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9화 〉성유물 (149/274)



〈 149화 〉성유물
백색의 구조물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 어떤 대성당. 백색으로 이뤄진 기둥이 즐비하게 들어차있는 대회랑의 중심에 거대한 대리석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에 모여앉은 이들은  순백색 가구가 신비롭거나 놀랍다거나 비싸보인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유리조차 귀하고, 대리석이나 돌들은 비싼 값을 주고 석공에게 구매해야 하는 세상.


이들은 그런 세상에서, 이런 자재들을 아낌 없이 사용하여 신을 찬미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신을 찬미하기 위해 지어놓은 창조의 대성당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흠."


누군가의 헛기침이 들리고, 몇 사람이 불편한 낯으로 흘긋 거린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불편해 하는 것은 무료함을 표현해서 나온 것이지, 결코 무료해하는 사실 자체를 꼬집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기다리는 성녀는 예정된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는 주교이자 성녀인 그녀가 나오기 전까지는 시작되지 않아서, 그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무료하게 시간을 뗴워야 했다.

지금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무료하게 둘러앉아, 멀거니 성녀가 들어와야 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언제 온다는 건지. 누군가의 인내심이 고갈이 날 무렵, 자리에 일어나려 하는 때에야 문은 열렸다.

"좀 늦었네요. 양해해주시길."

그리 말하며 회랑 안으로 발을 들이는 존재는 교단 내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압도적인 신성력과 창조신의 권능을 사역하는 재능, 그에 수반되는 정치적 능력과 교단 전체의 방침을 관리할만큼 충분한 수완까지.


사람들은 그녀를 성녀라고 불렀고, 그녀는 제 칭호를 좋아했다.

성녀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와 상석에 앉자,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녀가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니. 교단의 가장 높은 12자리를 나눠가진 노인들과 성녀 하나가 회의를 시작했다.


"장검 연맹이 압박해오고 있습니다. 공국 역시 그에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처음으로 나온 안건은 장검 연맹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얘기를 꺼낸 노인은 그 뒤로도  가지 장검 연맹의 핵심적인 전력이나 전함 등이 움직여 제국령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 말에 몇 노인들의 얼굴색이 칙칙해졌다. 그들이 있는 회랑 역시 제국령 안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은 나인가? 흠, 우리 성전수색단이 조사해본 결과, 황제와  휘하에 있던 제도는 완전히 악신의 손으로 넘어갔음이 확실해졌다. 정확한 변절일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제 2 성전사단이 마지막으로 제도의 외벽과 접촉했는데, 완전히 악신의 손아귀에 넘어가 벽에 자라난 뿌리가 인간을 공격해왔다고 하더군. 그 크기와 위력에 대한 보고는 여기에 있네. 자네들도 보면 알겠지만, 이건 하루 이틀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가 손짓하자, 기립해있던 사제 하나가 양피지 뭉치를 끌러 자료를 각기 수뇌들의 앞에 내려두었다.

내려진 양피지에는 제도의 외벽에서 겪은 일에 대한 간단한 보고와 함께 상세한 묘사가곁들여져 있었다.

그 자료를 유심히 살피던 몇 사제복의 노인들이 탄식을 자아내고, 갑주 차림의 중장년들이 곤란한 얼굴로 제 턱을 쓸거나 양피지를 구겨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지. 제국 곳곳에서 교회와 수도원들의 연락망이 끊어지고 있다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장검 연맹의 소행이라고는 하네만, 나는 제국 역시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군. 제국령 깊숙히 파고든 장검 연맹이 어떤 문제도 없이 원정을 계속한다는 점도 신경 쓰이고."


확실히, 그렇군 따위의 말을 흘리며 노인들이 수긍한다.


수긍하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성녀만이 묵묵부답으로 자료를 바라보고 있었다. 꼬아놓은 다리 위로 사제복이 너울거렸다.


일견 불량스러운 태도이나 누구 하나 그것을소리내어 꼬집는 이는 없었다.


"인근 왕국들의 움직임 역시 그러하지. 이미 산왕국 같은 곳은 교구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연락망을 기동해보아도 조용하고. 내가  때 우리는 완전히 몰려있다네. 몰이 사냥을 당하고 있는 게야."

