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3화 〉영지전 (133/274)



〈 133화 〉영지전

어,  새끼 봐라.


다가가면서 느낀 거지만,  새끼에게는 신성이 있었다.

나나, 봄의 순례자나 여름의 도살자처럼 명확하고 강력한 신성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신성을 갖추고 있었다. 얼추 친다면 헤로디아가 만들었던 괴물보다는 높은 수준으로.


문제는, 그 신성이 실시간으로 커지고 있다는 거였다. 신성이  강함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휘두르기 위해 어깨에 짊어진 거검을 고쳐쥐는데, 자작이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군, 남작령의 수호자."


목소리는 정확히 상상한 바였다. 전형적인, 전사의 고집과 그 나이까지 계속해온 베테랑의 자부심이 여실히 느껴지는 굵직한 중저음.


 중저음의 주인은  웃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떨궜다.


"아니지, 그건 그대에게는 걸맞지 않은 호칭이겠군. 동대륙의 반신."


…이런 씨발.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내가 병신인  아니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어깨에 짊어진 거검을 일부러 흔들고서, 말했다.


"그럼 그쪽이 자흐렌 자작이겠군. 하, 느껴지는 걸 보면 뭐라고 불러야할진 모르겠지만."


"적. 한 단어면 족하다네."

웃긴 놈일세. 진짜 존나 견실하잖아. 웃으니, 자작은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망치머리 윗부분이 평평한 탓인지  위에 올려둔 망치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작은  상태로 제 손 안에서 투구 하나를 굴렸다.


그 투구는 독특한 모양새였는데, 거기에 돋아있는 뿔장식을 보자니 망치와  세트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투구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겠지.  그런가?"

맞는 말이었다.  가지 질문만 빼고.

자흐렌 자작이 신성을 얻었을 경로는 너무도 뻔했다. 우연의 일치로 그 몸에 신성이 내려진 것일리는 없었다. 나는 어깨에 얹어진 거검을 끌어내려 한손으로 쥐었다.

"그 새끼는 어딨지?"

내 말에 자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투구를 제 머리 위로 올려, 엄숙한 모습으로 그 투구를 끌어내려 머리에 뒤집어썼을 뿐이었다.

얼굴 전체를 뒤덮은 그레이트 헬름. 언뜻 염소의 뿔을 모방한 철장식이 뻗어진, 독특한 모양새의 투구.


자작은 그 위에 전신을 두르는 판금갑주와 동물의 가죽을 다듬어 방어구로 만든 털가죽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후우웅

땅에서 들어올려지는 망치에서는 심상치 않은 거력이 맴돌고 있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네, 동대륙의 반신. 오직 승자만이 패자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는 바, 그대가 다른 은원의 해결을 원한다면 눈 앞의 투쟁부터 해결해보게나."

그대도 전사라면, 투쟁으로 말하라.


중저음이 공간에 울려퍼지고, 자작이 장대망치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빈틈 하나 없어보이는, 다소 뻔하지만 숙련된 자세.

이 새끼도 여름의 도살자랑 같은 부류인가?

헛웃음을 흘리며 거검을 양손으로 움켜쥐니, 소리가 들려왔다.

차자자작!
동시에 몇십 몇백의 병장기가 끌어내려지고, 겨눠지는 소리. 자작의 군대가 나를 에워싼 채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기기긱

 사이마다 궁수가 활을 내밀어 시위를 당기고, 창병들이 침을 삼키며 자세를 낮추었다.


족히  단위는될 법한 활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자작은 그 모습에 자세를 풀었다. 망치를 내려 땅에 찍으며 외쳤다.

"무기를 거둬라, 자흐렌의 병사들아!"

이유도 없는, 단순한 명령. 하지만 병사들은 그 명령에 곧장 무기를 끌어내렸다.


고슴도치의 그것을 뒤집은 듯 빽빽하게 나를 에워싸고 있던 창병진이 거둬지고, 나를 향하고 걸쳐진 화살들이 시위에서 내려가 화살집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미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으니, 아까보다는 덜했다. 제 군주를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나는 그게, 존나게 이상했다.

