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성유물
당황스러워 하면서,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를 경계하던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온 수도원장은 나를 앉혀둔 채로 여러 서적을 꺼내오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성서로 보이는 것들이나 그림책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보는 언어인지 한 번 본 이후에야 변화되어 읽을 수 있게 된 낡은 서적들 역시 존재했다.
방 자체에서도 낡은 책 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수도원장이 그런 서적들을 잔뜩 꺼내놓으니 그런 냄새는 한층 심해져 코가 아릴 정도였다.
시큰거리는 코를 꾹꾹 눌러가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수도원장이 마지막으로 어떤 책을 가져와 내려놓고는 제 의자에 앉았다.
마주보는 노인의 얼굴이 자글자글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예, 보시다시피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찾다보니 이런 것들도 필요할 거라 생각해서 그만… 늙은이의 주책이라고 생각하고 아량 있게 넘어가주십시오."
"…이번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도원장은 책 한권을 펼쳐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사락대며 넘어가는 종이소리에 집중하고 있자니, 수도원장은 금방 넘기던 페이지를 멈추고는 그 페이지를 뜯어냈다.
뭐야 씨발, 수도원 같은 곳은 이런 책 같은 거 귀중히 여기지 않나?
내 의문에, 수도원장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 신경 쓰지마십시오. 필사본이기도 한데다, 의인을 위해서라면 손해랄 것도 없습니다."
씨발, 존나 어색한데. 나한테 잘해주는 노인은 기사단장 하나만으로도 꽤 어색한 편이었는데, 수도원장은 그런 내 불편함을 인지하고도 별 문제 없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네 악신은 태초에는 주께서 내리신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권리와 주의 권능을 등에 업고 사람들을 이끌어 가르치고, 널리 뜻을 퍼트리고, 사람을 도왔습니다. 종국에는 주의 등에 칼을 꽂고 그 목을 베어 영과 신성을 취하긴 했습니다만,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의인이었습니다."
그건 얼추 알고 있는 이야기와 유사했다.
알고있는 것들을 조합한다면 짐작할 수 있을, 흔한 이야기.
무엇보다 내가 궁금해하고 있는 '이 새끼들이 왜 이러는가'에 대한 대답이 되진 않았다.
그래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으니 수도원장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 의인이 내려온 과정이 중요합니다. 이 대목을 보시면 주께서 계시로 의인의 등장을 알려주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은 의인이 나타남을 알게 되어 의인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내가눈썹을 들어올리며 뭐 어쩌라고 라는 표정을 짓고 있자 수도원장이 즉답했다.
"당신께서도 같은 방식으로, 계시로써 발탁되셨습니다. 주의 의인이자 주가 이름 짓기로는, 해방자로 말입니다. 저희는 수천년만에 다시 나타난 주의 의인을 마땅히 섬기고 돕고자 합니다."
"…해방자요?"
씨발, 존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데.
새삼 겨울의 해방자, 수용소에서 봄의 순례자의 개수작에 의해 뒈졌던 주인공이 떠올랐다.
살아있었다면 존나 큰 전력이 되었을텐데.
사실, 교단과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굳이 해방자인 건 유감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걸리는 부분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계시인지 나발인지가존나 뜬금 없다는 거고, 그 창조신인지 뭔지는 영과 신성을 빼앗겨 뒈졌다는 점이었다.
일단 물어보는 게 좋아보였다. 내가 손을 들어올리자 수도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그 계시가 뭡니까? 저는 그런 거 못 받았는데요."
"아아, 그것부터 설명해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그 계시란 참으로 대단한 광경이었습니다. 세상이 타오르는 불과 죽음으로 뒤덮이고 사람들이 신음할 때, 당신께서 나타나 악신과 맞서 싸웠습니다. 타오르는 털가죽과 태양을 따다 넣은 듯 흉흉한 두 눈을 빛내는 거대한 산양의 모습이었지요. 의인께서는 힘겨운 싸움 끝에 고무적으로 그 악신을 쓰러트리셨고, 그 악신의 도끼를 빼앗아 그 악신의 머리를 내리찍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 광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지 격양된 목소리로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과연, 직접 보았다면 감격스러울 광경처럼 보였다.
