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1화 〉소에르 수도원 (141/274)



〈 141화 〉소에르 수도원

수도원, 내 삶에서  한 번도 연관된  없는 장소.

나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이라면 그럴테지만, 어쨌든 내게 있어서 수도원은 처음 들리는 미지의 장소였다.

얼추 들어본 바가 아예 없진 않았다. 금욕적인 생활이 강요되며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제한되다시피 하는 폐쇄적인 장소라고 들었는데….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대문이 딸려있는 정원은 돌로 이뤄진 우물과 몇 포기의 풀,  등이 계획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공들여 심고 길러낸 건지 꽃의 상태가 상당히 좋기까지 했다.

그 안뜰 겸 정원을 지나서 눈에 들어온   갈래로 이뤄진 복도였다.

복도는 각기돌과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바닥은 나무로, 벽은 돌로. 벽에는곳곳에 횃불이 걸려있어 아주 어둡진 않았지만, 아끼기 위해서인지 횃불간 간격이 넓어 언뜻 칙칙해보이는 인상까지 주었다.

하지만 결코 더럽지는 않았다.

나는 수도원장이라고 불리우는 남자의 안내에 따라 걸으면서도 흠 하나 찾지 못했다.

"와…."


메이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종교의 중심지에 들어왔음에도 혐오보다는 놀라움이 먼저 떠오르는지 탄성을 자아내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향한 곳은 좀 큼직한 회랑이었다.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고, 의자  개가 놓여있는 회랑. 본래 식사용으로도 쓰이는 건지, 음식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수도원장은 그렇게 먼저 앉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뒤따라 들어온 상인으로 위장했던 사제와,  보기에도 전사처럼 생긴 중년 역시 자리에 앉았다.

"…앉으시지요."

"아, 예."


메이와 나, 겨울의 신부가 각각 의자에 앉은 후에야, 수도원장은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저희 소에르 수도원까지 성유물을 호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를 섬기는 이로서 제 동포를 보호해주신 걸 어찌 갚아야 할지…."


고개를 푹 숙이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투구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내 얼굴을 보더니 미미하게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사람 돕는데 이유가 어딨겠습니까. 마냥 사심이 없던 건 아니지만, 보답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뜻  껄렁할 말에도 수도원장은 뭐라고 꾸짖지 않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종교인은 인자한 표정이 디폴트군.

다른 사제나 전사도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거 호감도 상승이네. 씩 웃으며 손을 깍지 껴 테이블 위에 얹었다.


"대신, 여기서  묵어도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하지만…."

수도원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내 차림을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저희는 검소한 삶을 지향하는 편이라, 귀족분께는 잠자리가 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요즘따라 영 귀족으로 보는 놈들이 많네. 손을 내젓자, 수도원장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 귀족 아닙니다. 여기 제 부인이랑 제 연인도 그렇고요."


연인이라는 말에 메이가 배시시 웃었다.

어쨌거나, 수도원장은  말에 눈쌀을 좁히더니 내 차림새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 존나 고급품이지. 귀족이 아니라면 이해가 안될 정도로. 수도원장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의문이  나아가 경계로 바뀌는 모습에 데자뷰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수도원장이 오해하기도 전에, 사제가 선수쳤다.

"장검 연맹 쪽도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의심을  번 하긴 했습니다만,  이방인 분께서 덤벼오는 장검 연맹을 거의 다 혼자서 격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장검 연맹의 용병들이 꽤 죽었고, 용병대장은 부상을 입어 오는 길에 죽었습니다. 그걸로 미루어 보아 장검 연맹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과연, 장검 연맹은 내전을 피하려고 했으니…."

수도원장이 사제의 설명에 조용히 읊조리더니 제 턱을 쓸었다. 흰 수염이 손길을 따라 흩어지고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자니, 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눈속임 아님?!?! 엄창 찍어보셈!' 할 거 같았는데, 저들 사이에서만 흐르는 배경 지식이 있는지 쉬이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나는 메이가 짓고 있던 멍청한 표정을 따라했다. 흐리멍텅한 동공을 허공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 몰골을 바라보던 수도원장이 머뭇머뭇 물어왔다.

"그럼… 그대는 누구입니까? 장검 연맹은 아니지만 귀족에 준하는 장비에, 그토록 강대한 신성이라니…."

특히나 신성이 신경 쓰이는지 수도원장은 내게 신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강렬한 시선을 보내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솔직히 내게 선택지는 많은 편은 아니었다.


간단히만 친다면 딱 두 가지 선택지였다.


구라를 친다.


사실을 말한다.

사실대로 말해서 득을 보는지 실을 보게 될지에 대해서도 미지수였는데, 교단과 협력해야 한다는 점은 사실이었다.

