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3화 〉소에르 수도원 (143/274)



〈 143화 〉소에르 수도원
쿠 우 우 웅


"이제 다 왔나 봐."

"응, 그런 거 같아."

넓찍한 수도원의 회랑, 그 자리에는 가구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은 커녕 동물이나 벌레 한 마리 없었다.

그 자리엔 주현성과 메이  둘만 있었다.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여유롭게 장비를 점검하고, 몸을 풀었다. 메이가 방패를 점검하거나 검을 살펴보는 동안, 주현성은 가볍게 자리에서 통통 뛰거나 다리를 풀거나 하면서 준비운동을 했다.

"계획 있어?"

그렇게 방패의 끈을 강하게 조여 팔에 동여메던 메이가 물었다.

주현성은  질문에 생각하는지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말고 투구 위로 턱을 쓸었다.


"일단, 적은 다수겠지."

"으응."


"우리는 딱 둘인데 아이코닉한 차림이고."


"아이코닉?"

메이는 주현성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드러냈다. 그에 주현성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정정했다.


"개성적이라고."

"아, 응. 그렇지."

용병들도 보통 개성적인 편이지만, 주현성과 메이의 차림에 비하자면 수수한 편이었다.

딱 보기에도 티가 나는 고급 판금 갑주에 화려한 붉은색으로 치장된 후드 망토, 인간보다 큼직한 거검을 등에 빗겨 찬 모습은 절대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차림이었다.

메이 역시 그러했다. 큼직한 가슴 때문이 아니더라도 메이의 갑주와 천갑옷은 기본적인 색이 하얀색이라 어둑해지고 있는 수도원 내에서는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 법 싶었다.


메이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주현성은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우리가 흩어져서 싸돌아다니다가 만나도, 서로 팀킬을  걱정은 없겠지."

"…응."

메이는 무슨 계획인지 알겠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주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한 몸으로 받던 주현성은, 손을 뻗어 메이의 뺨을 주물렀다.

"그게 계획이야. 흩어져서 기습을 반복한다."

볼을 만져지며 풀어진 표정으로 헤실거리던 메이는 그제서야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번쩍 떴다. 뜨인 눈 사이로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혹시 그래서 오늘 하루종일 건물 돌아다닌 거야? 내부 익히고 어떻게 기습하면 될지 익혀두려구?"

"응, 맞아."

반신반의 하며 불안해하던 메이의 눈에 존경과 애정 같은 것이 듬뿍 담겨 반짝거렸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대단하다… 우리 현성이!"

메이는 그제서야  연인이 기특한 짓을 했다는 것처럼 주현성의 완갑을 껴안으며 볼을 그 차가운 강철에 부벼댔다.


주현성은 그 반응에 낯간지러운지 키득키득 웃다가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떼어놓았다. 메이는 웃으며 품에서 떨어졌다.


"그냥뭐… 게임이랑 직감?"

"대단하다. 현성이는 게임으로도 얻는  있구나."

놀랍다는 말씨에 담긴 뜻에, 주현성이 웃으면서도 애석해 했다.

사실 게임에서 얻어낸 방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게임에서 이런 방법을 쓰고는 했지만, 게임에서 기원한 지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경험을 겪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미묘한 기시감이었다. 전에도 이런 장소에서 싸움을 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하지만 완전히 유사한 장소와 상황은 아니라 사고능력을 시험하게 만드는 종류의 데자뷰.


하지만 그건 설명하기 애매한 사유였다. 납득할지 어떨지도 모르고. 메이에게 확신을주지 않았다가 전투에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고민이 그에게 거짓말을 강요했다.

그래서 주현성은 직감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메이는 쉽게 납득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나 준비 끝났어!"


당당하게 말하며 허리춤에 손을 얹는 메이를 바라보는 주현성의 눈빛에 애정이 담겼다.


솔직히 말하노라면, 중국인을 이렇게 아끼게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걸 시인하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주현성은 한창 주무르던 메이의 볼에서 손을 떼내고는, 위를 가리켰다. 2층 구조로 된 수도원에는 대문이 있는 정원을 내려다볼  있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저 대문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대기해. 적절하게 마법 쏠만한타이밍이라고 보이면 바로 마법이라도 꽂아버려."


"네, 알겠습니다! 서방님!"

"뭐래, 빨리 가봐."

"히히, 좋으면서!"

사실이었다. 주현성은  웃으면서 메이가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촐랑대는 발걸음을 지그시 바라만 보던 주현성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거검을 등에서 끌어내렸다.

꺼내든 거검은 달빛을 받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없이 어두워보였다. 내딛는 걸음에서도 어둠이 훅 끼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어둠을 두른 주현성은동대륙의 신살자가 되어 정원을 가로질렀다. 가로지르는 정원에서도 인기척은 없었다. 가구도 없었다. 심지어 정원에 놓아두었던 나무 의자들도 죄다 뜯어져 수도원 지하실 앞에 쌓여있었다.