문제가 있노라면, 저 얘기가 몹시 익숙하다는 거였다.
산양, 타오르는 털가죽, 도끼. 100% 여름의 도살자 얘기였다.
그 익숙한 싸움의 형태는, 본래라면 이 종교쟁이들의 환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안되는 형상이었다.
그 싸움은 분명 나랑 메이, 겨울의 신부와 여름의 도살자 본인 밖에는 못 봤을테니까.
뭔가 뒤가 구렸다.
이 창조신 사칭범이 뭐하는 새끼인지는 몰라도, 좋은 의도를 갖고 지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모종의 수상한 음모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커져만 가는 경계심을 떠안고 턱을 쓸고 있으니, 수도원장이 덧붙였다.
"물론 그 광경 뿐이었노라면 저희도 당신을 의인이라고 떠받들지 않았을 겁니다. 중요한 건 그 뒤였으니까요. 그 고무적인 의인의 싸움이지나고, 주께서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아아, 그것은 수천년 전 모든 인간들이 직접 들을 수 있었다던 진정한 신의 음성과 완벽히 일치했습니다! 마침 저를 비롯한 사제들도 그 환상을 보자마자 그것을 필사하였으니, 직접 보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수도원장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었다.
꺼내드는 양피지는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적혀있는 것은 내게 몹시 낯선 무언가였다.
[해방자를 도와 신을 죽이십시오. 1/4]
[현재 위치: 소에르 수도원]
그건 시스템 메세지였다.
어설프게 필기체로 써져있어 시스템 메세지 특유의 경직된 느낌은 덜했지만, 그건 분명히 시스템 메세지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저 숫자와 현재 위치를 표기하는 묘한 게임 같은 느낌이 몹시 익숙했다.
눈을 슬쩍 돌리니 내 시야 귀퉁이에 있는 똑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1/4]
이게 창조신이라고?
곧이곧대로 믿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거, 본인의 주장이나 이론입니까? 아니면 걔가 그 뒤에 자기가 창조신이라고 얘기했습니까?"
"둘 다 아닙니다. 아주 예전에 기록에서부터 주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피조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제 뜻을 내리셨노라고 되어있습니다. 족히 수천년 전에 기록이 끊겨 거의 다 유실되어 있지만, 아직 성서에는 남아있습니다."
그거 참…. 일단은 의심해볼만 것들은 더 찔러봐야 했다.
내가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수도원장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악신들이 배꼈을 가능성도 없습니까? 그, 전언을요."
게올 수도원장은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신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주의 거룩한 전언을 모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죠.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확신에 찬 노인의 말에 나는 턱을 짚었다.
하긴, 4신이 전언을 배낄 수 있다면 나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나한테 지금 당장 자살하라는 메세지를 보내고 보상으로 집으로 귀환을 걸어놓았겠지.
진즉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굳이 지금 와서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긴 했다.
무엇보다 교단과 내가 협력하는 건 그들이 지양하고자 하는 일일테고.
…그럼, 진짜 창조신이라고? 갑자기?
복잡해지는 머리를 북북 긁어대니 수도원장이 인자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저라도 갑자기 신의 의인이 된다면 어색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세한 설명은 교단 상층부에게 직접 듣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마침 연락을 넣어놨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테지요."
맞는 말 같았다. 일개 수도원장보다는 뭐랄까, 좀 더 자료가 많고 직위가 높은 양반한테 들으면 정확할 거 같았으니까.
간단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기 에 에 에 에 엑!!!
"뭐야 씨발."
마치 억지로 새의 몸통을 잡고 구길 때 마지막으로 내뱉는 단말마처럼 들렸다.
그 섬뜩한 소리에 내가 도끼를 꺼내들려고 하니, 수도원장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단이 왔으니까요."
"…예? …뭘 타고 다니는 거예요?"
수도원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
"이게 왜 진짜지."
밖으로 나가자 보이는 건 진짜, 홀리해보이는 의복과 갑주를 두른 일련의 사람들이었다.
딱 보기에도 내 아버지 뻘보다 나이가 더 많아보이는 노인부터 시작해서, 내 아버지 뻘은 될 법한 중장년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걸어나오는 나를 보더니 격하게 반겼다.