교단과 준신놈들이랑 삼파전을 벌일  아니라면 한쪽이랑은 손을 잡아야 하는데, 봄의 순례자가 집적대고 있는 준신놈들은 협력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교단 뿐이었다. 문제는  새끼들이 내가 신성을 얻어낸 방법을 듣고 좋아라할지가 문제지.

그것만 숨길 수도 있겠지만… 겨울이나 메이와 말도 맞춰봐야 하고….


고민하고 있자니 수도원장이 대뜸 말했다.

"…굳이 숨기려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대의 몸에 악신의 신성이 깃들어 있음은 잘 알고 있으니."

"그게 뭡니까."

도대체  악신이 뭔데 씹덕아.


얼추 짐작가는  있엇지만 모른다는 점에서 그다지 큰 차이점은 없었다. 짐작이 간다는 게 골든 정답을 안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수도원장은 내 말에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악신을… 모르신다니. 어떻게 모르시는 겁니까? 주에 대해서 배우셨다면 아실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미미한 의심을 그 눈초리에 섞기 시작했다.

아, 씨발 좆까.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일일히 변명하는  귀찮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툭 내뱉었다.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는 대륙 너머에서 왔으니까요. 여기를 얼추 서대륙이라고 친다면 동대륙 출신입니다."

수도원장이  대답이 의아한 빛을 띄길래, 되물을 것도 없도록 몰아붙였다.


"그래서 당신들이 말하는 주니 뭐니 하는 것도 모르고, 악신 따위도 전혀 모릅니다. 게다가 그거 아십니까?"

"예, 예?"

"당신들 이전에 만났던 종교인들은 대륙 건너다가 바다 밑바닥에서 본 물고기 인간들이었습니다. 걔네는 위대한 창조주라는 해신을 믿고,  신성이 탐난다고 저를 먹어치우려고 들더군요. 전혀 못 들어본 신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듯, 저는 당신들이 말하는 주니 뭐니 하는 건 전혀 모릅니다. 그걸 감안해서 말해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수도원장은 그 쭈글쭈글한 눈가를  펴며 눈을 크게 뜨더니 어물거렸다.

몇번 벙긋거린 입으로 수도원장이 겨우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내가 예상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심해인들을 만나셨습니까? 헌데 어찌 살아서 나오셨습니까?"

뭐야 씨발, 그 새끼들을 어떻게 아는데.


어쨌든 수도원장은 답을 원했다.

"그냥 제가 엄청 강하다는  정도만 알아두세요. 한 군대 정도로는 상대도 못할 정도로."

내 대답에 수도원장은 턱을 쓸며 고민했다. 그 심후한 눈동자를 낮게 내리깔고 입을 우물대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답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못하는 건가.


괜히 조용해진 회랑 탓에 짜증이 솟으려는 찰나, 사제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수도원장님."

"아, 예… 생각을 하느라 그만, 손님을 기다리게 했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양손을 깍지 껴 제 턱을 그 위에 얹었다. 살짝 걸쳐진 입가가 열렸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해신은… 그들이 주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니까요. 그들은 바다에 살고 무척이나 오만불손한 종족이니, 가장 우월한 종족인 자기들을 따라 주께서도 바다를 근거지를 하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들은 일종의 이단 종파입니다. 워낙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살짝 놀라서 대답해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주가 뭔지 안 나왔습니다."

"주께서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이시자, 악신들에게 그 신성과 영을 뺴앗기신 진정한 창조주이십니다. 세상이 끝에 다다르면 다시 돌아와 인간들을 다시 다스려주실 위대하신 분이시죠."

그 목소리에 듬뿍 담겨나오는 믿음과 사랑에 메이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고, 나는  말에 섞인 낱말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창조요?"

"예, 비록 일부 이단 종파나 이교도들은 그분을 창조신이나 창조의 어머니 정도로 부르긴 하지만, 저희는 그녀를 주라고 부르며 칭송합니다."


창조신?


그 창조신인가?

새삼 헤로디아가 죽기 전에 내게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4신이 죽이고 신성을 빼앗았다는 존재를.

더불어 아까 말했던 악신이 주의 신성을 빼앗니 했던 부분 역시 되새겨졌다.


악신에게 영과 신성을 빼앗겼다는 부분과 4신의 탄생 방법은 기이할 정도로 닮아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악신은… 뭐하는 놈들입니까?"

"주께서 가장 눈여겨 보던 4명의 왕입니다. 각기 다른 부분에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주의 어여쁨을 받았지만, 종국에는 탐욕으로 인해 주를 살해하고 그 영과 신성을 빼앗아 나누어가진 이들이죠. 인간에게 악의적인 욕망을 심어두고, 부추겨 온갖 해악을 만드는 진짜 인류의 적입니다."

욕망을 심니 뭐니 하는 부분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지만, 영과 신성을 나누어 가졌다는 부분과 4명이라는 대목에서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슬그머니 눈을 돌리니  시야 끄트머리에는 그걸 상징하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1/4]


그 문구를 바라보고 있으니, 수도원장은 본인의 이야기에 심취했는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무슨 손자한테 이야기 들려주는 할아버지 같았다. 나한테도 할아버지 뻘이긴 한데.

