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소에르 수도원
한 병사가 무심결에 말했다.
"…오, 온다."
수도원, 입구에서부터 시체가 널려있었다. 걸어나오는 이의 흉흉한 기세와 맞물려, 마치 수도원의 대문은 지옥의 문인 것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수도원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비명과 폭음, 굉음에 이미 그들의 신경은 곤두설대로 서있었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 걸어나오는 인물에게서 훅 풍겨오는, 본인의 것이 아닐 피비린내는 상당히 끔찍한 전말을 예상하게 했다.
야만인 용병이자 준신, 장검 연맹 배척파의 수장이던 크제론은 죽었다. 그 담담한 식견에 그들이 몸을 덜덜 떠는 동안, 그들은 다가오고 있는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신에 둘러진 검은 연기는 걷는 걸음을 따라 흩어졌는데, 중점적으로 흘러나오는 곳은 팔인 것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흉흉한 외관인데 흘러나오고 있는 것과 함께 보자니 신화적인 악신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압도되어 창을 내지르기는 커녕 괴물들조차 얼어있는 가운데, 그 중심에 있던 한 여성이 일어섰다. 본인이 앉아있던 바위를 내버려두고 한 걸음씩 딛었다.
"…오호."
다가서던 주현성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수녀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녀가 꽤 미색이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기실, 미색이 있긴 하나 워낙 위험한 분위기가 풍기는 탓에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멈춰세운 건 간단한 이유였다.
수녀에게서는 신성이 느껴졌다. 아까 농락하다가 메이에게 처리를 맡겨두었던 그 반푼이 준신과는 다르게, 꽤 짙은 수준의 신성이.
자리에 안 어울리는 수녀는 인자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체형은 평범하다. 근골 역시 그러하다. 얼굴은 꽤 예쁜 편이지만 별로 주현성의 취향은 아니었다.
신성이 느껴진다는 걸 제외한다면 그저 평범한 종교인처럼 생긴 인물이었다.
주현성은 새삼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준신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해서 만들어내는 거지?'
새삼스럽긴 하지만 당연한 의문이었다. 눈 앞의 수녀는 무장하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전투에 적합해보이는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수녀와 전투는 그다지 가깝지 않을 관계. 의료나 보조적인 목적이나 병사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장검 연맹은 교단이랑 안 친한 거 아니었나? 교단이 아닌 종교인인가?'
알 수 없었다. 수녀는 그저 조용히, 언뜻 겨울의 신부를 떠올리게 하는 청아한 태도로 주현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금색 눈동자에 맺힌 순수한 호의에 주현성이 멈춰설 적에, 그 수녀는 생긋 웃었다.
눈이 마주쳤다. 투구 너머로, 검은 사슬과 연기로 덮여 보이지 않을 눈에 시선을 맞추었다.
'이 새끼….'
심상치 않았다. 미묘한 경계를 담아 수녀의 차림을 다시 살펴본다.
길쭉한, 통짜 강철로 된 메이스에 나무가 베이스에 강철 징을 박아둔 평범한 가죽 방패. 그야말로 평범한 장비이지만 그걸 가진 여성이 두른 수녀복과는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수녀복 역시 그냥 수녀복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흉갑이나 완갑 등을 수녀복의 빈틈마다 입거나, 수녀복의 위로 입고 있었다.
본디 전투에 적합하지 않고 거추장스러울 수녀복은 그렇게 어레인지 되어 완벽히 전투수녀복이라고 할만한 차림이 되어있었다. 몸에 딱 달라붙어 체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주현성의 눈동자가 잠시 수녀의 발치에 머물렀다가 올라왔다.
장화를 신고 있었다. 단단한 가죽 장화.
전투에 능숙한 인물이 아니라면 고를리 없는 선택지였다.
어쩌면 그 야만인 용병을 상대할 때보다는 한참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주현성은 거검을 어깨에 짊어진 채 자세를 숙였다. 언제든 검을 내리찍기 위해.
그 자세를 물끄러미 보던 수녀가 한 발짝 물러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더니, 방긋 웃었다. 웃으며 말했다.
"잠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동포여."
동포?
묘한 단어 선택이었다. 한국인이라는 뜻으로 동포를 썼을 가능성은 없었고, 저쪽이 플레이어일 가능성 역시 옅어보였다. 주현성은 곰곰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동포가 내포한 뜻은 하나 뿐이었다. 신성자.
"해봐. 내가 그 머리 쪼개버리기 전에."
언뜻 무례한 언사였지만 용병도 수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병들은 그게 사실이며 곧 일어날 거라고 믿는 것처럼 투구를 고쳐메었다. 수녀가 낮게 웃었다.
"저 안에 들어가신… 제 동포와는 달리 당신께서는 좀 더 구도자처럼 보이는군요. 저, 레일라는 오랜 시간 당신과도 같은 구도자를 찾아 헤메고 있었답니다. 강하며 정의롭고, 언제든 대를 위해 소를 포기할 수 있는 진정한 구도자를요."
"…뭐라는 거야, 씨발."
