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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화 〉영지전 (135/274)



〈 135화 〉영지전

밤이 지나고, 동이 터온다. 떠오르는 태양이 들판을 익혀버릴 듯 높게 치솟고 있으나  들판 위의 그 누구도 태양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기실, 대부분의 인파는 그 태양의 움직임은 커녕 아침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전투는 그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자작의 부하들  대부분은 한 때 이름을 날리던 전사와 용병. 무기를 다루는 법으로는 어지간한 인간을 뛰어넘을 그들은, 제 주인과 그에 맞서는 반신의 강철의 춤사위를 보고서 넋을 놓았다.


까각, 깡!

쩌억!

애애애애앵!


주현성이 도끼를 날카롭게 내리찍자, 자작의 장대망치가 그것을 빗겨낸다. 자루로 겨우 빗겨내고서는 단단히 쥐고 있던 망치를 돌려 망치머리를 내찌르듯 뻗었다.

뻗어진 쇳덩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톱날을 성실하게 막아내고, 깎여나갔다.


가가가가가가각!!


거슬리는 소리다. 몇명은 귀를 틀어막으면서도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회전하는 톱날이 불길로 쇳덩이를 그슬리며 깎아내는 가운데,  명의 움직임이 흔들린다. 자작이 앞으로 내딛으며 다리를 내지르자, 주현성이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피하면서 도끼를 짧게 휘두르는데, 휘둘러지는 도끼날에 담겨진 화염은 보통이 아니었다.

직격하면 팔다리는 가볍게 가져간다. 자작은 피하는 주현성에게 망치를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신체의 반동을 이용해 망치를 횡으로 휘두르던 도중에 종으로 내리찍었다.


까아앙!

"…크."

주현성의 배갑을 두드린 망치가 튕겨져나가기 무섭게 주현성이 물러섰다.


간만의 유효타, 들뜰 법도 하건만 병사들은 조용했다. 자작 역시 기뻐하거나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반신, 근력에 있어서는 그 어떤 괴물을 가져오더라도 상대할 수 없을 유례 없는 괴물이다. 자작이 망치를 내밀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자, 주현성이  배갑을 문질렀다.

전투의 양상은 뻔하게 흘러갈 것처럼 보였다. 주현성이 밀어붙여서 승리를 따내려는  편, 자작은 깎아내듯 주현성을 소모시켜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전투는 막상 보이는 것 이상으로 수싸움이 이뤄지고 있었다.

주현성의 승리 조건은 상대의 무장 해제나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내는 것.

자작의 승리 조건은 짧은 공격으로 깎아내며 소모시키다 강력한 공격을 치명적인 부위에 먹여 확실히 끝을 내는 것.


언뜻 뻔한 싸움임에도 준신의 신체능력과 거인의 힘이 결부되니 그렇게 뻔하지도 않았다.

실상, 이걸 뻔하다고 말할  있는 존재는 없었다.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자작이 망치로 주현성을 겨누면서 흘긋  무기를 바라보았다.


도끼는 자루로 제대로 받아내더라도 가볍게 잘릴테니, 자루로 받아내고 즉시 흘려내야 했다. 하지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저 방패. 어마어마한 수준의 절삭력과 거력 때문에, 자루로는 흘려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잘려나간다.


막아내려면 반드시 금속이 많아 상대적으로 썰어버리는데 시간이 걸리는 망치머리로 막아내야 한다. 최선은 피하는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쉽진 않았다.

자작은 그제서야 제 망치머리를 바라보았다. 염소의 흔적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몇 번 깎여져 원래의 형상은 채 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비관할 정도는 아니다. 자작이 자세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나름대로 소모된 자작은 전세가 기울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싸우기로 한 이상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전투를 이어나간다면, 언젠가는 패배하고 만다. 가장 유효한 수는 도박과도 같은 승부수였다. 제 방침이나 주현성이 읽어냈을 수를 뒤집어내는 도박.


그 한 번으로 전황을 뒤집는다. 자작이 다가오자, 주현성이 도끼를 손 안에서 돌렸다.


