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서대륙
내가 본의치 않게 불태운 들판은, 다행히 민가에서도 무척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 때는 황량하긴 하지만 나름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던 밭은, 점점 생산능력이 떨어짐에 따라 버려진 농지가 되었다.
인근에 지어진 민가가 몇 개 있긴 하지만,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데에서 짐작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살던 이들 역시 그 땅을 떠난 듯 싶었다.
목축지로 쓰기에는 전문적인 목자나 도축업자 등이 없어 그렇게 경제력이 좋지 않았고, 그 탓에 코넬지어 남작령은 그 땅을 버리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불태워버린 풀들과 휑하게 드러는 벌거벗은 들판, 전기톱에 갈려 파헤쳐진 흙더미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누구에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것.
안도하는 마음으로 방패를 흘긋 내려다봤다.
기믹은 예상 이상이었다. 방패의 겉면을 장식하는 쇠붙이와 양각으로 이뤄진 태양은, 발동하는 순간 회전하는 전기톱으로 변모하여 닿는 모든 것을 갈아버렸다.
그 위력은 내 생각을 초월해 있었고, 자연히 파헤쳐진 언덕은 무척이나 흉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내 근력으로 휘둘렀을 때 어떤 참상을 만들어낼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파괴력.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 방패의 발동 기믹은, 신성으로 작동했다.
만약 내가 반신이 아닌 제대로 된 신이라면 훨씬 능수능란하게 발동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니 자연히 기믹은 신성을 담고 있는 권능을 걸어주는 것으로 발동되었다.
그리고 그게 약점으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었다.
파헤쳐진 흙더미에 남아있던 선명한 열상에는, 뚜렷한 고열로 인한 작열흔 역시 남아있었다.
닿는 놈을 불태우면서 달궈진 칼날을 고속으로 회전시켜 갈아버린다. 병신이라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강력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기믹이었다.
어쨌든 기믹을 알게 된 건 좋은 점이었다. 우리는 약소한 소득을 바탕으로 남작령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 그 들판에 다시 찾게 되었다.
나는지금 남작령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하지만 자작령과 인접한 땅 위에 있었다.
"…저만 신기한 건가 싶네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당신께는 죄송하게도…."
"아뇨, 죄송할 것까지야."
눈 앞에서 지어지고 있는 나름 거대한 건물을 보면서 턱을 쓸어대니, 겨울의 신부가 베일 속 표정을 숨긴 채 호응해줬다.
지어지는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보통 현대에서는 기계를 사용하는 일들을, 일부 마법사나 원시적인 기계로 대체하니, 마냥 그렇게 느리지도 않았다.
우리는 남작에게서 새로운 부지를 받았는데, 그 부지는 자연히 자작이 침공해올 때 가장 전선에 합류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병영의 역할도 하는 건지 들판을 수비하는 병력 역시 상주할 수 있는 건물이 쌓아올려지고 있었는데, 남작이 이후 상로를 재구축하고 상업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던 계획을 떠올리면 합리적이었다.
남작령은 제국령 끄트머리에 걸친데다 동쪽과 남쪽에는 바다를 두고 있었다.
인근에 약소하게 존재하는 시골 마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상인들은 북서쪽에 위치한 자작령을 거쳐서 내려올테니, 접경지대라고 할 수 있을 지점에 순찰대와 강력한 존재가 기거하는 거점을 만들어두는 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래서 나는 딱히 반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위치에 그다지 불만도 없었고. 넓게 탁 트인 들판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보기 좋았으니.
나와 메이, 겨울의 신부와 세네카. 거기에 배에 남아있던 전사들과 병사들은 기거할 곳이 생겨나자, 아예 그곳으로 거점을 옮겨왔다.
고대의 도시처럼 굳건하고 거대하지도, 발데가리아처럼 화려하지도 않지만 나름의 보금자리에서 지낸다는 건 내게 말랑말랑한 정취를 선사했다.
아직 웜홀을 만들어낼 정도는 아니라서 고대의 도시나 발데가리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점도 꽤 클테지만.
내 침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지어지고 있는 건물 외에도 안뜰에서 열심히 움직여대는 메이가 보였다.
메이는 한창 훈련에 힘 쓰고 있는지 세네카와 목검으로 공격을 주고 받고 있었다.
"열심히 하네."
"네에, 언제나 밤이 될 때까지 마법을 수련하시거나, 말을 타는 법을 배우거나, 칼과 방패를 쓰는 법을 세네카씨에게 배우고 계셔요."