아까는 병력을 사지로 내몰면서 내게 쏟아내다시피 했으면서, 이제는 나한테 무기를 겨누지 말란다.


정신병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자작을 바라보며 거검을 들어올리니, 자작 역시 아까 취했던 것과 같은 자세를 취하며 망치를 집어들었다.

내 기색을 읽었는지, 아니면 찔린 건지. 자흐렌 자작은 조용히 읊조렸다.

"그대가 이 전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나는 자흐렌의 주인이자 병사들 위에서 군림하는 군주, 지휘관으로 임했다. 허나 그대는 지금 내 앞에서, 자신의 애병을 높이 들어올린 채 맞서고 있지. 그러니 지금부터는…."

철컥

망치가 강하게 움켜쥐어지자 건틀렛에 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자흐렌 자작은 투구 속에서 눈을 불태우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사로서 임하겠다."

그리고는 더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자작은 나를 노려보며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신중한 걸음이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거, 존나게 견실한 새끼네.

아무래도 남작의 평가는 옳은 모양이었다.

저 남자는 견실 그 자체인 전사였다.



*

후우우웅!


휘두른 폭군의 검을 따라, 폭압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분노 자체는 아까 해소했기에 강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주현성의 근력은 초월적이었다. 강대한 괴력에 공간이일그러지는 듯, 공기가 일렁이는 듯이 보일 정도였다.


그에 맞서는 자흐렌 자작은 뒤로 물러나면서 망치를 짧게 휘둘렀다.


까아앙!

부딪힌 망치와 폭군의 검이 격철음을 내고, 튀어오른 불똥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주변을 밝힌다. 자흐렌 자작이 휘두른 망치에 부딪힌 폭군의 검은 궤적을 완전히 읽고 땅에 쳐박혔다.


주현성은 그에 힘으로 억지로 검을 들어올렸다. 부자연스러운 궤적을 그리며 띄워진 거검은, 얕게 흙먼지를 흩뿌리며 치켜올라갔다.


쿠우우웅!
그리고 내리찍는다. 그야말로 근력을 잘 살리는 전투법에, 자흐렌 자작은 눈쌀을 좁혔다. 목소리나 생김새에 대한 보고로 들었을 때에는, 약관이라고 생각했거늘, 전투에 기이하게도 능숙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저런 괴력을 가지고 싸워온 게 처음이 아닌 것만 같은 싸움법이었다.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노하우 있는 전투.

하지만 완전하진 않았다. 그게 자흐렌 자작을 의아하게 했으나, 전사로서 오랜 시간 싸워온 자흐렌 자작은 본능에 가깝게 움직였다.

거리를 벌려 아슬아슬하게 공격이 빗겨나게 한다. 실력 위력 때문에 충격파가 생기고, 튀어오르는 흙과 돌덩이가 방해이나 자흐렌 자작은 거두지 않고 바로 내리찍어진 무기 위로 망치를 겹쳤다.

깡!


대장간에서 검을 벼리는 것처럼, 망치머리가 정확히 검첨을 두들긴다. 공격이 끝난 순간에 내리찍어진 탓인지, 주현성은 팔에 아릿한 감각이 내달리는 걸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씨발, 이대로 찌르려고 했는데.'

확실히 폭군의 검은 끄트머리가 둥근 편이지만, 이걸로 찌르면 깔끔하게 두동강이 날 정도로 위력만큼은 강력하다.


하지만 자흐렌 자작은 그걸 읽은 듯, 먼저 선수 쳐 망치로 칼끝을 두드리고는 바로 주현성의 옆으로 돌아갔다.

두들기자마자 즉시였다.

쩡!


"큭."

옆으로 돌아가며 휘두른 자루 끝이 옆머리를 두들긴다. 투구를 쓰지 않았으면 관자놀이에 틀어박혔을 공격은, 주현성을 비틀거리게 했다.


보통의 전사라면 파고들었을 그 틈, 자흐렌 자작은 뒤로 크게 뛰어 피했다.