주현성 역시읽어내고 있었다. 이대로 전투가 이어져간다면 자신이 이길테니, 최대한 밀어붙이는 한 편 자작이 준비하고 있을 승부수를 맞받아칠 준비를 해야한다.


그는 제 팔에서 솟아나는 검은 연기를 흘긋 보고는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두 신성자가 다시금 격돌했다.

선공은 주현성. 파고들어 휘두르는 도끼의 거력이 심상치 않다.  번 휘두르고 말 힘은 아니었다.

후우우웅!

도끼가 지나간 자리가 일렁이며 아지랑이를 피워내고, 자작은 눈을 부릅뜨며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한 발씩 물리며 거리를 벌리려고 애썼다.

역시 예상대로, 주현성은 휘두를 때마다 도끼를 고쳐쥐어 다시 휘둘렀다. 자작은눈을 감지 않으려고 얘쓰며 그 움직임을 눈에 새겼다.


과연, 움직이는 궤적은 뚜렷한 형식이 없었다. 어디서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닌, 족히 수십년은 사용한 듯한 익숙함. 그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빨라지다 못해 열선이 되고, 자작에게 닿으려는 순간.


카앙!


자작은 그제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자루를 뻗었다. 뻗어낸 즉시 자루를 기울였다.

카가가각!

불똥을 튀기며 치솟는 도끼. 이대로라면 성공적인 방어다. 하지만 자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도끼가 치솟아 거두기도 전에, 자작의 발이 주현성의 앞에 딛어졌다. 딛은 발을 축으로 측면으로 돈다. 주현성은 그 움직임에 도끼를 회수하려고 하지만.

카각

어느새 자작의 망치머리가  도끼의 날에 엉켜있었다.


설마, 하며 주현성이 물러서기도 전에, 자작의 팔이 움직였다.

카아앙!

그야말로 한 전사의 평생이 담긴 신기에 가까운 기술. 자작의 망치머리에 걸린 도끼가 튕겨져 나가듯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자작은 제 양팔보다 수 배는 강할 주현성의 악력에서 도끼를 뺏어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대로 밀어붙여야 하는 건 주현성 뿐만이 아니었으니.

자작은 바로 파고든 그대로 위를 향하고 있던 망치머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며 자루 끄트머리로 주현성의 턱을 올려쳤다.

쩌어엉!

덜컥


 흐르듯 이어지는 연격에 주현성의 투구가 벗겨졌다. 턱이 젖혀진다. 날아가는 투구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주현성의 두 눈동자가 간합을수놓으며 끌어내려졌다.

으득


이를 가는 소리, 주현성은 턱을 가격당해 머리가 흔들리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파고들었다. 파고들며 팔을 내질렀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방패가 굉음을 울리며 날아들었다.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뻗어지는 방패. 돌아가는 톱날. 드글거리는 열기에 자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막아내는 것만이 유효하지만.

두 번 생각할 틈은 없었다. 자작은 곧장 다리를 벌리며 망치를 빠르게 휘둘러 방패에 격돌시켰다.


까아아아앙!

드드드드드드드득!

부딪힌 순간, 불똥이 미친 듯이 치솟았다. 마치 용접이라도 하는 것처럼, 쇠물이 후두둑 떨어져 들판을 더럽혔다. 건틀릿 속에서 자작의 손아귀가 미친듯이 덜덜거리며 찢어지고 있었다.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하지만 방패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주현성은 오히려 방패 한 켠을 붙잡아 밀어붙였다.


드드드드드득!!!

힘겨루기. 결과가 뻔한힘겨루기에 자작이 입술을 깨물자 방패와 장대가 서로를 스치며 지나갔다.

"…큭…!"


고열과 압도적인 회전력에 결국 망치머리가 완전히 짓이겨진 쇳조각으로 변해 바닥에 떨어지지만, 자작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일격을, 한 번이라도 기회를 벌어낼 수 있을 일격을 먹이기 위해.


