이 쌓인 눈을 떠올리게 하는 검지가 그 칼자루를 훑었다. 훑어내리는 손길에서는 연민과 자애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훑어내리던 손길이 결국 검날에 닿았을때에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예에, 날이 완전히 날아가고, 깃들어있던 마법이 사라져 설령 새로운 검날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이후로는 평범한 강철검일 거예요. 애석하게도, 제 부군의 손에서 쓰여지면서 그 마법이 전부 소비된 모양이예요."


오, 당신 말고 부군이라고 하니까 개꼴리네.


억지로 표정을 감추며 턱을 쓸자, 세네카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새삼 세레나가 보여줬던 후련한 태도가 떠올랐다. 마도서와 마검, 그 둘 모두 가문을 향하던 책임감과 속박이라고 생각한다면, 저 표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드디어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듯, 내밀어지는 칼자루를 받아든 세네카가 피식 웃었다. 눈을 가릴 듯 드리우던 차양 같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세네카가 나를 보았다.


무심결에 나는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현성씨가 죄송할 일은 아니죠. 싸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칼날이 망가질까 싸우지 못해 죽는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녀의 단련된 손가락이 칼자루 위에서 떠돌았다. 떠도는 손길은 망자의 눈을 감겨주는 사제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나는 그 경건하고 우수에 찬 손길과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참 조용히 칼자루를 더듬던 세네카는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무 서서히 들어올려 나를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건 그녀가 입을 연 이후였다.

"오히려 이 아이는, 현성씨처럼 위대한 전사의 손에서 마지막 검명을 흘렸음을 기뻐할 겁니다. 예, 분명 그럴 거예요. 그러니 너무 죄책감 가지실 것 없습니다. 저희가 뭐라고 할 처지도 아니니까요."

저희가 드린 물건이 아닙니까. 세네카의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말았다. 그녀는 내쉬는 한숨과 함께 칼자루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겨울씨의 수리 솜씨는 제가 본 어떤 장인보다 뛰어나니, 제대로 된 설비가 있으면 어떻게든 되는 거 아닐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겨울씨라고 하더라도 이런 걸 어떻게 하지는 못하시는 거군요. 좀 안심했습니다."


안심?

말이 잘못 나왔나 싶어서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대로 들으신  맞습니다. 겨울씨에게 솔직히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에 우수한 능력, 저와는 비교도 안되는 가사 능력에 초인적인 감각까지. 그야말로 전사이자 반신인 인물에게 가장 합당한 신붓감이더군요. 나름 첩인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럴 것까지야.

나는 몇명이든 안겨오는 여자가 많더라도 성실하게 임하는 편이라 저런 걱정이 나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네카는 자존감이 낮은 편인지 한참이나 겨울의 외모 같은 것을 칭찬했다.

그 칭찬은 결국 겨울의 신부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가렸을 쯤에야 끝났다.

"그래도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라 다행입니다. 현성씨의 격에 어울리는 물건이었으면 좋겠군요. 가보가 부러져가면서 구한 물건인데, 그보다 못하면 폼이 안 살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걱정은, 아마 접어둬도 좋을 법 싶었다.


어지간한 공격에는 뚫리지도 않았던  갑주를 갈라내고, 그 어떤 공격에도 버텨냈던 거인의 힘 근육이 잘려 뼈까지 닿았던 톱날.

방패의 본 목적인 방어가 아닌 공격이 무척이나 적합한 능력. 어떻게 발동하는지 알지 못해 아직까지 써보진 못했지만,  기능은 무척이나 강력했다.


지금  근력으로 베어내지 못할 것은 없지만, 앞으로 어떤 적이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방패를 어루어 만지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네카를 바라보았다.

"상세한 기능은  모르시는 겁니까?"


세네카가 말했다. 그에 나는 알고 있는  있었지만, 어떻게 쓰는지는 알지 못하니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뱉어냈다.

"기능을 알고 있긴 합니다만, 어떻게 써야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발동 방법을 모른다고나 해야할지."

"방법이라. 흠, 하기야 적이 어떻게 쓰는지 일일히 설명하면서 싸우진 않았겠군요. 짐작 가시는 건 없습니까?"

아예 없는  아니다. 얼추 그 방패를 쓰던 놈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몇 가지 단서가 나오긴 한다.

물이나, 신성, 마법.

셋 중 하나겠지.


