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7화 〉소에르 수도원 (147/274)



〈 147화 〉소에르 수도원

다소 견딜만 하긴 했지만, 아예 피해가 없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강대한 화염으로 이뤄진 다리는 그야말로 그 다리를 이뤄낼만큼의 질량이 있었고, 떨어지면서 생겨난 가속도가 있었다.

그걸 직격당한 나 역시 마냥 멀쩡하진 않았지만, 내가 껴안고 있었던 수녀보다는 멀쩡했다.

나는 몸에 화염 면역인 갑주와 화염 저항이 붙어있는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거인의  덕분에 몸이 준신보다 한참은 단단하다는 것도 이유로 칠  있었다.

쿠 우 우 우 우 우

콰아아아앙!

콰르르륵


허공을 격하며 날아간 나와 수녀가 지면에 부딪히고, 나는 그 탓에 품에 안고 있던 수녀를 놓고서 바닥을 굴렀다.


구르는 동안 울리는 돌 소리를 보아하니, 오는 길에 보았던  언덕인 것 같았다.

널려있는돌들을 몸으로 때려부수며 한참을 나아가니, 겨우 감속해서 멈췄다.


"쿨럭, 쿨럭! 으, 씨발."

목에서 절로 나오는 기침을 토해내며 몸을 비척비척 일으키니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태양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씨발, 몇시냐.

애꿎은 추가 근무에 숨을 몰아쉬니 새삼 수녀의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걸 맞고 살아있으면 레전드긴 한데.

다행히 무기들은  몸에 딱 붙어있었고, 나는 내 장비를 찾는 수고는 없이 돌산 위로 올랐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자마자 보이는 지평선과  태양볕을 받고 있는 인영.


다가서는 걸음에도 묵묵부답하는 인영이 보였다.

'이렇게 쉽게 죽었다고?'  '그래, 그거 맞았으면 뒈져야지.' 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돌았다.

역시 화신 강림은 준신에게도 일격필살인 모양이었다.

"해치웠나?"

'그 대사'를 뱉으며 괜히 다가갔지만, 수녀는 살아있으면 그게 이상할 상태였다.

까맣게 탄화된 팔다리. 준신의 회복력에도 불구하고 으스러진 다리는 꺾어져 바스라져 있었고, 머리칼은 비교적 멀쩡하지만 끄트머리는 전부 타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하기야, 당한 공격이 한 신의 화신을 소환해 때려박는 수준의 공격임을 감안했을 때 살아있는  이상하긴 할 터였다. 난 투구를 더듬어 찌그러진 흔적을찾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명도, 신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히 죽었다.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내가 괜히 해치웠나라고 씨부린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아넘길만 했다.

무엇보다, 수도원 입구에 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통제를 잃은 괴물들이나 용병들이 수도원 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면 메이 혼자서 전부 상대해야 하는 외통수적인 상황이 일어난다.


메이를 위험에 빠지게 할  없었다.


"…씨발, 왠지 불안한데."

그래도 잠시는 괜찮겠지.


확인 사살을 할 것도 없는 몰골이지만, 괜히 불안해서 도끼를 뽑아서 목 위로 내리찍었다.


잘려나간 목이 나뒹굴었다.


굴러가는 목을 바라보면서도 내 불안감은 덜어지지 않았으나,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수도원을 향해 달려나갔다.



*

넓은 대회랑, 두 남녀가춤추듯 싸우고 있었다.


남자가 독이 잔뜩 발라진 장검을 휘두르면, 소녀는 백마 위에 탄 채로 몸을 움직여 피해냈다.

허공을 그어버린 장검이 돌아오기도 전에 화염으로 만든 구체 두 발이 날아가 그 몸뚱이에 꽂혔다.

"크윽…!"

퍼퍽!

몸뚱이에 부딪힌 화염은 그 갑주 속 살점과 내장만을 겨우 데워내며 흩어졌다. 크제론의 자신만만함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었다.


준신으로서의 크제론의 권능은 속성 저항.


약소한 마법이라면 충분히 저항할 수 있으며, 다소 강력한 마법이더라도 위력이 감쇄되게 만들  있는 권능.

생명 흡수나 근력 증강 등의 직접 전투 권능은 아니었지만, 크제론은 이미 전투 경험과 실력이 충분한 그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 없다고 애써 자위했다.

그리고  권능 덕에 소녀가 쏘아내는 불덩이들에도 비교적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씨이발…!"


그것도  두 번일 때의 이야기.


그의 몸에 무수하게 꽂혔던 화염의 갯수를 생각하면, 저항 자체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즉사하진 않도록 팔을 둥글게 머리에 감싸 화염을 견딘다.