쿠와아아아악!
두들겨 맞아 열이 오르고, 그 열은 그대로 근력으로 치환되어 쏘아졌다. 횡으로 흉포한 소리를 내며 휘둘러진 거검은 자흐렌 자작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씨발."


그에 주현성이 욕을 씹어뱉었다. 입 안이 피로 흥건했다. 부딪힐 때 칠칠맞게도 입 안을 깨물어 버린모양이었다.

 방 먹였다. 그 사실에 들뜰 법도 하건만 자흐렌 자작은 침착하게 자세를 잡았다. 망치 머리가 뒤를 향하고, 자루 끝이 주현성을 향해있는 전형적인 자세. 주현성은 그에 카운터를 노리고 있다고 봤다.

좋아, 맞받아쳐 보던가.

주현성은 게임으로 친다면 딜교환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맞딜을 하기로 했다.


저쪽의 근력과 이쪽의 근력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으니, 서로 공격을 치고받는 식으로 교환한다면 그의 우위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주고받는다면 주현성의 우위다.


능숙한 전사인 자흐렌 자작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자세는 속임수였다.


투웅!


주현성의 몸이 쏘아지고, 바닥을 걷어차며 거리를 좁힌다. 거리를 좁혀서 하는 공격은 찌르기, 몸에 가까이 붙여 태클처럼 나오는 찌르기였다.


방어하기엔 힘들고, 피하는 게 고작인 면적이 넓은 공격. 자흐렌 자작은 그에 간단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까아앙!

쩌억!


"씹…!"


크게 휘두를 듯한 자세 그대로 망치를 빠르지만 체중을 싣지 않고 휘둘러 검면을 두들겼다. 두들겨진 옆면을 따라 주현성의 몸이 기우니, 바로 자흐렌 자작은 앞으로 내딛으면서 망치를 찔러 옆구리를 두들겼다.


"으아아!"


그리고 주현성이 분노에 차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몸을 빼낸다. 완벽한 히트 앤 어웨이에 주현성이 이를 바득 갈았다.

'씨발, 존나 능숙하네.'


주현성은 분노를 억누르면서 투구를 점검하고 거검을 움켜쥐었다.

결코 여름의 도살자급은 아니었다. 그 전사신보다는 약했다. 기술이면 기술, 권능이면 권능, 신성 또한 부족한데다 근력은 비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현성보다는 기술이 능통했다. 물흐르는 듯한 연격과몇십년은 쌓아올린 듯한 막힘 없는 공격과 판단력. 자신보다 크고 강력한 괴물들 역시 다수 상대해봤는지 전법 역시  잡을  없었다.


주현성보다 한참은 뛰어난 전사였고, 주현성 역시  눈 앞의 자흐렌 자작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주현성의 입을 빌리자면 꼴 받게 했지만, 한 편으로는 침착하게 생각해볼 틈 역시 생겼다.


주현성이 선택할 전법은 간단했다.

초월적인 괴력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위력을, 단 한 번이라도 맞추면 전세는 기운다.

그걸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일견 바보같아 보일 수도 있는 전법이지만, 주현성은 자신의 어줍잖은 게임 경험상 전략을 바꾸는 것보단 밀어붙이는 게 낫다고 보았다.


그 게임 경험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진 알  없었으나, 주현성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자흐렌 자작 역시 맞서며 그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강력한 위력을 가졌을 장대망치로도  공격을 해내지 않고 깎아내는 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짧은 대치 후, 주현성이 먼저 달려들었다.


콰아앙!

포탄이라도 쏘는 것 같은 돌진음에, 자흐렌 자작은 망치를 굳게 쥔 채로 날아드는 공격을 바라보았다.


초월적인 근력, 그야말로 산이라도 뽑을  있는 근력에 의해 속도는 아득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준신이 되면서 증가한 신 특유의 감각과, 전사로서 40년간 쌓아올린 경험으로 인해 자작은  궤적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오히려 주현성이 인간형을 하고 있기 때문에, 궤적을 짐작하기란 손쉬웠다.


