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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화 〉성유물 (160/274)



〈 160화 〉성유물

"…허나, 신성 구획으로 가기 전에 가야할 곳이 있다네."

그게 뭔데. 나는 금방이라도 뛰어가기 위해 겨울의 신부를 안아들려던 동작 그대로 멈춰섰다.


그런 내 어정쩡한 동작에도 겨울의 신부는 내 목덜미에 두른 팔을 풀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내 행동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이언맨이 내 모습에 말을 이었다.

"보안을 끄고 가야한다네. 그러니 우선 보안실에 들리도록 하지."

보안실이 따로 있구나. 여기 근무 환경 좋네. 그따위 생각을 하면서 겨울의 신부를 안아들어 엉덩이에 손을 걸치고, 등에 팔을 걸쳤다. 내게 안긴 겨울의 신부가 조용히 제 몸을 내게 떠맡겼다.

"그거 그냥 무시해도 되는 거 아닌가? 걍 가도 별 문제는 없어뵈는데."

"그렇지도 않을 걸세. 깊숙히 들어갈 수록 망자들의 공격성은 강해지고, 보안 개체들의 강함도 늘어나지. 화력도 올라갈 걸세. 자네가 얼마나 실력에 자신이 있든, 망자와 내 동포들을 동시에 상대하며나아가긴 힘들 걸세."


흠, 확실히.

나 혼자였다면 좆까라고 하고 저 새끼 멱살 붙잡고 존나 뛰어가면 될 것 같았는데, 겨울의 신부가 있는데다 눈 앞의 저 토니 스타크도 데리고 가야한다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그랬다.

게다가 나 역시 무적은 아니었다. 아무리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능력을 가지게 됐다고 한들, 결국 나도 인간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머리에 그 투포환 같은 걸 잘못 맞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안내해."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슬쩍 끌어내렸다. 그 아래에는 판타지 좀비들이 드글거리면서 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러지. 최대한 옥상에서 옥상으로 다닐테니, 잘 따라오게."


그렇게 말한 맹주는 곧장 몸을 날렸다. 어떤 구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맹주는 옥상 끝에 걸쳐진 다리를 튕겨내어 반대쪽 옥상으로 건너갔다. 정확히 착지하고는 곧장 다음 옥상을 향해 달려나갔다.

나는 아래에 있는 좀비들이 아직 내 밑에서 드글대는 걸 보고서는, 곧장 맹주를 뒤따라 바닥을 박찼다.


후우우웅!


바람이 내 귓전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겨울의 신부를 안아든 채로 건너편 옥상에 착지했다. 힘이 과하면 쏘아져 아주 멀리 날아갈 수도 있었으니, 나는 최대한 힘을 조절해가면서 이동해야 했다.


곧장 내가 움직이는 궤적을 보며 달려와 내가 올라선 건물을 두들겨대는 좀비들. 그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고, 나는 맹주를 뒤따라 다시금 몸을 날렸다.

내가 몸을 날려 옥상에 도착하면, 좀비들이 그 아래에서 뒤따라 움직인다. 도착하고 멈춰서있으면 아우성치며 건물을 두들긴다.

심지어 좀비들의 수는 늘어있었다. 아직 건물에 데미지가 가해지거나 기어올라올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 수는 착실하게 불어나고 있었다.


이거, 보안실이 1층에 있으면 강제 좀비 디펜스 되는  아닌가 몰라. 아직은 괜찮아보이니 여유롭게 생각하며 다시 바닥을 박차고, 옥상에 내려앉은 후에 겨울의 신부를 내려다봤다.


"어떻게, 좀 괜찮으세요? 멀미 나신다던가."

"괜찮아요. 당신께서 단단히 잡아주고 계셔서, 조금의 흔들림도 느끼지 않고 있어요."

그건  무리수 같은데. 그녀는 내 목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물었다.

"저 사람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사람들? 저게 어딜 봐서 사람이야.

싶긴 했지만, 겨울의 신부에게 굳이 꾸중하거나 걸고 넘어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눈이 안 보이는 그녀한테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었고.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맹주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겨울님이랑 저기 강철 친구 적당히 안전한 곳으로 보내거나 내보내거나 하면, 제쪽으로 몰리게 만들어서 화신 강림이라도 쓸까 해요. 그 뭐냐, 이상한 소리 나다가 불 터지는  있잖아요."


그녀는 내 조악한 설명에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이 위아래로 출렁이더니, 그 아래에 숨은 그녀의 얼굴 위로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만약, 여의치 않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어, 글쎄.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그거 외에 이렇다할 계획을 짜두진 않았으니까. 솔직히 몇마리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도 꽤 크게 작용했다.