 무슨 초라한 꼬라지인가. 그는 자조하면서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메이의 궤적을 쫓았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설령 거리를 애써 좁히더라도 메이는 백마의 우월한 기동력을 여과 없이 이용하여 피해냈고, 그렇게 피해낸 이후에는 다시 화염이 날아들었다.


따라잡으려고 술수를 쓰거나 기책을 짜낼 때마다 마법이 몸을 두들겼다.


차라리 단순한 불덩이였으면 괜찮았겠으나, 그의 몸을 두들기는 마법  평범하다고 할만한 것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크제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단 두 가지였다.

무작정 돌격하여 거리를 좁혀서, 어떻게든 유효타를 먹이던가.

아니면 억지로 엄폐물을 만들어내어 서서히 거리를 좁히던가.


둘 다 그리 잘 풀리진 않았다. 허튼 시도였다는 게 명확히 알려지는 것처럼,  모든 시도는 무용하게 돌아갔다.


"후우…."

크제론은 탄화되기 시작한 다리를 검집으로지지하며 앞을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백마에 올라탄 소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마법을 만들어내고 있는 풍경만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처음부터 오판이었다.

기동력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면, 엄폐물이 없다시피 하더라도 상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마법사가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정리하려거든 잠시의 틈이라도 만들 수 있을 엄폐물이 없는 편이 유리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달한 길은 전형적이었다.

크제론은 다가서기도 전에 마법에 흠씬 두들겨 맞아 뻗었다.

입에서 나오는 숨결이 그야말로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졌다.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속성 저항도 한계치가 있었다.


메이는 백마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백마는 사라지고, 굳건하게 검을 든 작은 소녀만이 자리에 남았다.

그리 길지 않은붉은 펄션이 방패와 짝을 이루어 겨눠지고, 크제론은 그 꼴을 보면서 웃었다.

우습지도 않았다.

장검 연맹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그가, 준신이 되어 지금은 장검 연맹 중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력을 손에 넣은 그가.


지금은 이런 땅꼬마한테 당하다니.

탄화된 다리가 스러지려고 하고 있었다. 기회는 오직 한 번 뿐이었다.

"후우…."

숨결을 따라 각오가 굳는다. 각오를 굳힌 크제론이 독이 발라진 검을 틀어져라 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간다."


타아앙!

총을 쏘는 것만 같은 소리에 메이가 퍼뜩 놀라자, 낮게 낮추었던 자세 그대로 크제론이 쏘아졌다.

낮은 자세에서부터 쏘아지는 찌르기.

막아내기 보다는 흘려내야 할 공격은 기습에 적합하다.

뻗어지는 장검의 궤적이 곧게 뻗어나갔다.


이미 부상을 입은 몸으로는 다른 복잡한 기술을 쓸  없었으니, 최대한 피지컬을 살린 공격이었다.


하지만 메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의 궤적을 미쳐 확인하기도 전에, 방패를 찬 팔과 붉은 펄션, 적조를 든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이뤄진 반격은, 주현성이 보았노라면 놀랄만한 공격이었다.


그 동작은 메이의 오랜 연습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찌르는 장검을 방패로 밀어내며, 동시에 팔을 뻗는다.

뻗어져 향하는 칼날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형상이었다.

언뜻 힘이 실리기 어려웠으나, 짧게 잡은 검날을 팔에 일직선이 되게끔 휘두르면서 손목의 스냅 역시 실었다.

위력은 강격에 비하자면 보잘 것 없지만,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한다면 충분했다.

빈틈에 정확히 찌르는 치명적인 공격.

크제론의 왼눈 위로 붉게 실선이 가해졌다.

"크윽, 빌어먹을…!"


크제론은 과연 능숙한 용병이었다. 한쪽 눈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려 애쓰며 애써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다리를 박차 뒤로 물러나려고 하는 순간에, 메이가 방패를 펼치지 않았더라면.


챠카아앙!

쩌억!


비스듬히 기울인 방패가 제 머리를 치지 않도록 몸을 숙이고, 크제론이 미쳐 빠져나가기도 전에 펼쳐진다.

그녀가 마법을 쓰지 못했을 때부터사용해온 단순 무식한 기믹이 펼쳐지자, 복부를 가격당한 크제론은 붉은 선혈을 입으로 토해내며 미끄러졌다.

쿠당탕!


콰르르륵!


쏘아진 몸뚱이가 돌로 이뤄진 기둥을 때려부수고, 바닥을 미끄러지며 돌조각을 사방으로 튀겨댔다.


크제론이 겨우 몸을 멈춰세웠을 때에는 그의 다리는 완전히 바스라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쿨럭거리며 뱉어내는 기침마다 피가 한웅큼 바닥에 쏟아졌다.