길게 잡은 장대가장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횡으로 큰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방패에 망치머리가 부숴지면서 생겨난 빈틈에 자작이 억지로 공격을 때려박았다.

날아드는 공격이 향하는 곳은 주현성의 머리였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부위라면   뿐이었다.


피할 수 없다. 피하기엔 자세가 너무도 불안정하다. 방패를 급하게 휘두른 탓에 주현성은 피하기는 커녕 막아낼 틈도 없어보였다.

자작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손목을 움직여 공격을 뻗어냈다.


'끝이다!'

그리고 날아드는 장대가 주현성의 머리를 으깨기 직전, 주현성의 몸에 검은 연기가 둘러졌다.


투확!


귓전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주현성의 신형이 가속한다. 뒤로, 움직일 수 없을 궤적으로. 자작의 표정이 구겨졌다.

주현성은 아껴두었던 가속을 사용해 공격을 피해냈다. 허공에 파공성을 자아내며 휘둘러진 망치자루가 되돌아가려는 때에, 주현성은 가속의 끝에서 발을 땅에강하게 딛었다.

쿠우웅!


명확한 빈틈이었다. 노림수가 실패한 영향으로 생겨난, 뒤집을  없는 빈틈. 자작이 자루를 들어올리자, 주현성의 발이 단단히 바닥을 딛고 뛰어올랐다.


뛰어오른 주현성을 올려다보며 자루를 겨누던 자작은, 바로 자신에게 향해서 달려오는 듯한 방패를 보고서는 겨눴던 자루를 눕혀 그 궤적을 가로막았다.

 체중을 앞으로 쏟아내듯 휘두르는 주먹에는 방패가 달려있었다.


방패에는 신성으로 타오르는 톱날이 달려있었다. 그 톱날이, 제 주인의 신성에 감응하여 회전을 시작했다.

그 회전은 굉음을 동반했다.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자세를 겨우 되찾은 자작의 자루와 톱날이 격돌했다.


드드드드드드, 콰직!


격돌한 톱날이 자루를 잘라내고 나아간다. 체념한 표정으로 팔을 늘어뜨리는 자작을 향해.

으지지지직!!!

그렇게 나아간 톱날이 자작의 가슴팍을 으깨고, 갈비뼈를, 내장을 갈아내며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소름끼치는뼈가 부숴지는 소리와 함께, 자작이 그 방패를 붙잡으며 쓰러졌다.



*

쿨럭, 쿨럭. 하는 소리를 내며 자작이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


솔직히 아슬아슬한 전투였다. 이쪽에게 힘이 있는만큼, 자작에게는 나름의 전략과 기술이 있었다.

신들과의 싸움처럼 압도적인 힘과 권능으로 서로 힘싸움을 하는 게 아닌, 제대로 된 수싸움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토혈을 뱉어내고 있는 자작에게다가갔다.


"…훌륭… 하군… 예상을, 쿨럭, 쿨럭! 뛰어넘, 었어."


방패는 반절 이상 자작의가슴팍을 가르고 들어가 나머지 반 밖에 보이지 않았다. 설령 신이 오더라도 살릴 수 없을 부상이라, 바닥에 꽂혀있던 도끼를 허리춤에 끼워넣으며 다가갔다.


자작은 내가 다가서는 소리에 흐려지고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투구는 쓰러지면서 벗겨진 건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숨긴 건가…?"

아마 내 사슬갑주에 담겨있는 가속 능력을 말하는 것 같았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니, 자작이 쓰게 웃었다.

"두 수, 는 앞서있다고 생각, 했거늘…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군…그대의 승리, 다. 동대륙의 신살자여…."


자작의 갈색 머리칼이 들판 위에 뉘여지고, 자작은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자작령은 이제… 그대의 것이다. 원, 한다면 남작에게 넘겨줘도 좋겠지. 하지만… 자네와 싸웠던 어느 노병의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지, 않겠는가."

"물론이지. 말해봐."

자작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내 부하들은, 살려주게. 능력은 물론이고, 자작령의 발전과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이네.  자랑이지… 부디 내 유품으로 그들을 받아주지 않겠는가?"