겨울의 신부는 침묵하는 내 목을 껴안은 채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만약, 당신께서 어찌할 수 없을만큼 몰린다면, 저나 맹주님을 신경 쓰지 않고 그 권능을 사용해주세요."

뭐?


뛰어넘으려 몸을 숙이다가, 그대로 멈춰서 겨울의 신부를 내려다봤다. 베일을 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부군께서 대의를 위하실 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원치 않아요."

그러니까,  함께 죽여버리라는 얘기가 아닌가.


나는 화염 저항을 두르고 있으니 다소 멀쩡하겠지만, 휘말리는 것들은 멀쩡할리가 없었다.


기특한 말이었다.


하지만 별로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치우친 우선순위가 내 가슴팍 한 켠을 어지럽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체한듯 답답해지는 속을  누르며, 나는 겨울의 신부에게 말했다.

"참 기특하긴 하지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그녀는 내 험악해진 말씨에 흠칫했다가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좁혔다.

"어떻게 잘 희생할지를 생각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어떻게 하면 함께 있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세요. 저는 누가 희생한다고 하는  되게 싫어하니까."

애초에 희생을 좋아하는 놈이 어디에 있겠냐만은, 그녀는 내 말에 담긴 험악함보다는  뜻에 주안점을 두는지 경직되었던 팔을 풀어 내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밀착한 그녀의 머리에서 얕은 호흡이 느껴졌다.

"…그래도, 당신께서 당신의 육신과 저의 목숨 중에서 저울질 해야하는 때가 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살아주세요. 당신께서 없는 세상은 제게 어떤 가치도 없어요."


아,  여자가 진짜.

뭔가 희미한 기시감이 드는 말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뛰어올랐다.

짧은 활공이 지나 내려앉은 옥상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눈 앞에 보이는 건물들의 숫자가 줄어가고 있었다.

뛰어오르기엔멀고, 좁은 옥상에서 맹주를 돌아보니, 그는 작게 나있는 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좋아, 조금  말할  있겠네. 확실히 해두자 싶어 목을 가다듬고는 겨울의 신부를 내려주며 말했다.


"그런 선택지를 주는 놈이 있으면, 제가  새끼 패버릴 거예요. 그리고 겨울님도 살리고 저도 삽니다."

그녀는 내 제 3의 선택지에 잠시간 조용하더니, 손을 뻗어  투구를 잡더니 얼굴을 가져와 작게 속삭였다.

"…네에, 당신께서는 그러실 것 같아요. 부디 그러실  있었으면 좋겠어요."

겨울의 신부는 그러더니 다시 침묵했다. 나는 그녀의 묵상을 느끼며 희미하게 붉은등이 점등하고 있는 보안실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보안실은 어쩐지 현대적인 군사지휘실, 그런  떠올리게 하는 방이었다.

거기에 판타지적 감성을 적당히 섞은 듯한, 오묘한 짬뽕이었다.


제일 앞에 띄워져있는 거대한 스크린에 초록빛이 감도는 글자들이 빠르게 떠오르다 사라지고, 그 앞에 뻗어있는 몇 개의 컴퓨터 비스무리한 무언가에서 글자가 점멸했다.

씨발, 아무래도 세계관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그따위 생각을 하면서 맹주를 찾으니, 맹주는 이미 어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금속 손가락이 몇 개의 명령을 띄워내고 빠르게 거두고 있었다.


"어서오게. 먼저 좀 건드리고 있었다네. 지금 보안프로토콜 종료를 개시하고 있으나, 시간이  걸리니 기다려주게."

나는 좆도 몰라서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짐작조차 할  없었지만, 안 풀리는 것 같아보이진 않았다.

맹주는 일견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무언가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럼 좀 건드려봐도 될까?"


"아, 안될 것 없지. 다루는법은 알고 있는가?"

맹주는 자판을 한창 두드리면서 내게 말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지구인 출신에 진성 겜덕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나오는 반응인 것 같았다.

하기야, 누가 판타지에서 컴퓨터 다룰  알겠어. 나는 맹주의 말을 무시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문득 고개를 돌려 슬쩍 살피니 겨울의 신부는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지 조용히  옆에 서서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럼 어디….

화면에 떠올라있는 글자들은 내가 읽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유적지에서 적혀있는 상형문자들도 번역해주는 창조신의 권능인 번역기가  머릿 속에 깃들어 있는데, 이따위 문자열은 내 방해도 되지 않는 듯 했다.


나는 띄워진 검은 화면을 보며 자판을 두들겼다.

[서버에 접근 중….]


[접속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명령어 입력]


[기록 열람]

오, 존나 뭔지 모르겠어.


