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소에르 수도원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작과 별 표정이 없는 세네카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진의를 알아내려는 듯 보이는 남작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대로 들으신 거 맞습니다. 교단 측에 접선해야 합니다."
자세한 사정을 묻고 싶은 건지 남작은 제 턱을 쓸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별 다른 걸 말해주진 않았다.
솔직히, 자작이 죽어가면서 알려준 정보에 따르자면 황제는 준신들의 군대를 만들고 있고, 더 만들어내기 위해서 성유물을 찾고 있으니 교단과 접촉하는 편이 더 쉽게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거란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명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닌데, 그걸 어떻게 남작이 받아들일지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삶과 영지, 영지전에 시달려 피폐해진 얼굴을 쓸며 곤란해하던 남작은, 결국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확히는 교단에 말을 전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대륙이 초행이다 보니 좀 헤멜 것 같기도 하고, 이쪽이 협력할 의지가 있음을 알려주는 게 우선일 것 같아서요. 내용은 다시 설명드리겠지만, 이쪽에는 그 교단 측에 전적으로 협력할 의사가 있다는 내용이면 충분합니다."
내 말에 남작은 곤란한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건, 내 부탁이 곤란해서 나오는 그런 표정처럼 보였다.
곤란할 게 있나? 얘도 나름 귀족 아닌가?
"표정이 안 좋으신데. 코넬지어 남작님은 귀족 아닙니까? 이런 쪽 연줄도 있으실 줄 아는데요. 뭔가 곤란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합리적인 추리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귀족들은 본래 통치의 기반으로 종교를 이용하기도 하는 편이니, 설령 그다지 독실해보이지 않는 남작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종교 쪽 연줄이나 이름 정도는 터놓지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심지어 코넬지어 남작은 외모에 걸맞게 상인다운 양반이었다. 득실에 밝고, 타산적인 한 편 이용할 수 있는 자원에 있어서 그다지 감성적이지 않은, 그런 귀족.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았는지, 남작은 곤란해하면서 침음성을 뱉어낼 뿐 딱히 거부하거나 부정하진 않았다.
수락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의외라서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으니 그 중년이 내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뭐지? 뭔데?
세네카를 돌아보지만 세네카도 잘은 모르겠는지 고개를 작게 가로젓기만 했다.
결국 남작은 내가 도로 그에게 고개를 돌릴 쯤에야 말했다.
"동대륙에서 오셨다고 하셨던가요. 그렇다면 모를만도 하군요. 이해합니다. 사실, 좀 복잡한 사정이라서 말이죠."
남작의 두 손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깍지를 껴고 나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는 바리케이트처럼 굳건히 그 자리를 버티고 섰다.
딱 봐도 불안하거나, 뭔가 말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의 제스쳐. 내가 남작을 흘긋 보니, 그는 그런 제스쳐를 취하면서 힘들게 말하기 시작했다.
"만약 제가 교단 측에 연락을 넣으면 장검 연맹 측에서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장검 연맹?
이름이 되게 단락적이었다. 뭐, 검을 쓰는 군사계 귀족의 연맹인가.
같은 사문을 두고 있다던가.
남작은 눈만 살짝 올려 내 표정을 읽어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를 겁니다. 장검 연맹은 강력한 군사적 능력을 갖춘 귀족 연맹입니다. 하지만 맹주의 특수성에서 오는 독특한 점 때문에 장검 연맹이라고 불리우고 있고, 현재 공국의 실세로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특수성?
검의 달인인가 하고 넘겨짚으려는 찰나 남작이 대뜸 말했다.
"그 맹주는 인간이 아닙니다. 좀, 다른 종족이죠. 아주 먼 예전, 동대륙을 건너와 용병이 된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상세한 과거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맹주의 겉모습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고요?"
"예, 그는 강철로 된 인간 형상의 무언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길 생각도 없죠. 드러난 황동색 외갑은 어지간한 무기로는 파괴되지 않는 단단함을 갖추고 있고, 그 맹주 본인의 실력 역시 그에 뒤지지 않습니다. 혼자서 능히 10명을 제압할 수 있는 달인이라고들 하더군요."