주현성으로서는 어이가 없었으나, 죽인 생명체의 생명을 흡수하고 신성으로 저장한다는 독특한 권능을 쥐고 있는 레일라 수녀에게 있어서는 주현성은 실로 그러한 존재처럼 보였다.
전신에 두른 흉흉함과 전신에 흘러넘치는 신성. 그 신성 중 본인의 것은 드물고, 대부분이 타인의 것이었다.
수녀는 그와 꽤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예에, 당연하겠지요. 저 역시 처음에 제 사명을 깨달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요… 하지만 결국 저는 제 사명을 해내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하는 방향성이지만, 포기와 방종은 없었답니다."
'진짜 뭐라는 거지.'
그는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본인만 아는 것을 털어놓으니 사전 정보가 제반되지 않은 주현성에게는 알아먹을 껀덕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수녀는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이 신성을 가지고 뭘 해야할까요? 당신께서 쫓으시는 그 악신이나 악한 황제처럼 신성을 부려 사람들을 핍박하고 세상을 망가뜨려야 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흰 이 신성을 가지고 세상에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생각보다 그럴 듯한 말이었다. 주현성은 갑자기 멀쩡한년이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자세를 도로 높였다. 경계가 누그러든 걸 확인한 수녀는 방긋 웃었다. 진심으로 나오는 미소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수녀의 미소는 확실했고, 말도 거짓은 없어보였다. 말하는 내용도 그다지 문제랄 건 없어보였다.
오히려… 이상한 건 주변이었다. 용병들의 낯빛이 영 좋지 않았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것처럼, 거무죽죽하게 가라앉은 낯빛이었다. 그리고 냄새. 타는 듯한 냄새와 자신의 몸에서 풍겨오는 피비린내 외의, 묘한 기분 나쁜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를 눈치챈 주현성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웃으며 설명을 하려던 수녀는 말을 뚝 멈추었다. 끊어진 카세트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처럼 타오르는 잡음만이 멀찍이서 들려왔다.
"…눈치채셨군요?"
수녀의 목소리, 태도, 행동거지는 그대로였다. 허나 내용만은 명확했다. 암시하는 바에 주현성이 도로 자세를 낮추자, 수녀가 웃는 얼굴로 품을 뒤적였다.
"하지만 정의를 위해서라면 필요한 일이었어요."
품에서 끄집어내지는 것은 주현성의 예상을 뛰어넘은 무언가였다.
그건 인간의 코였다. 인간의 코가 다발로, 어떤 원형으로 묶여진 촌철 위에 꿰여있었다.
마치 식자재를 다루는 듯 소금을 잘 뿌려 말려놓은 그 코에서는, 사체 특유의 냄새를 아주 옅게 약화시킨 듯한 암모니아 냄새가 풍겨왔다.
주현성은 당연히 역겨워했다. 사람을 좀 죽이고, 화신 강림으로 한 번에많이 죽여본 경험은 있었지만 시체에 해를 가한 적은 없었다.
그건 그에게 있어 뭔가 잘못됐다는 인상을 느끼게 했으므로, 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거검을 끌어내려 쥐었다.
수녀는안타까워 하면서 설명했다.
"세상은 고통 속에 있습니다. 인간도, 자연도, 심지어는 괴물과 신격들마저도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삶이란 곧 고통인즉, 저는 제 사명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황홀한 듯, 수녀의 얼굴이 쾌락과 기쁨으로 일그러진다. 그에 반비례하듯 주현성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제 권능은 생명 흡수. 제가 죽인 것을 제 신성으로 받아들이는 권능이지요. 여기서 운명을 느끼지 않습니까? 별들을 돌게 하고,해와 달이 춤을 추게 하며, 빛과 어둠이 끝없이 꼬리를 잡는 이 세상의 순리가 느껴지시니 않으시나요! 아아, 세상은 제게 거둘 것을 명하고 있답니다. 제가 모든 생명을 거두고, 신을 거두어, 완전히 하나된다면!"
높이 들어올린 주물이 흉측하게 너울대고, 주현성이 인상을 확 찡그린 채 씹어뱉었다.
"존나 역겹네."
못들은 것처럼, 수녀는 말을 마무리했다.
"세상은 완전해지고, 우린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겠지요. 네에, 분명히 그럴 거예요. 더 이상 고통도 죽음도 없는 낙원이 완성되는 거예요…."
성욕에 가깝게, 쾌락과 황홀경에 젖어든 그 목소리는 명백히 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레일라 수녀의 광신. 그 뒤틀린 믿음.
주현성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너, 제정신이 아니구만. 존나 맛갔네."
그 말에 수녀의 예쁜 얼굴이 애석한 듯 사그라들었다. 새겨지는 표정은 이제 정말로 유감을 느끼는 종교인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며 주물을 도로 제 품으로 되돌렸다.
"안타까운 일이예요. 신살자님께서 제게 동의해주셨다면, 세상은 더 좋은 곳으로 바뀌었을텐데… 이젠…."
그녀가 허리춤과 등에 달아두었던 메이스와 방패가 끌어내려지고,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으로 수녀가 제 병기를 붙들었다.