늙은이들의 포옹, 악수, 어깨 두드림 등을 받으며 그 중심에 들어간 나는, 어색한 얼굴로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과 마주섰다.
왜 존나 기시감이 들지? 왜 고대의 도시에 있을 여름의 교단이 떠오르지?
"만나서 반가워요, 해방자시여. 저희는 순백교단이며, 저는 그 교단의 장을 맡고 있는 성녀 에일렌이라고 해요."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는 자신들을 그렇게 소개하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 앞에서 몸을 낮추었다.
선명한 적발이 흩날리고, 선명한 적안이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다.
뭐야 씨발, 복종의 표시로 정수리라도 보여주나?
내가 떨떠름하게 서있으니, 그들은 그렇게 무릎 꿇은 그대로 뭔가 알 수 없는 제스쳐를 취했다. 성호를 긋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었다.
그래, 종교인은 맞구나. 좀 그럴 듯한 모양새에 마음을 놓고 손을 흔들었다.
"그래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러니까… 어… 제가 할 말은 아닌데, 계시 하나 떴다고 저를 그렇게 믿어도 되는 겁니까? 혹시 뭐 속셈 같은 거면 미리 말 좀 해주실래요? 나중에 당하면 다 살려둘 거 같지가 않은데."
"주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저희들이예요. 주께서 뜻 없이 의인을 선정했을리 없지요. 부디 안심해주시길. 저희는 그 어떤 악심도 없습니다."
"음, 예…."
미친 광신도 새끼들. 살짝 경계라도 해줬으면 마음이라도 놨겠는데, 너무 친절해서 반대로 수상했다.
슬쩍 떨어지니, 그제서야 인파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기괴한 날짐승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가오리 같은 생김새인데, 파충류의 그것처럼 입이 길쭉한 정체불명의 생명체였다.
날개는 또 네 개가 달려있어 보고 있기 불편했다.
억지로 그 가오리에게서 눈을 떼내니 성녀가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무슨 얘기를 한다? 일단 저 가오리 새끼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래. 그거.
"여기 성유물 있는 건 아시죠? 악신 새끼들이 그거 노리고 있으니까, 그거부터 어떻게 해야할 거 같다고 생각을…."
"예, 마침 이 수도원에 존재하는 모든 성유물을 회수하여 대성당으로 가져갈 생각이었지요. 이 수도원에도 병력을 남겨두어 습격에 대비할테고, 사제들은 원한다면 대성당으로 이주해올 수 있습니다. 비록 역사와 뜻이 있는 수도원을 버린다는 게 걸릴 수 있지만, 인명을 잃는 것보단 낫지요."
뭐야 일처리 존나 빨라.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니, 성녀가 웃으며 손짓했다.
그 손짓에 맞추어 가오리 옆에 서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챙기고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 뿐만이 아닌듯, 그간 내 뒤에 서있던 수도원장은 제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게 건넸다.
딱 보기에도 뭔지 잘 알기 어려운 그릇 같은 거였다. 이게 뭐래.
"성유물입니다. 해방자님과 함께 대성당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예? 아, 예."
내가 그 성유물 그릇을 받아들어 안으니, 수도원장이 인자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나를 껴안았다.
마치 지구에서 교황이 아픈 이들을 안아주며 그들에게 위로를 건넬 때 하던, 뭔가 거룩한 방식의 포옹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포옹을 받고 있자니 수도원장이 나를 품에서 놓고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뭐야 씨발. 뭔데.
이게 순백교단에서는 일반적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성녀와 몇 사제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그런 어처구니가 없어보이는 표정을 보고도 잘도 말을 뱉어냈다.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저희는 도착한 후에 할 생각입니다."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나요. 질문이 목젖까지 차올랐다가 내려가자, 성녀는 방긋 웃으며 이상한 가오리를 가리켰다.
"그럼, 타시지요. 대성당까지는 길이 멀답니다."
그 인자한 미소에는 어떤 협박이나 강제가 없었지만, 어쩐지 거부하기 힘든 흐름이었다.
얼마 없는 선택지에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 정체불명의 가오리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