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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화 〉성유물 (159/274)



〈 159화 〉성유물

아니, 씨발. 나는 분명 다크 판타지 게임을 샀었는데?

물론 이 말을 하기엔 무척이나 늦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꼬라지만 보더라도 게임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적정선이란 게 있지 않나. 나는 대충 허풍 섞인 소문이고, 실제 맹주는 전신 갑주를 두르고 격투를 하는 또라이인줄만 알고 있었단 말이다.

당황감과 어이없음, 아려오는 골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푹 내쉬자, 맹주가 털털하게 웃었다.


"다들 그렇게 반응하더군. 나라도 그랬을 걸세."


"…그래, 안 그러면 씨발 이상한 새끼겠지."


판타지 주민들에게는 상식을 부수는 문화 충격을, 나한테는 이게 도대체 뭔가 하는 반응을 만들어 낸 장본인은 내게 시선…인지 모를 움직임을 보낸 후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응을 보니 바깥에서도 아직  위명은 널리 퍼져있는 모양이군. 참으로 다행이야."

이 새끼 여유로운 거 봐라. 나는 투구 위로 짚은 손을 떼내며 마찬가지로 그 앞에 주저앉았다.아래에서 바글대는 인간형 괴물 새끼들은 떠날 생각이 없는지 건물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이제 저 새끼들은 신경 안 써도 되겠지. 건물 아래에서 눈을 떼내어 장검 연맹의 맹주를 바라보았다.

과연, 맹주는 기계임에도 불구하고격투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방금 전 전투에서 맹주는 단순한 기계의 뛰어난 기능을 활용하는 면모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움직임을 구사해 하이킥이나 주먹, 회피나 흘려내기 등 복잡하고 인간 기준으로는 실리적이나 기계 기준으로는 그렇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줬다.

몸뚱이가 강철인데다 격투까지   알고, 이성과 지성이 있으니 자신을 한 자루의  벼린 장검이라고 칭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스스로 납득하고 있자니, 맹주는 슬쩍 손으로 지면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보다시피, 저 이상한 이들은 이 도시의 주민일세. 헌데, 자네가 싸우는 모습을 보니 통찰력 역시 꽤 좋지 않을까 하네만,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건 없는가?"

뭐야 씨발.


갑자기 얘기하는가 싶더니 질문을 던지길래, '느금마'라고 대답해주려다 말고 생각해봤다.

뭐가이상했지? 투구 위로 턱을 짚고 생각해봤다. 저 좀비들을 만나고 나서 눈치챈 이상한 점은 아닐 것이다. 그거라면 내가 눈치채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테니.

고민하는 내 모습에 겨울의 신부는 주저앉은 채로 내게 고개를 향하고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흘긋 살피니, 그제야 뭔가 떠올랐다.


"…여기 주민들은 죄다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던데, 저게 주민이라고?"


뭔가 이상했다. 저런… 좀비 같은 새끼가 되었다면 오히려 도시 전역을 어지럽히고 더럽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장에 고개를 떨궈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괴물들이 벽을 긁어대느라 주변을 더럽히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는 깨끗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한 순간 사라진 것처럼 주거지 내부의 가구나 도구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기까지 했다.

저깟 좀비로 바뀌는 과정이 있었다면, 존나 개판이 되어있어야 하지 않나?

다행히 맹주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자네 생각이 맞네. 실제로도 증발한 것처럼 한 순간에 사라졌겠지."

증발이 판타지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지식인지는 모르겠으나, 눈 앞의 아이언맨이 로봇인  감안하면 그래도 이상하지 않았다.

토니 스타크는 말했다.


"저들은 내가 이 도시에서 기동하기 전부터 저런 말로를 맞이해 있었다네. 안타까운 일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악신 둘이 벌이는 소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


악신?


내 의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 후로 나는 지식과 상황을 수집하며 이 도시를 떠돌아다녔네. 그 결과, 나는 이 도시의 문이 열려선 안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문을 걸어잠궜다네. 보안 알고리즘을 재정의하여 침입자를 요격하고 경고하는 시스템을… 아, 이해하기 힘들겠군."


뭐가.


지구인의 지식 수준을 전혀 모르는지,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한참간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됐고, 계속해봐."

"음흠, 알겠네. 나는 이 도시를 빠져나와, 저 불쌍한 망자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대륙을 유랑하기 시작했다네."