"그거 참… 열심히네요."
했던 말을 또 하는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하진 않았지만, 겨울의 신부의 반응은 옅었다. 그녀는 단지 그 인자한 눈꺼풀을 차분히 감은 채 내 옆에 앉아있었다.
마법만 해도 그리 시간이 많진 않을텐데, 마법에 승마술, 검술에 방패술까지. 얼추 보더라도 상당히 바빠보였다.
그 반면, 나와 겨울의 신부는 지나치게 한가했다.
침략군도 없었다. 다치는 이도 없으니 겨울의 신부도 물약을 만들 이유가 없었고, 수리할 아이템도 없었다. 그녀는 나처럼 한가했다.
한가한 내가 창 밖을 내다보고, 겨울의 신부가 멍하니 있는 동안 남작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자흐렌 자작은 아주 견실한 남자이며, 이 인근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 중 하나라는 말을.
앙숙이라고는 하지만 단방향적 앙숙이고, 자흐렌 자작은 그다지 악감정이랄 것을 갖고 사는 이는 아니나, 전쟁을 하게 된다면 충실하게 뿌리 뽑을 때까지 전투에 임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지금처럼 한가한 모습은, 자흐렌 자작과 자주 인근 산림의 벌목권 때문에 충돌했던 남작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수상하고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진즉에 본대를 이끌고 재공격 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고도.
그 모든 우려에서 불구하고 자작은 두문불출하며 병력을 보내오지 않았다. 마치 사라진 것처럼. 남작령의 방어를 조건으로 거점을 틀기로 했었던 내 입장에서는 좋기도 하지만, 나쁘기도 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무척이나 괴로웠다.
뭐 그렇다고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작령의 본대까지 찾아간다고 내가 패배할 것 같진 않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할 정도로 자작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
늘어지는 기분으로 창틀에 팔을 얹고서, 멀뚱히 창 밖을 보고 있으니 문득 무언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겨울의 신부였다. 그녀는 인자한 표정으로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겼다.
"순찰이라도 가시지 않으시겠어요?"
순찰이라? 그녀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 침묵을 읽고 먼저 대답했다.
"제가 아직 당신이라는 부군을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간수분들은 종종 지루하실 때면 순찰을 나가시고는 했어요. 저는 그분들과 동행해 그분들의 야영지를 세워드리거나, 뭐가 있진 않은지 소리를 들어드렸어요. 그분들은 소소한 변화마저도 어쩌면 큰일을 방지할 수 있는 단서가 될지 모른다며 항상 초계에 임하셨어요. 당신께서도 정 무료하시다면, 저와 함께 외출하시는 게 어떠실까요?"
수용소 때의 이야기인가.
그렇게 나쁘진 않은 제안이었다. 지금 나는 지루하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면 말라죽는 법. 과연 뭐라도 하는 게 좀 더 생산성이 있어보였다.
물론 그 말이 내 마음을 끌어당긴 가장 큰 이유는, 암만 봐도 이건 겨울의 신부가 청하는 데이트 신청 같았다는 거였다.
"좋죠. 뭐 챙길까요?"
"혹시 모르니 약간의 건량과 물주머니 두 개… 그리고 당신과 제가 나눌 포도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 요망한 년. 딱 봐도 데이트네. 내가 피식 웃으며 옷깃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끌자, 그녀는 내 손에 이끌려 기립하더니 내게 그 음탕한 몸을 기대왔다.
풍만하고 실크로 감싸여진 가슴이 내 가슴팍 언저리에 눌려 형태가 바뀌었다. 그 탄력 있는 촉감에 내가 웃음을 흘리니, 겨울의 신부는 손을 뻗어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둘러진 팔을 끌어당겨 입맞추고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그래도 구색이라도 맞춰야지. 내 목을 감싼 그녀의 팔을 살살 간질이면서 말했다.
"갑주 좀 입혀주실래요?"
"예에, 기꺼이."
나름 전투 준비라고 할 수 있을 차림이지만, 목적은 불순한 채로 우리는 자작령 인근의 평원으로 향했다.
*
보통의 순찰은 순찰을 위한 병사들과 귀와 눈이 좋은 정찰병들을 대동하기 마련이다.
그 정찰대의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색적해낸 대상이 적대적인 경우가 많으니 즉시 대응해야할 때를 대비하거나 기습받을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순찰대에겐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 어떤 정찰병보다 귀와 감각이 좋은 겨울의 신부는 수백보 너머에 있는 토끼 움직이는 소리에도 내게 알려줄 수 있을테고.