어려운 이야기였다. 제 영주를 죽인 이에게 쉬이 협력할 거라고 생각되진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잘 아는지, 자작이 덧붙였다.

"이들도, 저항하지 않을 걸세. 그렇더라도  이름을 들먹이면… 가라앉겠지."


"그럼 받아들이지. 당신의 부하들, 영민, 자작령 내의 모든 군인은 내 비호 하에 있을 거다."


"한시름 놓았군… 그럼… 말해주겠네."


무슨 정보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어 무릎을 굽혀 자작 앞에 자세를숙이니 자작은 띄엄띄엄 말을 늘어놓았다.

"자네가 찾는 신… 봄의 순례자는 황제와 함, 께 있네.분명 그럴테지. 도중에 찢어질 것 같은 동맹은 아니더군…. 그리고 황제의 근래 논란이 있는 통치 방식은… 봄의 순례자가 지령, 한 걸 채우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네."

지령한 거?


새삼 헤로디아가 신이 되려고 했었던  떠올랐다.


그리고 눈 앞의 자작과, 암살자가 신성을 갖고 있던 것도.

설마.


"표정을 보니 알겠군… 자네가 생각한 게 맞을, 걸세. 봄의 순례자는 자네가 오는 알고 있고… 황제로 하여금 실험체와 재료를 모아, 준신들의 군대를 만들고 있다네."

준신들의 군대.

 어감만 하더라도 무척이나 어색했다.


신성을 가진 존재로 만든 군대라니.

나 같은 놈을 죽이기 위해 준비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암살자가 나를 묶는 것만으로도 애를 먹었는데,그게 군대를 이룬다니.


착잡한 마음으로 자작을 내려다보니, 자작이 웃었다.


"저 비열한, 암살자도. 그간 기회를 노리다, 이번이 기회인 줄 알고 덤볐을테지. 저 암살자는 황제의, 측근.아마 이후로는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걸세."

과연,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준신은 분명 강력한 존재이긴 하지만 이미 반신의 수준에 이른 나 정도는 아니었다.


자작은 노련한 전사인데다 내가 화신 강림의 쿨타임 중이라 싸움이 성립했던 거지, 결코 아주 강력하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힘든 싸움이 될 것임은 능히 짐작할  있었다. 자작 하나만 상대하는 걸로도 꽤 고역이었는데, 나를 쓰러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는 전사들이 군대를 이룬다면.


해결책을 찾아야했다. 준신들을 한 번에 침묵할 수 있는 방법이나, 내가 더 강해져 준신들의 군대를 상대로도 싸울 수 있을 해결책이.


자작은 그런 내 숙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다음에, 자네가 어디로 가야할진. 내가 잘 알고 있지. 이들이 준신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교단의 성유물. 신이  세상에 남긴, 신성을 담은 물건들. 자네는, 교단으로 가야하네. 교단의 협력을 구하게. 그들, 보다 먼저… 성유물을 찾아내게."

교단이라.


익숙한 어감은 아니었지만, 이 외의 달리다른 선택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니, 자작이 제 가슴팍을 짚고깊게 호흡했다.


자흐렌의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더니,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 웃었다.

싸울 때만 하더라도 투지를 태우던 그 눈동자는, 이제 삶에 미련이 없는 중년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눈을 서서히 감으며 중얼거렸다.

"좋은, 싸움이었…."


들썩이던 가슴팍이 잠잠해진다. 흘러나오던 피의 기세가 약해졌다.


내 손으로 한 명 더 죽였음에도, 여전히 나는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고장난 것만 같은 감성에, 씁쓸하게 웃으며 방패를 뽑아들었다.


방패를 뽑아내고 물러나자 에워싸고 있던 자흐렌 자작의 부하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자작의 시체를 둘러싸고 눈물을 흘렸다. 흘리는 말들에는 많은 감정이 섞여있었다.

애써 그 말을 무시하며 한 마디를 뱉어냈다.

"그래, 좋은 싸움이었다. 자흐렌 자작."

자작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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