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성유물
길게 뻗어진 가도는 내리쬐는 태양과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두드려져 은은한 열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온기 위로 발을 디딜 때마다 바람이 갈라지고, 태양이 비켜선다. 그 광경에 들어가던 한숨이 도로 토해졌다.
에휴. 내뱉는 한숨에 옆에서 따라오던 겨울의 신부가 짧게 웃는 소리를 흘렸다.좋댄다.
머리를 긁적이니, 내 옆에서 쫑알대고 있어야 할 존재가 없다는 게 실감이 됐다.
"…메이 없으니까 되게 어색하네요. 좀 허전하고."
지금 쯤이라면 대성당에서 죽을상을 하고 뻗어있겠지.
아니면 나 없으니까 좋다고 뭐 퍼먹고 있거나, 아니면 울고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
여러가지 생각이 빠르게 치솟았다가 내려앉자, 겨울의 신부가 웃으며 내 옆에서 나란히 발을 딛었다.
"당신께서 그러시는 것도 이해가 가요. 저 역시 그렇답니다. 메이씨가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예요.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요?"
딸이 아니고? 내가 피식 웃자 그녀 역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들었는지 배시시 웃었다.
짧은 웃음을 흘리는 겨울의 신부를 흘긋 바라보니 그녀는 베일 사이로 옆 얼굴을 내게 드러낸 채로 정면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원체 나 외에는 유대감을 드러내거나 갖는 편이 없고, 반응도 옅은 편인 겨울의 신부지만 이상하게도 메이한테는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메이가 앵겨오면 곧잘 받아주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제 무릎 위에서 낮잠을 자게 두기도 하고,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며 정돈을 도와주기도 했더랬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메이의 싹싹함과 귀여움 때문이 아닌가 했으나, 새삼 생각해보면 메이도 플레이어였다.
어쩌면 플레이어들에게 자연히 호감을 갖도록 설정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녀 본인에게 직접 묻기에는 모호한 건이라, 애써 웃으니 겨울의 신부가 손을 잡아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가도를 걸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나와 그녀가 유적을 찾아 거닐고 있었다.
수수께끼는 의외로 간단히 풀렸었다.
내가 지동설에 대한 부분을 짚어내고, 지동설에 대해 설명하자마자 성녀는 나머지 수수께끼에 대한 부분들은 이미 다 풀려있노라고 이런저런 문헌을 가져왔었다.
그렇게 가져온 문헌들과 사제들, 그 기록들을 취합하여 지도로 만들어줄 기록관까지 온 이후에야 회의는 재개되었는데, 그들은 내가 던진 힌트를 받자마자 빠르게 유적의 위치를 추리해냈다.
추리의 결과, 유적의 위치로 짐작되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정확한 순례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유적이라 그런 건지, 정황상 추정 위치는 단 둘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바로 인접해있어 조사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인선이었다.
원래라면 메이도 동행했겠지만, 내가 없을 때 대성당을 방어할 인력이 필요하다는 성녀의 주장에 의해 나는 메이를 교단 측에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녀가 내놓은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대성당 자체는 호락호락한 거점은 아니나, 무수한 성유물들이 잠들어 있어 봄의 순례자가 노리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다소 무리만 한다면 군단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을만큼, 봄의 순례자가 노리는 게 당연한 요충지처럼 보였다.
그런 장소이니만큼 경비는 필요했는데, 내가 가지 않고 메이를 유적지에 보내는 건 왠지 불안하니 기각이었다.
메이를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메이는 어리숙한 면이 있으니.
무엇보다 적합성의 문제도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에 적합하지만 범위 전투는 일회성인 나와는 다르게, 메이는 범위 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력한 마법 공격을 두루 습득하고 있었다.
혹여 대성당이 습격 받더라도 쉽게 대응할 수 있어보였다.
그래서 메이는 내 간곡한 설득과 약간의 뇌물을 받은 후에야 대성당 방어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리하야 나와 겨울의 신부는 단 둘이 가도를 걷고 있었다.
"얼마나 왔나요?"
생각에 잠겨 있자니, 겨울의 신부가 대뜸 내게 질문을 던졌다.
왠지 묘하게 들떠있는 게 그녀도 나를 독차지하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어쥐었다.
지도의 틈바구니로 그득히 식량이나 식수 따위가 배낭을 메우고 있었다.