그래서 주현성은 아무런 부담도 없이 꽃밭을 즈려밟으며 나아가 대문 앞에 멈춰섰다.


쿠웅


역수로 잡은 거검을 바닥에 꽂으니, 묵직한 쇳소리가울렸다. 주현성은  거검을 방패 삼아 양손을 칼자루에 얹은  정면을 노려봤다.


거대한 대문은, 수도원이라는 양식에는 어울리지 않게 다소 화려했다. 내구성은 모르겠으나, 들어서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침입자들은 그 대문을 바라보면서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지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날아들었다.


쿠 르 르 르

석벽과 대문에 감쇄되어 들려오는 수십의 말발굽 소리. 적게 잡아도 수십, 많이 잡으면 수백에 달할 병력에도 주현성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거검의 칼자루에 손을 얹어둔 채로 문을 노려보았다.


 수문장 앞에서, 공기를 태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 웅

콰아아아아앙!!!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는 문짝이 터져나가는 소리로 바뀌며 철과 나무로  거대한 문을 헌신짝처럼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닥에 나뒹구는 문조각은 불타고 있었다.

마법이었다. 두개골 위의 두피 가죽을 들썩이게 하는 듯한 기묘한 촉감이 그에게 이게 마법의 행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법사가 있을 줄이야. 귀찮네.'

마법은 꽤 강력하다. 주현성도 실감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장에 무기들이나 괴물의 손발톱 같은 경우에는 갑주로 어찌 된다지만, 마법은 화염이 아니라면 대항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그레이톰의 심판이 있을 적에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게 부러진 지금은 주현성은 마법에 정면으로 맞설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주현성은 언제든 마법사가 시야에 들어오면 도끼를 던지거나 방패를 던질 생각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부숴진 문 사이로 중무장한 용병들이 빠르게 자리를 메우며 밀려들었다. 타오르는 꽃이나 풀들 사이로 자리한 용병들의 장비는 상당히 고급품이었다.


미약한 마법이 걸려있어 아이템으로 칠 있는 물건들도 상당히 있을 정도로, 그들의 장비 수준은 무척이나 좋았다.


그들이 주현성을 보자마자 뭉쳐 진형을형성했다.


그들이 취한 진형은 전략전술은 그다지 잘 모르는 주현성의 눈으로 보기에도 꽤 구성이 좋았다. 단단한 전열과 언제든 쌍익으로 덮쳐올 수 있는 창병들. 다소 짧은 창을 쥔 그들은 나름의 특색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언뜻 움직일만도 하건만, 주현성은 움직이지 않았다. 요지부동하며 칼자루에 손을 걸친 채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침착한 모습에 용병들이 불안해 했다. 부숴진 문 사이로 불어오는 외풍이 그 망토를 흔들고, 언뜻 서사시에나 나올 법한 분위기의 기사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풍경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씨발, 수도원이라더만  기사…냐?"

그래서 용병들의 리더를 맡고 있는 남자는 그들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향했다.


 병사들을 밀어내며 맨 앞에 도착했을 때, 그 야만인 용병은 그제서야 왜 이들이 멈춰섰는지 알  있었다.

"…이 새끼?"


전신에서 풍기는 난폭한 신성. 거인의 힘을 키자마자 전신에서 뿜어져나오는 신성은 보통이 아니었다. 출력 자체로만 친다면 봄의 순례자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야만인 용병은 눈쌀을 좁히면서 주현성을 노려보았다.


물론, 주현성도  앞의 존재가 준신이라는 건 눈치챈 후였다.

준신이 직접, 수도원에 찾아왔다. 굳이 부하를 보내는  아닌 직접 찾아온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조만간  몸통을 쪼개고 으깨버리면 알 있을 터였다.


주현성이 슬그머니 움직이자, 기류가 바뀌었다. 흉포하게 뿜어져나오는 신성이 녹아내린 돌덩이처럼 스멀대며 그들을 잠식했다. 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투구 속 검은 눈동자만이빛나고 있었다.

 삼키는 소리를 뒤로 하고, 야만인 용병이 무기를 꺼내들며 말했다.


"네가  동대륙의 신살자냐?"

신살자라는 단어에 담긴 흉흉함은 보이는 것을 부풀리는 효과가 있었다. 용병들이 잔뜩 긴장한 낯빛으로 창을 든 손을 덜덜 떠는 동안,야만인 용병은 답을 기다리며 도끼를 겨누었다.

하지만 주현성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듣지 못한 것처럼 고요했다.

"이런 씹새끼가… 듣자하니 애송이 새끼라는데, 그간 존나게 깝쳐왔겠지만 나한테는 안 먹힌다. 단순히 완력과 이적만으로 어찌 못하는 기술의 차이를 보여줄테니까."


날이 돋힌 말에도 주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해보라는 듯이 눈을 또렷히 뜨고 노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에 야만인 용병은 짜증이 솟았다.


짜증이 솟아 이를 바득 가는 모습에, 주현성은 픽 코웃음을 흘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야만인 용병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무기를 들어올렸다.