꽤 흥미로운이야기였지만, 그게 왜 교단과 관련이 있는지 왜 장검인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오지 않아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역시나 남작은 힘겹게 말을 이어가면서도 최대한 내게 설명해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본래 장검 연맹은 귀족이 아니었습니다. 본디 전사단, 몰락한 기사단이나 쇠락한 왕족들이 뭉친 일련의 용병들이었죠. 그들은 완전히 혼란해진 공국을 평정하고 그 땅을 나누어받은 구국의 용사들이자 전쟁 영웅입니다. 공국의 원로회 자리를 차지하던 부패한 교단을 척결하고 그땅을 차지했기 때문인지 교단과 싸워본 경험이 많고, 교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죠."
남작은 잠시 제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찻잔을 집에 들어 들이키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 중 맹주의 언행이 그 연맹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연회장만을 남겨두고 그는 무장 없이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그 연회장에 들어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매복하고 있던 공국의 잔당이 튀어나와 쇠뇌와 활을 겨누었다는군요. 수에서도 열세, 위치로도 좋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해 비무장으로 들어온 건 실수였노라고 이죽거리는 원로회들에게 일갈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곧 잘 벼린 한 자루의 장검이니, 두려워할 건 없다고요. 그리고 그말대로 그는 두려움 없이 대연회장을 제압하고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게 장검 연맹의 이름이 되었죠."
오, 그거 존나 멋있네.
나라도 가능하겠지만, 나는 반신이고 저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비범하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인상 깊은 이야기라 고개를 끄덕이니, 세네카가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아, 맞다.
"그래서 그게 교단 측에 연락을 못하는 것과는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들은 걸로는 그냥 잘 빠진 이야기에 불과해보입니다."
"여기 바로 인근이 공국의 영토입니다. 코넬지어 남작령은 교역으로는 괜찮은 영지이나 공국의 인근인 탓에 공국의 눈치를 봐야하죠. 그리고 들었으니 아실테지만,공국은 부패한 종교귀족에 의해 몰락한 국가입니다. 민심 역시 종교에 달갑지 않죠. 교단 측의 병사들과 주로 싸움을 해왔던 장검 연맹 역시 그럴 겁니다."
아, 그런 건가. 납득한 듯 보이는 내 모습에 남작이 겨우 웃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교단에 가시는 것이나 교단 측에 도움을 구하는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실 겁니다. 단지 저희 남작령이 드릴 수 있는 직접적인 도움이없을 뿐이지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주시길."
어쩔 수없는 일이었다.
남작령은 이제 막 영지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회복하고 있었고, 내 덕에 말미에 완전히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아보였다. 당장에 성벽도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걸 보자면.
거기에 자흐렌 자작령의 관리 역시 그에게 일임해서, 그는 졸지에 두 영지의 관리를 맡아야 하는 실정이 되었다.
내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진즉 못한다고 했어도 이해할 수 있는 업무량이었다.
남작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나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물론 직접적은 도움은 못 드리긴 하지만, 거점은 저희 측에서 관리하겠습니다. 이 인근에서 가깝진 않지만 가장 확실하게 교단 상층부와 이어져있는 지점까지의 길도 알려드릴테고, 여비와 장비, 야영물품 등의 자잘한 물자는 저희가 챙겨드리겠습니다."
오, 그거 좋네.
의외로 확확 나가는 이야기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남작이 만족스럽지만 좀 처량하게 웃었다.
너무 뜯어먹는 건 아닌가 싶긴 한데, 자작령도 먹었으니 알아서 하겠지.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묻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그 교단 위치가 어딥니까? 사전에 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남작은 대답하지 않고, 테이블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지도였다. 좀 낡긴 했지만, 지형지물이 꽤 또렷하게 표시되어 있는 깔끔한 지도.
측량이 정확한지는 좆문가인 내가 알 턱은 없었고, 단지 그 지도의 겉으로 보이는 퀄리티를 믿는 수 밖에 없었다.