그거 존나 재밌어뵈는데.

만약 게임이라면 전통 JRPG일 것 같은 느낌의 이야기였다.

"그 과정에서 전쟁에 가담해 내 명성을 드높이기도 하고, 수많은 모험을 하기도 했다네. 하지만 결국 찾아낼 수 있던  없었고, 나는 어울리지도 않는 맹주 역할을 떠맡게 되었지. 맹주의 권력으로 찾아봤음에도 희생이 너무도 많이 나와 생각할 수도 없는 방법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방안은 없었다네."

나는  말에 담긴 불안감에서  괴물딱지들이꽤 센 편인갑다 하고 짐작했다.


"하지만 내 사명은 맹주가 아닌  망자들의 구원과 제거. 나는 맹주 자리에서 물러나 세상을 떠돌아다녔다네. 내가 찾지 못한, 어떤 기발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없었다네. 뚜렷한 해결책은 없었지."


"그래서, 저게 뭔데?"

내가 손가락으로 괴물딱지들을 가리키자, 맹주는 잠시 꾸물대다 대답했다.

"저들은… 봄의 순례자와 겨울의 폭군이 만들어낸 개조인간일세. 메워지지 않는 무한한 허기와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인간의 골육을 자연스럽게 탐하는 성정과 지워진 이성, 그 이성으로 인해 떠밀리는 폭발적인 폭력성을 갖춘 존재지."


오… 그거 존나 좀비 같은데.


내가 흥미로워 하는 기색을 흘리자 그는 덧붙였다.


"거기에 자신의 성질을 자신이 죽인 이들에게 전염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네. 아마 봄의 순례자와 겨울의 폭군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권능이겠지."

그거 씨발 존나… 좀비 맞는데?


내가 유감스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자, 판타지 좀비들은 과격하게 몸을 벽에 부딪히며 나를 향해 날아오고 싶은 것처럼 애쓰고 있었다.

아, 근데 좀비라면 혹시.

"저거, 머리 안 부수면 안 죽나? 멈추지도 않고?"

"음,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겠지만 맞다네. 아주 대단한 통찰력을 갖고 있군."

이런 씨발.

진짜 좀비였네.

저건 세상 밖으로 나오면 이 나름 즐길만한 판타지 세상을 씹창으로 만들게 뻔했다. 씁쓸하게 투구를 쓸어대니,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줘서고맙네. 방금  공격했던 것도 사과하고 싶군. 불청객인 줄 알고 때려눕혀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었다네. 내 무례를 용서해주게."

그거 아무리 봐도 일반인이맞으면 대가리 박살나는 그거였는데?


맨 처음 날렸던 하이킥을 떠올리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맹주는 다행이라며 웃는 소리를 흘렸다.

"나에게도 도시 방위 기능이 적용되긴 하는지라, 침입자를 보면 무심결에 공격성이 끓어오르는 모양일세. 미안허이."

"그래 뭐… 그렇다고 치고…."

말을 끊으며 맹주를 살펴보니, 맹주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 반가운 건지 꽤 싹싹한 것… 같았다. 세세한 반응은 얼굴 표정도 뭣도 없는 양반이라 모르겠고.

그리고 그런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맹주가 멋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나는 저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네. 만약 그리 된다면 도시, 마을, 요새부터 국가 하나까지는 가볍게 초토화될 걸세. 으음, 장담하건데 그리 되는데 1년도 걸리지 않겠지."

좀비물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보는  아니라서, 나는 저 말이 꽤 사실이라고 짐작할  있었다.

맹주는 어쨌거나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기계들은 저들을 주민으로 판단하는지 공격하지 않는다네. 저들도 기계가 해가 되지 않는데다 자신들이 먹을 수 없다는 걸 아는지 건드리지 않지. 그런데 갑자기 보안 경보가 울리고 내 동포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가길래 침입자가 들어온  알았다네."

그렇게 말한 맹주는 이제는 나를 마주보듯 바로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기계음이 섞인 청년의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네. 자네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질문에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

어디까지 설명해도 되고, 어디부터는 설명하기 애매한가.


그걸 판단할 겨를이 내게는 없었다. 솔직히  입장에서는 전부  판타지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렇다고 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아예 빼놓고 설명하기엔, 너무 전후 사정이 비어버린다.