"아직… 그리 가깝진 않네요. 좀 더 걸어야 할 거 같아요."
"피곤하진 않으신가요?"
"아뇨, 전혀요. 겨울님은요?"
"저는 당신만 곁에 계신다면 피곤치 않답니다."
내게 앙큼한 말을 남긴 그녀는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돌로 이뤄진 가도를 경쾌한 걸음으로 밟으며 콧노래를 부르는 겨울의 신부를 뒤따르자, 그녀가 걸음을 늦추어 내 옆에 섰다.
지도를 꺼낼 때도 보았던 거지만, 이번 원정은 확실히 장기 원정이 될 것처럼 보였다.
손에 든 지도를 다시 펼치자, 그 지도에 그려진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나와 겨울의 신부가 탐사하게될 유적지는, 일종의 도시였다.
지도로도알 수 있을 정도로 실내 구조는 거대했다.
너무도 거대해, 독도법이라고는 좆도 모르는 내 눈에도 족히 탐사하는데 며칠은 걸릴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길을 안내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 건 없을 곳이니.
그리고 이런 족히 며칠은 걸릴장기 원정이라면, 겨울의 신부는 반드시 데려가야만 했다.
식량을 조리할 수 있고, 야영지를 설치할 수 있는데다 감각이 뛰어나 불침번이필요 없을 그녀는 이 원정의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원정에 있어서 식량과 보급, 재정비의 필요성은 목숨보다 중요하니.
…근데 왜 중요하지?
내가 떠올린 거긴 했지만, 그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판단의 기저 역시 뭔가 흐린 게, 내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만 같다는 느낌 정도만 받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신경 쓸것도 아니고, 아마 맞을테니 별 문제랄 것도 없었지만.
흐린 머리를 부여잡으며 지도를 집어넣으니, 겨울의 신부가 내 손을 잡은 채 내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녀가 이끄는대로 별 불만 없이 나아가니 태양은 여전히 내리쬐는 가운데, 지평선 너머에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시골 마을이었다.
딱 봐도 시골이라는 게 뻔히 보이는, 그야말로 깡촌의 전형이었다.
외곽을 두르는 울타리가 보이긴 하지만, 내부에 그 어떤 병력도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깡촌.
내가 그 깡촌의 풍경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누군가 그 마을 어귀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몸에 두르고 있는 셔츠는 낡았고, 마찬가지로 바지도 낡은 천을기워낸 것처럼 보이는 남자.
한 눈에 보기에도 족히 50대는 넘었을 법한 전형적인 농민이었다.
그 농민은 나와 겨울의 신부 앞에서 멈춰서더니, 시골 농민 특유의 경계심 섞인 눈빛을 보내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 무기를 꺼내들고 덤벼와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경계심 섞인 눈빛만 보내올 뿐 무기를 꺼내들거나 병력을 데리고 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경계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경계에서 그치는 느낌.
지금 제국령 전체가 개판인 걸 감안하면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마치 외지인들에게 익숙한 듯한 모습.
명확히 누군가 먼저 지나갔음을 시사하는 모습이었다.
예를 들자면, 봄의 순례자의 지령을 받고 유적지를 찾아나선 준신들이라던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나를 향해 노인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쇼?"
호오.
꺼지라는 말이 들려와도 그러려니 할 생각이었는데, 예상 외로 노인은 대화할 자세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노인이 눈썹을 들썩이더니 다시 물었다.
"순례인가? 아니면… 지나간 놈들을 찾고 있는감?"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은 펼쳐져, 수금을 받을 마음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은화를 꺼내어 쥐어주었다.
교단에서 여비로 쓰라며 쥐어줬던 돈을 벌써 쓸 줄은 몰랐는데.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돈을 쥐자마자 헤벌쭉 웃었다.
"여길 어떤 놈들이 지나갔고, 몇이나 지나갔는지 잘 아십니까 노인장?"
분명 높은 확률로 삐까뻔쩍한 놈들이라면 제국놈들일테고, 음침한 새끼들이라면 봄의 순례자가 보낸 무언가일테니, 구분에서 문제를 겪진 않아도 될성 싶었다.
노인은 내가 쥐어준 은화를 찬찬히 살피다가 품에 넣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알고 말고. 그놈들이 우리한테 식량도 사갔으니까. 산왕국의 병사들이었지."