"이런 씹새끼가, 얘들아! 이 새끼가 죽여달란다!"


제 대장의 신호에 궁병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창병들이 무기를단단히 쥐고 몸을 날릴 준비를 마쳤다. 방패와 검을 든 용병들이 달려들 주현성을 경계하며 무기를 단단히 쥐었다.


그렇게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 그들의 사이로 뭔가  떨어졌다.


"어."


정확히 진형의 중심에 떨어진 그것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듯 빛은 일렁였는데, 일렁일 때마다 은은한 온기가 한기에 식어버린 그들의 몸을 뎁혔다.

그 안락함에 누군가 표정이 풀어지고 있었지만, 그 구체를 본 야만인 용병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이런 씨발, 마법이다! 물러―"


퍼어어어엉!!!

그걸 발끝으로 건드리는 병사를 막기도 전에, 불덩이가 터져나왔다.


화염은 강맹하게 뿜어져나와 어둑한 정원 위를 살라먹었다.

타오르는 잔디나 꽃 따위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쪼그라들고, 휘말리지 않은용병들이 뒤로 물러났다.

"이런 미친…."


눈치챈 마법사가 방어막을 펼쳐내긴 했지만, 직격한 이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한  잿물로 변한 이들이 바닥의 잔해로 남는 동안에, 야만인 용병은 눈쌀을 찌푸리며 앞을 노려봤다.


터져나오는 순간 퍼진 연막 때문에 앞은 보이지 않았다. 마법을 쓴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전술을 수정해야 하나 고민하는 때였다.

푸화아악!

"어어!"

"막아!"

연막을 가르고 주현성이 뛰쳐나왔다. 손에는 지면에 꽂아놨었던 거검을 들고.

그 거검은 크기부터가 보통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인간은 맞는 순간 절명할 수 밖에 없는거검. 그 검이 휘둘러지는 것을 보며, 용병들은 재빠르게 방패를 내밀어 흘려내려고 하거나, 창을 내밀어 주현성을 멈춰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무용한 시도였다.


야만인은 자신의 눈 앞에서 다섯 명의 용병이 단칼에 찢어지고, 분해되어 바닥에 흩뿌려지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 내밀었던 창들마저 창대가 부러졌는데, 그 창을 들고 있던 용병들도 그 거력에 휘말려 바닥에 쓰러졌다.

"이런 씨이바아알!"

내리찍어지는 도끼와 장검. 궤적에 들어선 인간의 두개골을 가볍게 두쪽으로 쪼개 줄 수 있을, 직선적인 묘리를 담아 움직이는 두 무기. 맞는다면 주현성도 마냥 멀쩡하기는 힘든 강격이 휘둘러지자, 주현성은 휘두른 그대로 거검을 거두며 앞으로 나아갔다.


뻐억!

깡!

그 강격은 주현성이 찌른 손잡이가 야만인의 어깨에 틀어박히자 막혀버렸다. 곧게 뻗은 검신에 부딪힌 도끼가 튕겨져나가고, 장검이 궤적을 잃었다. 야만인은 그대로 치달아오는 검날을 보며 몸을 뒤로 튕겨냈다.

콰지직!


"크으윽…!"

살을 억지로 뜯어내는 것만 같은, 검으로 만들어냈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을 소리. 그 소음과 함께 야만인의 팔이 허공을 날아갔다. 횡으로 크게 휘둘러진 거검에 옆으로 파고들려던 용병의 머리가 날아가 수도원의 석벽에 부딪혔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시체를 보며 야만인은 제 잘려나간 팔뚝을 붙들었다.

고작 일격이었지만 실력차는 명확했다. 자격지심에서 내지른 강격이 막힌 것도 모자라, 팔 한쪽을 잃었다.

명백한 손실에 머리가 맑아졌다.

이대로 후퇴해? 아니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그 미친 수녀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잠시, 주현성은 팔을 붙들고 물러나는 야만인 용병을 보더니 몸을 돌려 안으로 도망쳤다. 망토를 휘날리며 거검을 어깨에 짊어진 인영이 빠르게 그림자 속에 숨어 모퉁이를 돌더니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궁수들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당황했다.


오직 그들의 대장인 야만인만이 침착했다. 잠시간은.


"…유인하겠다 이건가, 씨발놈이."

냉정해지던 야만인의 머리가 다시 달아올랐다. 애송이 주제에 자신을 꾀어내려고 한다는 사실이 그의 화를 돋구었다.


그는 팔을 붙든 채로 그 야만인은  부하들에게 고갯짓했다.

"뭐하고 있나! 둘로 찢어져서, 하나는 불덩이를 던진 마법사를 쫓고, 나머지 하나는 나와 함께 저 빌어먹을 새끼를 죽이러 간다!"


 말에 용병들은 거부하지 않았으나, 거북한 명령인 듯 차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제 상관의 눈치를 살피다가 수도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들의 발밑에서 한 때는 동료였던 이들의 시체와 잿물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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