남작은 그 지도를 펼쳐 손가락으로 짚어나갔다.
바다를 왼쪽에 끼고 움직인 손가락이 스멀스멀 올라가더니 산 하나를 지나쳐 숲이 삼면에 끼어있는 언덕처럼 보이는 곳에서 멈췄다.
확실히 엄청 멀진 않았다. 그렇게 가깝지도 않아보였지만.
남작은 짚어낸 지점을 손가락으로 쓸며 말했다.
"여기입니다. 사람들은 여기를 소에르 수도원이라고 부릅니다. 수도원이라는 특성상 외부인이 자주 찾아오는 편은 아니지만, 위치에서 이점이 많고 전통적으로 교단의 귀중품이나 성물을 보관하는 역할을 해, 근처에 마을이 꽤 있습니다."
확실히, 남작이 짚고 있는 수도원을 상징하는 건물 그림 근처에는 마을의 그림이 드문드문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걸 보자니 수도원에서 퇴짜를 먹는다면 마을에서 머무르면 될 것처럼 보였다.
남작이 손가락으로 짚어나간 길을 완전히 외운 건 아니었지만, 남작은 출발할 때 따로 약도를 쥐어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지도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 이후는 길지 않게 남작이 당부하는 말들이 있었다.
가도를 따라 걸으면 어지간해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황제의 무리한 정책으로 인해 산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과, 얼마 전에 제도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던가 하는 것들.
소에르 수도원에서 제도가 한참 떨어져있단 걸 감안하면 그렇게 쓸모 있는 당부는 아니었지만 얼추 주워섬기며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더 쓸데 없는 정보를 풀어낸 후에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준비는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준비라. 여비 자체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딱히 돈이 없다고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고, 정 필요하면 지나다니는 산적이라도 때려잡으면 되는 거 아닐까 싶었으니.
하지만 식량이나 야영 장비는 필요했다. 반드시 도시에서 머무르게 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제국이 전체적으로 혼란한 상황인 것 같았으니.
도시에 들어가기는 커녕 도시의 경비대가 우리를 쫓지 않는다면 다행일 정도였다.
그럼 인원은 적은 게 좋았다. 인원이 너무 많으면 불필요한 주목을 받게 된다. 봄의 순례자가 나를 확인한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엿같을 수도 있는 주목을.
메이, 나, 겨울의 신부.
이 세 명이면 충분했다. 가사 전반과 보조적인 역할로는 뺴놓을 수 없는 겨울과 내 일행 중 나 다음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메이만 있다면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걸 남작에게 들려주니, 남작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는 어느새 꺼낸 양피지 조각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식량은 그렇다면, 3인분으로 넉넉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예상 시간보다 늦어질 수도 있으니 조금 더 넣어드리겠습니다."
적어내린 글씨는 확실히 그런 지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그렇게 적어낸 양피지에 인장을 찍어 표시하고는 내게 내밀었다.
"3인분이면 준비에 그렇게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겁니다. 혹시 당장 출발하신다면 모를까."
사실, 당장 출발하는 게 좋아보였다.
시간을 벌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길게 번 건 아닐테고, 당장에 암살자와 자작의 협공이 한 번이라도 이뤄졌다면 위험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적극적으로 공격해올테니.
만약 내가 황제나 봄의 순례자라면, 당장에 조지기 위해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을 것이었다. 준신의 군대를 만드는 게 진행 중이라면 병력도 어느 정도 여유는 있을테고.
나는 남작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당장 출발할 생각입니다."
남작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 제안을 숙고하는가 싶더니 양피지 조각을 펼쳐 빠르게 몇 자를 추가했다. 사각대는 깃펜 소리가 들리고, 남작이 다시 명령서를 봉했다.
내밀어지는 양피지 조각과 그걸 든 남작의 안색은 같아보였다. 칙칙해진 게, 짧은 상담이었지만 남작이 더 피폐해진 듯 싶었다.
나는 피폐해진 남작에게서 양피지 조각을 받아들어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