"그렇지…. 우리 교단은 애초에 세력이랄  없으니, 내가 악신이라도 이렇게 대응하겠어."

말을 받은 노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탄식이 회랑 안에 울려퍼졌다.


사실이 그러했다.

순백교단은 기본적으로 종교로서 정치에 간섭했을 뿐, 소유한 영지랄 것도 없는 단순한 종교 조직이었으니. 노인 중 하나가 탄식 사이로 말을 흘렸다.


"역시 전임 성자  강하게 나왔어야 했어. 그랬으면 지금 쯤 성전이라도 선포할 수 있었을텐데, 우리가 제 이빨을 뽑아버렸으니 원."


"어허, 순교한 이를 꾸짖지 말게."


"하지만 사실이지 않은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조용."


노인의 실랑이가 커지기 전, 선명한 적발을 길게 늘어뜨린 성녀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동작 하나에 금세 언성이 높아질  하던 노인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그녀는 양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엔 방금 나누어준 제도에 관한 자료 외에도 몇 가지 자료가 덧붙여 있었다.

예를 들자면 성유물의 실종.

각지에 퍼져있는 성유물들이 존재하는 수도원이나 교회, 교구 등이 잇달아 연락이 두절되고 있었다.

차라리 공통점이 없노라면 짐작하기 힘들었을테지만, 성유물이 일제히 사라지는 것은 달리 말할 것도 없이 명확한 증거였다.

어째서 성유물을 노리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성유물 중 일부 강력한 물건들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유물들은 주의 신성이 담겨있을 뿐인평범한 물건이다.


신성을 느끼고 가르침을 구하는 용도 이상의 무언가를 해내기엔 부족했다.


'막말로, 그냥 신성이 담겨있을 쓰레기니까.'


다른 노인들이 들었으면 대경실색할 내용이었으나, 성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턱을 섬섬옥수 같은 흰 검지로 쓸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성전사단과 성기사단도 실종되었다고 했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을 받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던 어느 고위 사제였다. 그 사제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갔다.


"성전사단과 성기사단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단이 크게늘어 악신을 숭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산왕국 같은 경우에는 공공연히 재앙의 어머니에 대한 신앙을 공표했습니다."

재앙의 어머니. 듣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낱말이라몇 사제들이 불만을 토로했으나, 성녀의 표정은 고요했다.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성녀가 읽어본 바로는 그러했다.

도움을 요청하기엔 우군이나 동맹이 없었으며, 그렇다고 맞서 싸우기엔 교단의 힘이 부족했다.

만약 예전처럼 교단의 세가 강한 때라면 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터이나, 제국이 득세한 후로는 황제의 과감한 정책에 떠밀려 교단은 점점 힘을 잃어만 갔다.

그 모든 게 지금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성녀는 무척이나 놀랄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지기엔 너무도 유감스러웠으니.


그정도로, 지금 교단의 위기는 무척이나 정교하게 만들어낸 듯 음모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 모든 게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양피지를 넘기던 성녀는 양피지들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악신이 넘어왔다는 모호한 보고가 들어왔던  떠올랐다.


당시에는 원로석을 차지한 고위사제 모두가 그 보고를 무시했으나, 지금 상황만 보노라면 그 보고는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지금 당장 악신이 이 대륙에서 활개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약해지고, 손발을 모두 잃은 교단은 악신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떠오르는  없었다. 그정도로 상황은 각박했다. 성녀가 한숨을 뱉어내자, 그걸 물끄러미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사제가 말했다.

"뭔가 없겠습니까, 성녀님."


성녀는 재촉하는 사제에게 흘깃 눈초리를 보냈다.


떠오를리가 없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쪽에도 신이 있는 게 아닌이상에야, 승산은 아예 없어보였다.


성녀는 애써 답을 골라내려고 했다. 최대한 덜 충격적이면서도 사제들이 좆됐음을 납득시킬  있는 낱말을.


그렇게 골라낸 말을 입에 담으며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잘 들으세요. 저흰…."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진동이 울려퍼졌다.