그래서 내가 택한 건, 전부 설명하는 것이었다.

과연 내용이 혼란스러운지,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맹주는  모든 말이 끝난 후에 침음성을 흘리고, 머리를 긁었다.

참으로 인간적인 습관이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오래 부대낀 티가 나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맹주가 내게 물었다.

"내가 바로 이해한 게 맞는지 한 번 정리해보세. 자네는 반신이고, 이 도시에 성유물을 회수하러 왔으며, 바깥에는 악신을 섬기는 이들이 그 성유물을 마찬가지로 노리고 있고, 악신들은  성유물로 신을만들어내고 있다… 자네는 그걸 막기 위해 이러고 있다. 맞는가?"

오, 이 새끼 정리 잘해.

고개를 끄덕이자 맹주는 곤란한지 침음성을 흘렸다.

"지금 당장 유적 밖에도 있거든? 그게 언제 들어닥칠지는 모르겠는데, 언제든 밀려와도 이상하지 않지."


"…헌데, 그들이 들어닥쳐도 별 문제는 없네. 나야 저 망자들에게 적대되지 않으니 조심스럽게 문만 닫으면 문제 될 건 없지 않겠는가? 저들이 성유물까지 도달할 일은 없을 걸세. 악신 본인이 오는 게 아닌 이상에야."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쳐맞는 말이었다. 아마 내어주기 싫은 본능적인, 보안 알고리즘이니 뭐니 했던 그런 것의 작용으로 인해 빼는 거 같은데.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에게 축객령을 내리는 것이 가슴 아프나,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다네. 자네들에게 성유물을 건네줄 수는 없다네. 그건 여기에 머물러야 해."


그렇게 대답하며 일어서려는 아이언맨에게, 나는 핑거스냅으로 주의를 끌어왔다. 손가락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울린 금속성에, 맹주가 멈칫했다.

"그래, 돌아가는  좋지. 원래 있어야할 물건이  자리에 있는 것도 참 좋고. 근데 말이야, 내가 만약 여기서 돌아가고,  바깥에 있는 침입자들이 좀비한테 씨가 말라버린다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될걸?  놈들이 섬기는 놈들 중엔 봄의 순례자가 있어. 그리고 봄의 순례자는 자기 피조물이 가득한 유적에서 돌아오지 않는 병력을 보고 눈치챌 거야. 그러면  음침한 새끼가 직접  자리에 찾아오게 되겠지. 그때, 네 힘으로 성유물을 지킬 수 있어?"

좀비를 싹 다 치워버리고 안식을 선사한다는 목적은 달성하겠지만, 본인의 목숨과 함께 성유물의 신성도 헌납하는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맹주도 듣는 즉시 알았는지, 맹주는 어정쩡하게 기립한 채로 곤란해 했다.


쐐기를 박아야 하나. 한숨을 내쉬며 말하려는 찰나, 맹주가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아. 성유물을 내어준다는 사실에  본능이 제동을 걸었나 봐."


맹주는 그렇게 기계음을 내더니 몸을 돌려 도로 내 앞에 주저앉았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 앉은 맹주가, 인공적인 한숨 소리를 내뱉었다.


"꺼림칙하고, 나 역시 성유물을 쉽게 내어준다는  내 사명감과 본능을 상당히 자극하긴 하나, 자네 말대로 악신들에게 넘겨주는 것보단 자네에게 넘겨주는 게 낫겠지. 암, 그렇겠지."

맹주는 의외로 간단히 설득되었다. 한 때 연맹의 수장 자리에 있던 경험이 도움이 된 건지, 아니면 로봇이라서 냉철한 이성을 갖췄기 때문인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다독이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약조 하나만 해주게. 만약 자네가 성유물을 회수한다면, 여기에 있는 망자들을 해치우는 걸 도와주게. 자네는 반신이라지 않았나."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았다. 당장에 화신 강림만 써도 어지간하면 정리될테고. 당장 쓰면 나를 제외하고 겨울의 신부를 비롯한 모두가 구워져서 쓰지 못할 뿐, 그녀의 안전만 확보된다면 쓰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맹주는 그에 웃는 소리를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거래는 성사됐네. 내가 자네를 성유물이 있는, 신성구획의 최심부까지 안내하겠네."

일어선 맹주는, 어쩐지 후련해보이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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