그 어떤 군사집단을 데려와도 쓰러트릴 수 있을 압도적인 돌격력을 지닌 내가 함께 있으니, 오히려 수가 적은 게 좋았다.
그래서 나와 겨울의 신부는 단둘이서 평원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나를 가로막으려고 했던 병사들도, 내가 그 소문의 괴물 같은 존재임을 알고는 조용히 길을 비켜주었다.
넓게 트인 평원, 내가 얼마 전 전기톱 방패로 갉아버렸던 언덕에서는 다소 멀고, 조금만 더 간다면 자작령에 접어들게 될 커다란 들판.
즐비하게 깔린 풀들이 저녁 바람에 제 몸을 흔들어대는 곳에서, 나는 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풀들과 겨울의 머리칼을 보았다.
창 밖으로 불어오는 함박눈처럼, 그녀의 머리칼은 풍성한 모양새를 드러내며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흔들렸다.
겨울의 신부가 그 바람에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그 모습마저도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나 청순녀 취향이었나? 새삼스러운 취향을 자각하여 조금은 머쓱한 가운데, 겨울의 신부가 내게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왠지 즐거워보이는 미소를 얼굴에 건 채로다가와 양손을 내밀었다.
마치 제 조모에게 쿠키를 받는 어린아이처럼, 은은한 익살을 얼굴에 건 채로.
"뭐 드릴까요?"
"당신의 사랑도 있을까요?"
"아, 그거 다 떨어지고 없는데. 엊그제 겨울의 신부라는 분이 전량 매입해 가셨거든요."
"아쉽네요. 그럼 대신… 당신의 입맞춤과 손은 있을까요?"
"그건 좀 있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실 없는 농담을 흘리며 그녀의 이마에 입맞추고, 다가서 손을 잡는다. 내 손이 손바닥 위로 올라오자, 그녀는 그 손이 귀중한 보물인 양 손으로감싸더니 쓸었다.
쓸어내리는 손동작에서는 애정이 가감 없이 듬뿍 묻어났다. 잔잔히 흐르는 차가운 체온을 자각하며, 이마에 맞췄던 입술을 끌어내려 그녀의 얼굴을 훑는다.
미려한 콧선을 지나, 괜히 콧망울에 입맞추면서 입술을 지분대니 그녀는 장난치지 말라는 듯 내 손을 꾹 쥐었다.
예전이라면 좀 아팠을텐데, 거인의 힘 탓인지 우리의 근력은 동등했다. 하지만 의미는확실히 전달되었다.
나는 고개를 슬쩍 꺾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었다. 맞대고 쓸면서, 내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손장난을 치던 그녀에게 내 몸을 밀착시켰다.
허벅다리를 밀어 그녀의 고간부를 슬쩍 쓸어대니 그녀는 몸을 흠칫하더니 내 손을 놓고는 나를 끌어당겨 껴안았다.
그녀에게 껴안겨 팔을 두르니, 꽃냄새 같은 게 술술 풍겼다. 어째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걸까.
그 향을 맡으며 한참간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에도, 평원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희미한기척 같은 것을 제외하면.
결국 입맞춤은 끝을 맞이했다. 아무리 반신이라지만 숨이 거칠어지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숨을 고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 것도 안 왔죠?"
"…네에? 네, 네… 아마…."
겨울의 신부는 상기된 얼굴로 나를 껴안은 채로 있다가, 내 가슴팍에뺨을 기대며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러면 순찰의 의미가 없잖아. 거기서 해도 될텐데. 슬쩍 웃자, 겨울의 신부는 제 뺨을 내 가슴팍에 비벼대면서좋아했다.
나도 겨울의 신부를 좋아했다. 그건 부정하지 못했다.
이렇게예쁜 여자가, 나 좋다고 앵겨오는데 싫을리가.
게다가 뭔가… 겨울의 신부에게는 묘하게 끌리는 면모가 있었다. 자애로운 태도 때문인지, 세상에 유리된 듯 하지만 언뜻 내보이는 인간다운 모습이라던지.
이러니 내 신부지. 그녀를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괜히 나왔네요. 방이었으면 그대로 겨울님이랑 하는 건데."
"그러게요. 당신께서도 실수하실 때도 있군요."
"자주 하는데요."
실 없는 이야기를 그녀와 주고받는 동안에도, 평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와 그녀 밖에는. 어쩐지 주시당하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과 함께.
그 한적함은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