얼추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이니, 세네카가 그 방패를 밀어내 내게 떠밀었다. 테이블을 나뒹굴던 방패를 집어들어 팔에 걸치니, 방문이 벌컥 열리고 메이가 들어왔다.

"입고 왔어! 어때? 어때?"


우리의 장비에는 약간의 혁신이이뤄졌다.  같은 경우에는 그레이톰의 심판을 정식으로 허리춤에서 빼내고 도끼를 오른쪽 허리춤으로 옮겼고, 왼손에 방패를 제대로 메었다.

메이에게는 한 가지 장비가 추가됐다. 원래 한 명이 장비가 바뀌면 필요 없는 장비를 물려주는 건 국룰이라, 메이가 두르고 온 갑주 차림에는  가지 없었던 것이 추가되어 있었다.

깡총대며 박차를 굴리는 메이를 바라보던 세네카가 픽 웃고, 겨울의 신부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녀석, 은근히 재롱에 재주가 있다니까?

메이에게 내가 선물한 것은 박차였다. 레크노미어 왕가의 비보 중 하나라는 박차. 발을 굴러 박차를 땅에 튕겨내면 가장 완벽한 전투마를 만들어낸다는 기물.


으레 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식량, 공간이 이 전투마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착용자의 정신에 감응하여 만들어지니 생물이 아니라서 식량을 주거나 보관할 필요도 없었고, 정신에 감응하여 움직이니 교육이 필요 없었다. 그냥 움직이고자 하면 자동으로 움직였다.


내가 사용해도 충분히 좋은 물건이지만, 그건 거인의 힘을 상시 발동하지 못하는 대전사 주현성이던 시절에나 유효하던 이야기였다.


지금은?


반신이 된 지금은 그냥 내 발로 뛰는  훨씬 빨랐다.

말이기에 생기는 부피의 확장은 자연히 다소의 불편함을 불러왔고, 그렇기에 쓰면서 은근히 불편함을 느끼던 차였다.

이미 기동력이라면 거인의 힘에다 사슬갑주의 가속으로 충분하다. 오히려 차고 넘친다. 여기에 전투마까지 잘 쓸 정신은 없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투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있을리가.


그래서 지금 메이는 제 판금 장화 위에 얹어진 박차를 좋다고 꺅꺅대며 자랑하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대충 칭찬해줬다.


"어, 되게 예쁘네. 마음에 들어?"


"응, 엄청 좋아! 우리 현성이가 쓰던 거라 그런가?"


"오, 귀여운 말도  줄 알아? 이리와 이 귀여운 짱깨."


"히히."

다가온 메이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으니, 메이는 억누른 웃음 소리를 흘리면서 기뻐했다.


귀여운 년. 곱슬곱슬한 고동색 머리칼을 손바닥과 손가락을 써서 굴리고 있으니,  광경을 물끄러미 보던 세네카가 불현듯 한 마디 툭 던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시험해보러 가시는  어떻겠습니까?"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찌뿌둥한 몸도 좀 풀고 말이죠. 세네카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애완견처럼 북슬북슬한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말을 들으니, 꽤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실내에서 방패를 실험하다가  개지랄이라도 나면 수습하기 힘들다. 메이가 방금 받은 박차 역시 그러했다.


박차는 기능이 어려울 것도 없으니 실험이랄 것도 없었지만, 적응은 다른 문제니.

"그러죠. 적당한 곳 아십니까?"

*


넓은 들판, 수련할 곳이 필요하니 인적이 드물다 못해 없는 곳을 추천해달라고 한 후에 도착한 곳이었다.


장소를 제공해준 남작은 버려진 농지이니 다소 태우고 파헤쳐도 별 문제 없다고 했으니,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들판에 섰다.

지평선까지 쭉 뻗어진 들판은 사람의 마음을 이 광경만큼 탁 트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들판 위로  인마가 달리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또랑또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울리고, 그 인마가 내 앞을 훅 지나간다. 지나가는 말은 무척 하얀색이었다.

저거 흙탕물 한 번 지나가면 존나 더러워지겠네, 싶은 순백의 준마.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 왕자가 타고 나올 법한 백마였다. 그  위에 타고 있는 건 귀엽게 예쁜 편인 소녀였는데, 몸에 두르고 있는 갑주나 박차, 검과 방패는 어쩐지 동화속 영웅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존나 다크 판타지인데.

 웃으며 백마를 타고 들판을 질주하는 메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인적 없는 곳이었다. 전쟁의 여파가 닿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다지 좋지는 않은 농지였는지 풀들은 밟을 때마다 대놓고 바스라지는 소리를 내며 뻣뻣했다.

