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0화 〉소에르 수도원 (140/274)



〈 140화 〉소에르 수도원

"…어떻게 해야한다고 보십니까?"


한 노인의 낮은 음성이 조용한 회랑에 울리고,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질끈 감은 눈 아래에서 여러가지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하나는 후회, 나머지 하나는 회한. 유사한 감정이 꼬리를 물고 돌고 있었다.

회랑에 그들만 있는  아니었으므로 의견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터이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이들은 한술 더 떠 조용히 잔을 만지작거리거나 교단의 상징물을 주무르고 있었다.

"피터공."

하지만 모여서 우울해하려고 소집한 건 아니었는지, 노인이 중년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서야 질척한 감정 속에서 눈을 감은  떠돌고 있던 전사가 눈을 떴다.

피터라고 불린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소,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중년이 맥 없이 고개를 숙이자, 노인은 곤란해하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들에게 감도는 우울한 분위기는 이 장소, 소에르 수도원 전역에 역병처럼 퍼져 있었다.

 까닭이 그들의 앞에 놓여있었다.

노인은 그 양피지를 집어들었다. 그 양피지는 얼마 전 교단의 중심에서 보내져온 서한이었다.

거기에는 간략하게 몇 가지의 정보에 대해서 적혀있었다.


첫번째, 근래에 몇몇 수도원에서 보관 중이던 성유물이 탈취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 수도원의 모든 수도자들이 사망했다는 것. 조사원들이 찾았을때에는 완전히 불타버린 폐허와  무리의 소사체만이 남았다는 사실.


두번째, 가장 근래에 교단 중심으로 보내지던 성유물 역시 탈취당했으며, 범행 방식에서 장검 연맹의 소행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는 것.


세번째, 그들의분포와 움직임으로 보아 이번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서한이 도착할 소에르 수도원이 노려지고 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것.

  가지만 하더라도 충분히 절망적인 소식이긴 했다. 수도원에 무력이라고 할만한 요소는 일부 징벌사제가 가진 메이스 정도가 전부인데, 다른 수도원에 그런 게 없는 것도 아니니, 특별히 무력이 뛰어난 편이 아닌 수도원의 자기방어 수단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더욱이 절망적인 소식은 마지막에 있었다. 노인은  마지막 글귀를 보면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마지막으로, 장검 연맹의 수색파는 배척파와 내전을 벌일 의향이 전혀 없으며, 당장은 도움을 줄 의향이 없다는 것.


 모습에 그간침울한 기색을 고수하던 중년 성전사, 피터가 입을 열었다.

"괜찮소, 게올 수도원장?"

"아아… 예, 괜찮지요. 괜찮습니다."


피터도 게올도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회랑에 둘러앉은 다른 사제들 역시 그러했다. 아무리 봐도 괜찮을리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들의 침울한 기색 사이로, 지도 한 장이 있었다. 큼직한 테이블 위에 놓여진 지도는 인근에서 구매할 수 있는 평범한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몇 가지 추가점이 있었다.

얼마 전 연락이 끊긴 인근 교회를 중심으로 추론한 몇 가지의 이동 경로가 그것이었다. 그 이동 경로들은 이어서 연락이 끊어진 마을이나 교회로 이어졌고, 점점히 찍힌 표식들은 점차 좁혀져 가는 형색으로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포위하는 형국. 항복하라는 제스쳐. 정보망이 부족한 수도원으로서도 명확하게  수 있도록 행동하는, 명확한 무력 시위였다.


그걸 잘 알아본 피터 성전사단장은 제 얼굴을 쓸며 참담해 했다.


"일단… 도망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피터 전사단장? 성유물을 노리고 있으니 필요한 것만 챙겨 도망친다면…."

"힘들 거요. 저들이 둘러싸는 형태로 거리를 좁히고 있으니, 우리가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바로 저쪽의 눈에 들어오겠지. 그대로 기병이라도 몰고 들어온다면 우리는 개활지에서 교회와 수도원들을 불태운 병력에게 포위당할 거요. 도망칠 방향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고, 뒤는 험산이니."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겠지.


피터의 당당한 말에  사제의 얼굴이 푸르죽죽 해졌다.

먹은 게 없음에도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지,  사제들은 자리를 박차 뛰어갔다. 치솟은 위액을 뱉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던 게올 수도원장은 피터를 바라보았다.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제국은 그간 우리의 우방이었으니,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피터는 수도원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려 침통한 목소리로 자신이 보았던 것을 토대로 제국의 현재를 읊어냈다.


"제국은 이제  믿소. 그들은 완전히… 악신에게 넘어갔으니."


들었었던 이야기지만 수도원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침통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역시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상황은 끔찍하게도 비관적이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장검 연맹은 내전을 거부하느라 도움을 주지 않고 있었고, 본래 제 영토를 보호해야할 제국은 악신에게 귀의해 민중을 악신의 먹이로 넘기고 있었다.

"차라리… 장검 연맹도, 제국도 아닌 다른 이들이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교단의 본거지에는 인근국이  있는 편이었지만, 이 작은 수도원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자살을 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은 게 아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이 착잡해하는 사이에, 회랑으로 누군가 짓쳐들어왔다.

"수, 수도원장님! 방문객입니다!"

젊은 사제가 그리 소리치는 것에, 회랑에 모여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방문객? 이 시기에?

길은 안전하지 않고,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지금 방문객이 있을리가 없었다.


오히려, 습격받을 예정인 수도원에 들이기 보다는 그들을 돌려보내는 게 그들에게도 좋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수도원은 지금… 역병이 돌아 닫혀있다고 해주시겠습니까?"


수도원장의 말에도 젊은 사제는 물러나지 않고 곤란한 표정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그게… 나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사제랑… 성유물도 대동하고 있습니다."