…산왕국?
단순히 경로가 겹친 건지, 아니면 어떤 목적이 있어 지나친 건지.
낯선 이름이 의아해 되물으니 노인은 선선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놈들도 나한테 돈 쥐어주면서 여길 누가 지나갔는지, 얼마나 지나갔는지 묻길래 딱히 지킬 의리라고는 없으니 말해줬지."
흐음.
그 노인의 말을 듣고서, 나는 내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분명히 좋은 경우였다.
산왕국이 정확히 뭘 쫓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교단을 쫓고 있을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오히려, 산왕국은 유적을 찾고 있거나 유적을 찾고 있는 누군가를 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유적을 찾고 있는 누군가를 쫓고 있는 게 맞다면, 그들은 제국을 쫓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교단을 쫓는다기엔 교단은 지금 무언가를 쫓거나 수색할 여력이 없었다. 그건 인근국인 산왕국이 모를 수가 없는 정보였고.
아마 제국과는 동맹 관계가 아니거나, 직접 적대 관계인 것 같았다.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그 산왕국이란 놈들이 어떻게 유적의 존재를 알았고 뭐하는 놈들이냐 하는 거겠지만, 그건 당장 이노인장에게 물어봤자인 문제였다.
어쨌든, 산왕국이 노리는 무언가가 제국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낮아보였다.
제국을 노린다면 제도를노리거나 제국령의 도시나 마을을 노리고 말지, 뭐하러 있는지부터가명확하지 않은 유적지부터 노리겠는가.
분명 산왕국 쪽에 뭔가가 있어보였다. 조사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흥미로운 정보를 얻어냈다며 노인에게 시선을 돌리자, 노인은 그 고집스러운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보감사합니다. 아마 저희 이후에 누가 묻거든 대답해주리라 생각하지만… 이거 받고 생각을 다시 해주십시오."
물론 이 새끼가 이래놓고 '응~ 말해줘버릴 거야~' 해버리면 답이 없는 건 알지만, 그 경우엔 당당히 이 새끼 이빨을 뽑아버릴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품에서 은화 한 닢을 더 꺼내어 노인장의 손바닥에 올려놓았고, 노인장은 그제서야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고 싶어지면 이걸 보고 다스리도록 하지. 고마우이."
"뭘요. 거래니까요."
노인장이 품에 은화를 집어넣고 등을 돌려 마을 어귀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만 보자니, 하늘이 어둑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직 어둡다고 말하기엔 뭣하지만, 다시걸음을 옮기기 시작해도 유적지에 도착할 쯔음에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있을 것만 같은 하늘.
"…겨울님, 쉬고 갈까요?"
"당신께서 그러고 싶으시다면,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허락이라고 듣고…."
어둑해진 길을 걷는 건 정신 건강은 물론이고 신체에도 좋지 않다.
사람은 제때 잠을 자줘야 확실히 제 컨디션을 낼 수 있었으니.
그 뿐만이 아니라 야영지의 흙바닥이 아닌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자는 건 앞으로 산왕국은 물론이고 제국 내지는 봄의 순례자의 준신들을 맞닥드리게 될 내게 있어서는 필요한 휴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산왕국이니 제국이니 하는 새끼들이 바쁘게 유적을 찾고, 서로를 쫓느라 기력을 빼는 동안 내가 충분히 쉬어 만반의 컨디션으로 그들을 상대하게 된다면 분명히 우위를 차지할 수 있어보였다.
나는 멀어지고 있는 노인장에게 다가가며, 품에서 은화 한 장을 더 꺼내어 손에 쥐었다.
쥐는 은화의 감촉이 은은히 차가웠다.
노인장은 다가서는 나를 눈치채고서 등을 돌렸다.
"이 마을에 좀 잘 곳이 있겠습니까? 아내와 함께 쉴 곳이 있었으면 합니다만."
"…오랜만에 아들 내외가 돌아왔구만."
노인은 내가 건네는 은화를 받아들자마자 그렇게 누구도 속지 않을 거짓말을 하더니, 나와 겨울의 신부를 이끌어 제 집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아버지이신가요?"
"아뇨, 그냥 개소리 하는 거예요."
겨울의 신부가 노인장의 말에 혼란스러워 하긴 했지만, 시선을 피해 쉴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쁠 건 없다고 여겼는지 곧 조용히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