어떻게 쓰는지나 물어볼걸.

솔직히 간단한 게임이라도 깔려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잡은 거였으나, 생각 이상으로 화면은 지루했다. 나오려는 하품을 억누르며 자판을 눌러 기록 열람을 띄웠다.


"아, 기록을 열람하고 있나 보군.  역시 그 기록으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네. 대부분은 손상되었지만, 그 기록 중에서는 봄의 순례자 본인이 작성한 일지가 있어 저 망자들을 그들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네."

뭐야, 어떻게 알았지. 맹주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가 일지를 띄워냈음을 알아채고는 살갑게 말을 건넸다.

나는 띄워진 일지들을 눈으로 훑었다.


 많았지만, 확실히 가장 아래에있는 몇 개는 손상되었는지 제목에서부터 깨져있었다.


"저 좀비… 그러니까 망자들 왜 만들었는지, 그런 건 모르냐?"


"애석하게도 내가 읽은 부분엔 없더군. 손상된 기록에 있지 않을까 하고 있다네."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애석하게 기록을 바라봤다. 일단은 띄워봐야지. 혹시 모르지 않나, 갑자기 멀쩡하게 출력될지.

나는 내 운을 믿으며 손상된 것 중 가장 아래의 기록을 띄워냈고, 예상대로 깨져나간 문자열이 내 눈 앞을 어른거리자 다시 입맛을 다셨다.

"옘병."


혹시나 뭔가 알아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애석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일지를 닫으려던 찰나, 갑자기 글자가 꾸물텅대기 시작했다.


"어, 뭐여."

그렇게 꾸물대던 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변했다. 완전히 변해서, 읽을  있는 글자가 되었다.

손상도 번역이 된다고? 개쩌네. 감탄하며 번역된 일지로 눈을 돌렸다.

[신성에 적응하기 시작한지 이제 100년이 되었다. 아직 신성은 내 몸에 익숙치 않고, 다른 이들 역시 그러하지만 뜻밖의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오히려, 이 추세라면 얼마지나지 않아 권역을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어보인다.]


4신의 일지인가? 턱을 쓸며  일지를 바라보는데, 자판을 눌러 글을 내리는 족족 깨진 문자들이 나타났다가 빠르게 변해갔다.

[나와 겨울의 폭군은 그러던 중 한 가지 흥미로운 가설을 떠올렸다. 애초에 모두 창조신의 권역이었던 영역들, 어쩌면 섞을  있지 않을지. 권역간 엮이고 섞여,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낼 수 없을지. 그래서 나는 내 주된 권역인 초월과 합일을, 폭군은 종말과 죽음을 섞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실험을 시작했다.]

…초월과 합일?

봄의 순례자의 일지인 모양이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단적으로 말하노라면, 섞이진 않았다. 오히려 내 영역과 폭군의 영역은 합치되지 않아 충돌했고, 충돌한 결과 예상을 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실험체였던 인간들은 무한한 허기를 넘어 신성을 무한히 갈망하고 신성을 쫓아다니는 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권역이 충돌하며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인지, 나의 명령은 물론이고 폭군의 명 역시 듣지 않게 되었다. 어찌 이런 결과가 만들어졌는지는 흥미로웠으나, 실험은 실패다.]

그렇게 길게 이어진 전후사정은, 얼마 길지 않은 결론으로 끝나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떠나면, 성유물에 집착하게 되겠지만 상관 없다. 저 성유물에 우리가 다가갈 일도 없거니와, 우리는  성유물이 필요 없으니. 그저의도치 않은 경비를 두게 된 것이라고 여기자. 나는 조만간 새로운 대륙을 찾을 생각이다. 기대되는군.]

아, 이 미친 매드사이언티스트 새끼.

지가 똥을 쌌으면 자기 손으로 치울 것이지, 그냥 방치해두고 가버리네.

하지만 꽤 여러가지 의문이 풀리는 일지였다.


얼마나 오래된 일지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협력했는지 왜 저딴 걸 만들어낸 건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키며 일지를 종료하고 의자를 뒤로 물렸다가 붉은등이 갑자기 확 꺼지더니 백열등 같은 흰 빛으로 바뀌어 비추어지는 것을 보았다.


"뭐여."


근데 개뜬금 없네. 정전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그간 컴퓨터 앞에 얌전히 앉아있던 토니 스타크가 일어났다.

"보안 프로토콜을 해체했네. 이제 신성 구획으로 가면 된다네."


맹주는 그렇게 말하더니 앞장서서 우리가 들어왔던 곳의 정반대인 내려가는 계단으로 달려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겨울의 신부의 손을 붙잡고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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