몸통 중간을 쪼개놓기 위한 횡베기. 여력을 남겨둔 연격의 첫동작. 자흐렌 자작은 다시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는 모습을 본 주현성은 횡으로 휘두른 검이 품으로 돌아오자마자 팔을 움직여 제 머리 위로 검을 들어올렸다.

반동작도 안되는 사이에, 바로 검이 내리찍어진다.

전 체중을 실은 종베기. 내리찍어진 땅에서 10m 높이까지 흙을 치솟게 하는 아득한 강격. 속도와 힘 모두 비할 데가 없었다.


하지만 자흐렌은 거기까지 읽어냈다. 망치를 단단히 쥐고 뻗었다.

깡!

옆으로 돌아 피하면서 자흐렌 자작은 망치를 휘둘렀다. 짧게 휘두른 망치는 다시 한  검의 옆면을 두들겼다. 두들긴 방향으로 나아가며 다가왔다.

불의의 공격이라, 주현성은 실렸던 힘이 감퇴되는 걸 느끼면서 옆을 보았다.


곧게 쥔 망치가, 자흐렌 자작이 몸을 돌림과 동시에 치달아왔다.


까아앙!


아까보다는 강력한 위력. 카운터이기에 방어는 하지 못했다. 주현성은 투구의 옆면이 움푹 패여 머리를 누르는 것을 느끼며 비척비척 물러섰다.

"우와아아아아아!!!!"


그에 병사들이 환호했다.

괴물보다  괴물 같은 기사를, 자신들의 주군이 상대하며 연거푸 공격을 먹이는 광경은 절망으로 내몰렸던 병사들에게 활기를 선사했다.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주현성을 향한 욕설과 저주를 빠르게 쏟아냈다.

"니미 씨발."

주현성은 그 광경이 몹시 고까웠다. 상대의 기술이 뛰어난 건 그러려니 하지만, 이때다 싶어 욕을 뱉어내고 있는 새끼들은 무척이나 짜증났다.


그래서 그는 폭군의 검을 바닥에 강하게 꽂았다.


쿠 웅


울리는 폭음에 병사들이 조용해졌다.


주현성은 그 검을 내버려두고 자세를 잡고 있는 자흐렌 자작을 바라보았다.

유효타  번을 내지 못했다. 묵직하고 무거운 폭군의 검은, 괴물들에게는 미친 듯이 잘 먹히지만 저런 노련한 전사한테는 빈틈만 많은 무기일 뿐이었다. 주현성의 기술이 일천한 이상 지금 당장은 써봤자 좋을 게 없었다. 차라리 맨주먹으로 싸우는 게 낫겠지.


주현성은 폭군의 검을 포기하고허리춤에 메어져 있던 도끼를 뽑아들었다. 뽑아들며 방패에는 화염 부여를 사용했다.


뽑아든 낙인이 제 주인의 신성으로 거세게 드글거렸다.


"2 페이즈, 해보자고."

그리고 화염 부여가 깃들어진 방패가 변형을 시작했다.

화염이 방패가 아닌 방패날 겉면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길어진 칼날에 깃들었다.


깃든 화염이 타오른다. 타오름은 곧, 굉음을 동반했다.

그 소리는 그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소음이었다.

화염으로 타오르는 칼날이 거세게 회전하며 자아내는 소음에 병사들이 귀를 가리며 움츠렸다. 더 이상 욕이나 저주를 뱉어내는 병사는 없었다.


자흐렌 자작은 그 위협적인 모습에 눈쌀을 찌푸렸다. 시끄럽긴 했지만, 귀를 막으면 몸은 어찌 지킨단 말인가.


대신 자작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지금껏 취했던 오소독스한 자세가 아닌, 망치머리를 앞으로 내미는 견제가 중심에 수비적인 자세.

주현성이 그 모습을 보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비록 머리는 좆같이 울리고 있었지만, 왠지 즐거워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콰아아앙!

그렇게 달려드는 반신을 향해, 준신이 망치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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