"그들이 다스리는 땅은 지옥으로 불리우며,  땅은 끝도 없이 괴물이 나와 인간이 살지 못한다고들 하죠. 악신은 신성과 자격을 탐한 죄로 그 지옥에서 영원토록 괴물을 사냥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들어봐도 동대륙 이야기였다. 거기서는 밑도 끝도 없이 괴물이 나와댔으니.


심지어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세상이 씹창이 나기 이전부터도 괴물은 쉴새 없이 새어나왔다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당신들이 얘기하는 그 지옥, 제가 출발했던 땅 같습니다."

"…예?"


수도원장이 당황의 빛을 띄고, 사제와 전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잠시, 내가 신성을 끌어올려 주변을 훑었다.

느껴지는 신성은 없었다. 도청하는 준신이나 봄의 순례자는 없어보였다.

나는 테이블 위로 몸을 숙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저는 여러분들이 얘기하는 악신 중 하나를 죽였습니다. 그 신성을 빼앗기까지했죠. 아마 제게서 악신의 신성이 느껴진다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합니다만, 어떤 거 같습니까?"

"…으음."

갑작스러운 고백에 수도원장은 믿기 힘든 일인지 침음성을 흘리며  턱을 쓸었다. 수염이 너울거리며 흔들리고,  노인의 자글자글한 얼굴에서 명확한 우려의 빛이 맴돌았다.

나는 즉시 뒷말을 이어나갔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나머지 세 악신 중에서 하나가 이 대륙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저를 피해서 말이죠. 그 악신놈은 이 대륙에서 힘을 끌어모아서 제게 대항할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잘 알고 있어 이 서대륙으로 그놈을 추격해왔습니다."

물론 내가 아예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신을 죽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어떤 시스템창이 보여준다는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


저쪽이 아예 소화조차 할 수 없는 말인데다, 나 역시 이게 내 머릿속에서만 보이는 망상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어쨌거나 수도원장은 내 말에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따라가기 힘든 이야기군요…."

그 진위여부조차 알  없고요.

수도원장이 짧게 읊조리는 말에는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없는 명확한 거부가 담겨 있었다.

이 이야기를 소화하는 걸 거부하는, 노인 특유의 강직함이.

수도원장은 신나서 더 믿기 힘든 창조주 얘기를 늘어놓을 때는 언제고 황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간단하게 만들어진 테피스트리 너머로 지고 있는 태양 특유의 불그스름한 빛이 여러 색으로 나누어 테이블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 못 믿겠다 이거지 씨발새끼들아?


이거면 설득이 되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전사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잘 보십시오. 진짠지 개수작인지."

으르렁거리며 뱉은 말에 좌중이 얼어붙고, 허리춤에서 재빠르게 도끼를 낚아채 꺼내고는 쥐었다.

내가 쥐자마자 도끼는 드글거리며 거센 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일반적이라면 근처에 서있는 것조차 고역일 정도의 고열을.


그렇게 드글거리기 시작한 도끼에, 나는눈을 지그시 감고 한 마디를 읊조렸다.

화염 부여.


"…세상에…!"


푸화아악


타오르기 시작한화염은 도끼를 휘감더니 거세게 일렁거렸다.

그 일렁거림을 바라보고 있으니, 새삼 여름의 교단들에게 사이비 짓거리를 했던 게 떠올랐다.


본질적으로 지금 하는 짓과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담 없이 아가리를 열었다.


"수도원장아, 왜 믿지를 못하느냐! 내가 불과 징벌을 보여주어야 믿겠느냐!"

중요한 건 분위기와 상황에 걸맞는 일갈과 퍼포먼스. 그 뒤는 알아서 짜맞추기 마련이다. 나는 보란 듯이 신성으로 타오르는 도끼로 수도원장을 겨누고는 으르렁거리며 내뱉었다.


"이 화염이 보이지 않느냐?!"

수도원장은 까무러칠 듯 그 화염을 바라보더니, 죽어가는 듯한 새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 주여,  얼마나 불길한 신성이란 말입니까…."


나한테 하는  같진 않았다. 이런 신성을 보게 된 충격에서 나오는  같았다.

나는 그 반응을 보자마자 화염을 거두며 도끼를 허리춤에 밀어넣었다. 그러자 허리춤을 쥐고 있던 전사장은 순식간에 피폐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제 역시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와 수도원장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황망해보이는 사람들을 주시하며 말했다.

"…이제 믿겠습니까? 믿으신다면, 부디 좀 이제 뭔 개지랄인지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그제서야 고개를 얄팍하게 끄덕이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심결에 욕을 내뱉은 건 신경도  쓰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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