"씨발… 겨우 꼬맹이한테…."

스릉


호흡을 되찾기 위해 숨을 몰아쉬던 크제론은 제 머리를 향해 들이밀어진 펄션을 보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피가 흘러내리는 눈두덩 위로 검이 겨눠져 있었다.


크제론은 하, 하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입에 고여있던 피를 바닥에 뱉어냈다.


"어이없구만."

그는 제 머리 위를 새빨갛게 덮고 있는 화염들을 보면서 전투를 복기했다.

처음 돌격까지는 사실 괜찮았던  같았다. 그때는 승산이 있어보였다. 한 팔이 없긴 했지만.


그 화염들이 내리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비가 내리듯, 전방위에서 빈틈 없이 내리는 화염은 그에게 행동의 자유나 공격의 자유를 완벽하게 앗아갔다.


아무리 속성 저항이 있다지만 화염은 화염. 맞을 때마다 살이 익고, 녹고, 불탄다.

빗겨맞아도 멀쩡하긴 힌들텐데, 겨우 거리를 좁힌다 싶으면 화염으로 엮어진 사슬이 쏘아져 기둥에 묶어놓고 화염을퍼붓는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백마의 다리로 걷어차거나, 얌전히 거리를 벌린다.

심지어 검술도 저렇게, 마법사임에도 충분하다고 할 수준은 갖추고 있었다.

몹시싸우기 버거웠다. 허탈해하는 크제론에게 겨눠진 적조가 기울어지더니 검날에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30대는 갓 넘었을 장년으로 접어들고 있는 외모. 야망에 불타며 배척파의 위에 올라, 준신이 된 남자의 얼굴.


자신만만히 수도원을 습격했건만,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보이는 소녀한테 당할 줄은.


그는 자신을 자조하며 손에서검을 떨어트렸다.

"차라리 그 반신이었다면, 전사답게 죽었을텐데."


후회하며 뱉어내는 말에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완전히 사냥당한 기분으로 크제론은 소녀를 올려다봤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이지만.


봄의 순례자는 알고서 보낸 게 아니었을까? 저 반신이  수도원에 오리라고 예상하고서, 자신과 수녀를 보낸 게 아닐까.


다른 준신들은 상대적으로 통제할만한 인물들 뿐이다. 통제하기 힘든 건 야망이 강한 그와 정신이 나간 수녀, 둘 뿐.

만약 성공하더라도 그만, 실패해도 아쉬울  없는 그런 인선을 보내놓은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조리가 안 맞는 것도 아니었다.

크제론은 무릎을 꿇은 채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덜컥이는 가슴이 마지막 생명을 쏟아내고 있었다.


흐려져가는 정신으로 호기롭게 말을 뱉어냈다.


"나는 이렇게 쓰러지지만, 수녀는 쉽지 않을 거다. 잠깐 같이 싸워봤지만, 그 새끼는 멀쩡한 새끼가 아니었거든. 만약,  반신이 혼자 상대하러 간 거라면 최악을 대비해야 할 거다."

메이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죽어가는 준신에게 시선을  채 조곤조곤 말했다.


"아니, 현성이가 이겼어."


'무슨 근거로?'


남자가 받아치려는 때에, 불현듯 몸 전체의 기압이 급속도로 줄었다가 다시 팽창하는 듯이 느껴졌다.

빠져나간 소리가 빠르게 밀려들어오며 어떤 소음을 전해주었다.

  오 오 오 오 오…


그건 어떤 생물의 울음소리 같았다. 어떤, 아주 거대하고 위험한 생명체의 포효.


이게 무슨 소리지? 뭐가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건데? 혼란스러워 하는 크제론에게, 메이가 웃었다.


"들었지?"

뭘?

크제론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눈을 굴렸다. 그의 오해는 급속도로커져만 갔으나, 아무도 정정하지 않았다.

"난,  도대체 뭘 적으로 돌린 거지?"

메이는 본래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정도는 대답해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주석이 들었다면 통탄을 금치 못했을, 그런 대답이었다.

"진짜 신."


그 순간, 창 밖에서 태양이 터왔다. 그 태양은 두 갈래로 갈라진 것처럼, 양측에서 동시에 터오고 있었다.


거대한 불기둥을 이끌어 지상에 현현한 태양은, 얕게 회랑 위쪽에 트여있는 테피스트리를 넘어 메이의 얼굴을 간질였다.

크제론이 그 태양에서 묻어나는 짙은 신성을 느끼기도 전에, 메이의 적조가 크제론의 멱을 그었다.


피는 준신의 강대한 생명력을 잃은  힘 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 흔한 들썩임조차 없이 크제론이 쓰러지고, 메이는  몸에 신성이 마력으로 바뀌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