물론 내가 농지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걸로 농지의 질을 판단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괜히 안 좋은 농지라니까  그런 거 같고.


"나도 슬슬 해봐야지."

메이를 계속 구경해도 괜찮긴 하겠지만, 방패의 기능을 실험해보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던 차였다.

 팔에 메어진 방패로 시선을 떨어트리니, 방패의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원형의 언뜻 심플해보이는 흑회색 방패에, 겉면에 그려진 태양 문양.  태양의 불꽃을 형상화한 듯, 태양의 원을 중심으로 방패 끄트머리를 향해 그려진 16개의 칼날.

언뜻 보기에는 그저 태양을 그려낸 양각정도로 보이는 이 방패의 그림은, 기믹이 발동하면 화염을 형상화한 16개의 칼날 부분이 길어져 회전하며 닿는 것들을 베어버리고, 갈라버린다. 마치 전기톱처럼.


 살과 갑주를 갈라낼 정도로 강력했던 그 기능.

그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어 좋아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버튼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강하게 움켜쥔다고 발동하는 것도 아니고.

방패 자체도 내 팔뚝에 묶어둘 뿐인 평범한 방패처럼만 보인다.

겨울의 신부도 한참 만져보고 모르겠다고만 했다. 방패 자체에는 뭔가 특별한 발동 장치는 없어보인다고도.


그러면 방패 외적인 요소로 발동한다는 건데.

도통  수가 없었다.

얼추 물, 신성, 마법 중 하나 같아보이긴 했는데.


한창 방패를 들고 고민하고 있으니, 말을 타고 한참을 달리던 메이가 내 앞에 멈춰섰다.


"왜 그래? 뭐가 안돼?"


"이거 쓰는 법을  모르겠어서."

"뭐를? 방패면 막는 거 아냐?"

"아니, 그 이거 쓴 새끼가 뭐 하니까 이게 전기톱처럼 되더라고. 그게 신기해서 써보고 싶은데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헤엑, 전기톱? 되게 신기하다! 그럼, 그, 뭐더라. 네가 화염 쓰는 거! 그거 쓰고 전기톱 써줘!"

"응?"

메이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번쩍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럴 듯 해보였다.

화염을 두른 전기톱이라. 존나 멋있잖아?

물론 화염 부여가 이 방패에 걸린다는 게 전제로 필요하겠지만, 어지간하면 화염 부여가 안되는 물건은 화염석 정도 외에는 없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나는 방패를 내려다봤다. 태양이 그려진 흑회색 방패를.


그래, 일단 화염부터 되는지 확인해보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화염을 불러일으켰다.

푸화아악!

그렇게 방패 전체를 타고 화염이 타올랐다. 닿는 이를 사정 없이 살라버리는 여름의 화염이.


화염이 둘러진 방패는 아까보다 더 위압감이 있어보였다. 낙인이랑 조합하면 좀 멋있겠는데?


만족스러운 광경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철컥


엉?

갑자기 기계장치가 동작하는 소리가 들려 방패를 바라보니, 화염이 사라지고 있었다.


권능을 흡수하는 효과라도 있는 건가? 미묘한 불안감에 바라보니, 방패가 변하기 시작했다.


둘러진 화염이 사그라들듯 응집하더니, 방패 중앙의 원형 그림에 자리했다.


그렇게 자리한 화염은 드글거리며 방패  끄트머리를 향해 뻗어있는 칼날을 향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꿈틀거린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그 과정에는 1초도 소모되지 않았다.


설마? 진짜?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화염을 두른 칼날들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길어진 칼날들 16개가, 방패의 테두리 부분 너머까지 길어져 송곳처럼 돋아났다.

어떤 야만인들의 방패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거니 싶은 순간, 그 칼날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그 칼날은 거세게 돌아가며 전기톱의 칼날이 무언가를 갈아내는 것만 같은 소리를 흘렸다.

칼날들은 회전하며 거센 열을 주변에 흘렸다.


해저에서 그 심해 엘프가 썼을 때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거센 폭력성. 닿는  뭐든 열과 칼날로 저며서 갈아버릴 것만 같은 흉포함.

그 흉포함이 애꿎은 들판 위에서 울려퍼졌다.

"어어 씨발."

그 흉포함은 들판을 죄다 태우고 풀들을 갈아버린 후에야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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