그제서야 수도원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고, 몇명의 사제들이 수도원장을 보필하기 위해 뒤따랐다.

 회랑을 가로지르고, 수도원의 정원을 바깥쪽으로 끼고 있는 폐쇄적인 복도를 지나쳐 커다란 정문이 위치하고 있는 정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젊은 사제는 앞으로 달려나가 걸어닫은 대문을 열어젖혔다.


"…허어."

그렇게 문이 열리고 드러난 모습은 특이했다.


사제는 여기 출신이었다. 그래서 얼굴이 익었다. 사제 역시 그러하기 때문인지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수도원장에게 인사했고, 수도원장은  인사를 받으며 면면을 살폈다.


사제 옆에  이들은 용병으로 위장한 성전사단이었다. 피터 성전사단장의 부하이자, 제도 구원을 위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제 옆에 있는 기사를 퍽 두렵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수도원장이 그 기사를 바라봤을 때, 수도원장은 순간 훅 끼쳐오는 거대한 신성에 숨을 쉬지 못했다.

"허억, 헉…."

풍겨오는 거대한 신성은 익숙한 것과 끔찍하게도 낯선 것이 혼재되어 있었다.


게올 수도원장은 그 신성에 정신을 놓을 듯 하면서 비틀대다가 부축하는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 기사의 외양은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전신에 둘러진 갑주에, 얼굴에 푹 눌러쓴 투구와 후드. 거기에 둘러진 후드는 긴 망토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망토 위로도 충분히 삐져나올 정도로 거대한 검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외양에 수도원장은 뒤늦게 그 양옆에 선 여자들도 평범하지 않음을 눈치챘다.

일견 신성하게도 보이는 순백의 백마에 올라탄  언뜻 가녀린 듯 화려한 갑주를 두른 여자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베일을 두른 여성까지.


가장 놀랄만한 것은 역시 그 기사에게 있었다.

 기사에게서 풍겨오는 신성은, 나름 고명한 사제라고 할  있는 게올 수도원장으로써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준의 신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수준의 신성은, 주의 신성과 악신의 신성이 혼재된 결과물이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신성에 게올이 몸을 떨자, 사제들이 불안한 눈으로 그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어야 했다. 도대체 그가 누구인지.


"그, 그대는 도대체 누구십니까? 신입니까? 아니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조용히 투구를 쓰고 있던 기사가 오, 하는 소리를 뱉더니 팔짱을 꼈다.


"뭐가 말입니까."


주현성은 시치미를 떼며 수도원장을 바라보았다. 신성을 읽어낸 수단은 찾을 수 없었다.

수도원장이 대답했다.


"…당신이 품고 있는 신성, 그 신성은 분명 섞여있긴 하지만, 제가 섬기는 주와 악신의 신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맞습니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차라리 악신의 신성만이 깃들어 있다면 퇴치를 명하고 성전사단을 부르면 그만일테지만, 그게 아니니 더 큰 문제였다.


악신의 신성과 주의 신성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는데다, 이렇게나 강대한 신성이라니.

게올 수도원장은 기절할 것만 같은 상태에서 고민했다.


악신의 신성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참고서 안으로 들일지.

아니면 악신의 신성이 느껴지긴 하니 내쫓거나 토벌해야 할지.


여태 봐왔던 괴물이나 악신의 신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강대한 신성이니, 토벌은 꿈도 못 꿀텐데도 수도원장은 독실한 신자가 으레 그러하듯 일단 그래야 하는 당위성부터 찾고 있었다.


그래서 어물대며 서있는 사이에, 성전사단장은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도 보았다.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강대한 신성.

그 신성에 걸맞는, 잘 갈고 닦아진 강맹해보이는 무구. 언제든  몸을 쏘아 공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언제 어떤 공격이 날아오더라도 튕겨낼  있게 살짝 들어올린 방패와 균형 잡긴 자세까지.

 앞의 존재가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보다는, 성전사단장은 눈 앞의 상대의 강함과 전투에 준비된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피터 전사단장은 노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으로 들이는 게 어떻소."

 말에 사제들이 일제히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수도원장에게 청하는 것도 아니고, 제안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월권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성전사단장의 목소리에 깃든 진지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수도원장은 부축을 받으며 그렇게 말했다.


피터는 그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너무도 가볍게 나오는 인정이라 게올은 순간 자신이 다른 말을 던진 게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분명 악신의 신성을 갖고 있지만, 주의 신성 역시 갖고 있지 않소. 그것도 아주 강하게. 대놓고 악신에게 붙어먹어 우리를 노리고 있는 제국이나, 우리를 전부 죽여버리려고 하는 배척파, 그걸 그냥 관망하려고만 하는 수색파보다는 한참 낫지 않겠소?"

옳은 말이었다.

수도원장은  말에도 여전히 거부하기 위해 기사를 바라보았으나, 기사는 그 모든 말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쪽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것인가?

그럼 적어도 이쪽의 의사도 묻지 않고 전부 태우려고 할 장검연맹보다는 나았다. 대화해볼만한 가치는 있었다.

수도원장이 닿은 생각에는 전사단장 역시 닿았는지, 그 중년은 노인의 마른 어깨를 단단히 쥐며 말했다.

"적어도 이야기라도 들어보고 판단하는  좋겠지. 그렇지 않소, 게올 수도원장?"


옳은 말이었다. 게올 수도원장은 부하의 대부분을 제도에서 잃었음에도 악신의 신성을 가진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피터의 의연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쪽의 경께서는, 부디 저희 수도원으로 들어와주시기 바랍니다.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기사는 대답조차 없이 가볍게, 수도원 안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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