"죽일 수 밖에 없네요. 공격하세요."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괴물들이 흉포하게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괴물들은 쌀쌀해지는 밤공기를 제 거대하고 뜨거운 몸으로 덥히며며 가로질렀다. 스치는 자욱마다 김이 피어올랐고, 김이 피어오르는 근육은 거칠게 부풀고 있었다.
근육이 자리한 몸통과는 다르게 벌레의 머리가 달린 그들은, 공국에서는 흔히 사육하고는 하는 전쟁용 짐승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저항하는 것조차 힘들 괴물. 3m가 넘는 거체로 지축을 울리며 다가온 괴물들은, 바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뻗어지는 거검을 보며 죽었다.
콰지지직!
휘두른 건 세 번. 그 세 번의 공격으로 세 마리의 괴물이 죽어 널부러졌다. 노린 곳은 정확히 머리였다.
다소 조준이 빗나가더라도 괜찮은지 주현성은 근력을 가감 없이 사용해 궤적을 도중에 수정해 괴물들의 머리를짓이겼다. 휘두른 힘에 떠밀리기도 전에 발을 땅에 굴러 균형을 되찾았다 싶으면 다시 한 번 거검을 휘둘렀다.
주현성은 그렇게 검을 휘두르면서 수녀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상대가 아무리 전투에 능숙해보이더라도 수녀. 전문적인 전사에 비견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전에 승부한 자작이 훨씬 강하면강했지, 자작이 저거보다 약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콰직!
크게 몸 바깥쪽으로 휘두른 거검에 걸린 괴물의 몸통이 쪼개지고, 주현성이 발을 구르며 내딛어 멈추는 순간, 수녀가 움직였다.
수녀는 별 다른 수를 쓰지 않았다. 직선으로 주현성을 향해 달려왔다. 딛는 발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과연 죽인 생명을 흡수한다는 얘기는 맞는지 속도는 상당했다. 주현성은 다가오는 수녀를 보며 멈춰세웠던 거검을 뒤집어 내리찍었다.
카아아아앙!
그러자 수녀가 행한 일은 주현성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수녀는 거검을 밀어냈다. 방패로 검날을 밀어내며 비스듬하게 메이스로 날끝을 맞받아쳤는데, 그 방패에 담긴 힘은 실로 절묘하여 거검의 힘이 약하게 작용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검이 기운다. 휘두른 궤적이 거짓말인 것처럼 기운다. 주현성이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수녀의 메이스가 움직였다.
깡!
"윽?!"
가드와 동시에 뻗어지는 메이스 올려치기.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을 타이밍에 투구를 가격당한 주현성은 비틀거렸다.
'이걸 받아냈다고?'
당황스러웠지만 주현성은 굴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팔을 밀어내고, 몸으로 끌어당겨 거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부우우웅!
몸을 지면에 가깝게 숙여 피하는 수녀. 낮아진 자세로 바로 회피 기동을 한다는 건 무리다. 이번에는 받아칠 수 없다. 주현성은 방패에 화염 부여를 사용해 톱날을 솟아나게 했다.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방패에 돋아난 톱날은 굉음을 내며 휘둘러졌다. 제 아무리 단단한 금속이라도 닿으면 썰어버릴 수 있는 신성이 담긴 톱날. 다른 이들이라면 막아내긴 커녕 피하는데 급급할 공격. 주현성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카가가가가각!
메이스를 내밀어 끄트머리로 톱날에 정확히 부딪혀 밀어내고.
깡!
자루 끝으로 가격해 튕겨내더니.
후우웅!
방패를 휘둘러 주현성이 거리를 벌리게끔 강요했다.
주현성은 뒤로 물러나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대응이었다. 능숙한 베테랑 전사인 자흐렌 자작도 대응하지 못했던 톱날 방패를, 그야말로 완벽이라고 할만한 모습으로 받아쳤다.
주현성은 신성으로 돌아가는 방패를 흘긋 내려보았다.
손상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뭔가를 썰어낸 흔적도 없었다. 메이스나 방패에 특별함이 담긴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특별한 건 눈 앞의 준신이 된 수녀. 그는 그 수녀의 생김새를 면밀히 살폈다.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아.'
오히려 주현성보다 나이는 어려보였다. 외관만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느껴지는 느낌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도, 수녀의 나이는 이제 막 약관에 들어선 나이였다.
전투 경험이 짧은 건 아니지만 자흐렌 자작에 비하자면 보잘 것 없는 경력이었다. 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용병들이 그녀보다 더 많은 전투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수녀가 제 경험보다 더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건 간단한 이유였다.
주현성은 알 턱이 없는 이유였다.
거검을 손목 안에서 돌리고, 등에 짊어진 주현성은 언제나처럼 도끼를 뽑아들었다. 빈틈이 큰 무기는 먹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도대체 뭐지?'
화염 부여를 사용한 도끼의 날이 달아오르는 순간, 수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메이스를 휘휘 돌리다가 바로 잡았다.
주현성이 전법을 바꿨지만, 수녀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천재였으므로.
단단한 가죽 장화로 바닥을 딛고 있던 수녀가 달려들자, 주현성이 자세를 굳히며 충격에 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