그 진동은 말을 하려던 성녀를, 그 말을 들으려몸을 기울이던 사제들을, 뚱한 표정으로 성녀를 주시만 하던 성전수색단 단장을, 일거에 쓰러트렸다. 그들은 무력하게 자리에 엎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컥…."

누군가 겨우 삼키는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강력한 정신적 지진.


그들은 쉴새 없이 흔들리는 정신을 느끼면서 입에서 신물을 후두둑 떨어트렸다.

강렬한 두통이 뒷골을 타고 척추를 역으로 거슬러 내려가고 있었다.

풀썩!

결국  고통을 못 이겨낸 사제들이 쓰러지고, 몸이 튼튼한 단장이나 성녀를 비롯한 몇명만 남아 머리를 부여잡으며 버텨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은 멎어들었다.


진동과 고통이 멎어들면서 형상을 바꾸었다.

그건 환상이었다.


그 환상은 무척이나 또렷했다. 그 환상 속에서, 어떤 기사가 세상에 서있었다.


전신에 두른 검붉은 갑주에 등과 머리에 둘러진 붉은 후드 망토, 등에 짊어진 거검에 화려한 도끼와 묵직한 외관의 방패를 찬 기사.


그 기사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싸우는 형상은 계속 바뀌었으나, 바뀌는 형상 속에서 그녀는 유의미한 공통점을 찾을  있었다.


평소엔  불량한 태도를 내보이는 성녀였지만, 그녀는 그 환상 속에서 기사와 맞서는 존재를 분명히 알아볼  있었다.

그것은 성서에 적혀진 악신 중 하나, 주의 목을 베었다는 여름의 도살자의 흉측한 본 모습과 똑같았다.


거체에 자라난 두개의 뿔, 여덟개의 다리, 태양을 끌어내린 듯한 불타는 털가죽.

환상은 그것과 맞서 싸우는 기사를 비추었다. 기사는 두들겨 맞아 전신이 깨지고, 들이받혀 피를 흘리고 불타며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악신과 싸웠다.


고무적인 장면이었다. 그렇게 싸우는 기사가 결국 악신의 목숨을 끊고, 피를 흘리며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악신에게서 빼앗은 도끼였다. 그 도끼날에는 악신의 피가 흠뻑 묻어있었다.

성녀가 그 서사시적인 장면에 당황한 찰나, 그 기사의 환상 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떠오르는 문구는 점차 또렷해졌다. 그녀의 망막을 태워버릴 듯 강한 빛을 뿜으면서 허공을 수놓았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1/4]


이해할 수 있는 문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녀는 저 문구를 보는 순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그녀 뿐만이 아닌, 지금 깨어있는 이들  신앙이 깊은 이들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 주여."

울리던 고통이 사라져 그녀는 그 거룩한 신의 증거를 감동에  바라보았다. 태초에 모든 것을 만들어낸 주께서 내리는 영광스러운 파발을.


이윽고 환상은 거두어졌다. 천천히 사라지면서, 띄워진 이해할 수 없는 파발은 명확한 형체로 떠올랐다.

[해방자를 도와 신을 죽이십시오. 1/4]

[현재 위치: 소에르 수도원]


해방자. 성녀와 아직까지 기절하지 않았던 교단의 상층부는 그 메세지를 보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주께서, 주께서다시 임하셨다. 해방자로 다시 임하셨다."

어떤 사제가 토해낸 말대로, 성녀의 망막에 남은  메세지는 해방자라는 존재를 도우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훑으며 그 메세지를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에 옮겨 적었다. 그 메세지가 망막에서 사라지기 전에,  거룩함을 담아내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에 그 문구와 개인적인 명령을 적어내린 그녀는 만족한 얼굴로 웃으며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사제를 불렀다.

사제들은 황망한 얼굴로 쳐들어오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사제들이 거품을 물고 기절했거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 장면은 아무래도 기이한 장면이었으므로.

하지만 사제들은 그 어떤 지체도 없이 성녀가 건네는 명령서를 받아들었다.

명령서에는 해방자를 도와 신을 죽이라는 문구 외에도 소에르수도원에 급히 전령을 보내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사제들은 들어올 때만큼이나 빠르게 회랑을 빠져나가고, 성녀는 그 뒷모습을 보며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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