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이단심문관
"…그러실 필요없습니다."
내가 씹어뱉은 말에 대답한 건, 노인네들이나 겨울의 신부, 맹주가 아니었다. 그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으나, 어쩐지 목소리에 활력이 감도는 여성.
붉고 웨이브 진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서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성녀 에일렌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몸을 얹어놓은 채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얼굴과 몸 대부분에 붕대가 둘러져 있었으나, 은은히 피비린내가 나는 메이와는 달리 그녀는 다소멀쩡해보였다.
"…그런 표정을 짓지 않으셔도, 착실히 전부 설명해드릴 겁니다. 그리고 오해하고 계시는 것도 있을테죠."
언뜻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눈만 슬쩍 돌려 유리창에 반사된 내 표정을 보았다.
확실히 나 빡쳤소 하고 만천하에 알리는 표정이었다.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하고, 성녀에게 다가섰다. 나를 막아세우려는 건지 내게 다가오려던 늙은이들은 길을 가로막는 맹주에게 막혀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다가서자, 성녀는 제 얼굴에 둘러진 붕대를 풀어내고 있었다.
"…설명, 잘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내 으르렁거림에도, 성녀는 기죽는 모습 없이 천천히 붕대를 풀었다.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바로 옆에 누워있는 메이의 가슴팍이 흘러나온 피로 언뜻 붉은빛을 띄는 것과 달리, 붕대는 깨끗했다.
씨발, 메이를 프렌드 쉴드로 썼나?
치미는 욕지기에 주먹을 쥐자 성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제 몸을 두른 붕대도 풀어냈다.
삽시간에 젖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드러난 가슴팍에는, 뭔지 알 수 없는 빛이 새어나오는 구멍이 눈에 띄었다.
구멍이라고 말하기도 모호한 게, 정확히는 가슴 정중앙의 새겨진 듯한 칼집 같은 것에서 그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재생이 덜 됐군요."
"…재생?"
내 의문 섞인 목소리에 그녀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드러난 유두를 셔츠를 잠금으로써 가렸다.
"예, 설명해드릴테니, 그 주먹은 풀지 않으시겠습니까? 생각하시던 것처럼 메이님이 싸우게 두고서 도망을 쳤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흠.
확실히, 그녀의 가슴 정중앙에 새겨져 있던 칼집은 인위적인 흔적이었다. 피가 흘러나오지 않을 뿐, 빛은 새어나오고 있었는데다 그 흔적은 도검류로 새긴 것 같아보였으니.
침대에 걸터앉으니, 성녀는 그 성숙한 얼굴로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우선… 어디부터 설명해드릴까요. 제가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재생했는지? 아니면 어찌 재생할 일이 있었는지?"
"재생을 어떻게 하는지부터 해주시죠."
그녀의 말을 들으며 옆 침대에 누워있는 메이를 바라보니, 메이는 겨울의 신부가 먹인 물약과 약재들 때문인지 한결 안색이 좋아져 있었다.
과연, 겨울의 신부의 치유 능력은 상당했다. 언제든 믿을 수 있지.
"우선… 저희 성인들에 대해서 알려드려야 할테죠."
성인?
Adult는 아닐테고, Saint의 성인인가?
고개를 끄덕여 계속하길 허하자, 성녀는 침대 뒤에 딱 붙어있는 벽에 몸을 기대며 으음, 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맹주에게 향했으나, 내 동료라고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그녀가 내뱉기 시작한 내용은, 나로서는 꽤나 친숙하면서도 굉장히 뭣 같은 문화였다.
게임이나 만화 등지에서 흔히 나올 법한, 물려져 내려오는 인공 심장이라니.
그것도 신성을 담고 있는?
그게 재생력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얼추 납득은 되었다.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들이나 준신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걸 갖고 있지 않은 준신들도 나름 뛰어난 회복력을 보여주었으니.
내가 납득한 듯 보이니, 그녀는 죄책감이 물씬 느껴지는 눈빛으로 메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다쳤었는지 설명 좀 해주시죠."
침착을 가장하며 물으니, 그녀는 제 손을 깍지 껴 잡고는 제 아랫배 위에 올렸다.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늘씬하게 뻗어진 다리가 꿈틀대더니 그녀는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선, 이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뛰쳐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런다고 치고, 말이나 하세요.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으니까."
안 그래도 얼마 전 스마트한 방법이고 뭐고를 포기한 참이다. 내 인내심은 그야말로 종잇장에 가까웠다.
성녀는 그런 내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텨봐야 얻는 건 없겠네요. 신의 종인 저희들이 어찌 거부하겠어요."
갑을관계를 명확히 파악한 그녀의 말은 즉시 이어졌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단이 나타났습니다. 언제부터 이단이었는지, 앞으로 몇명이 남았는지 파악하진 못했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단이었습니다."
웬 이단.
그냥 악신을 섬기는 이들을 말하는 건가 싶어서 턱을 쓸면서 몸을 비스듬히 침대에 얹었다.
"평시의 이단은 단지 악신을 섬길 뿐인 이교도에 불과했죠. 아니면 잘못된 교리를 따르는 이들이거나요. 하지만 이번 이단은 달랐습니다. 이번 이단은 명확하게 성유물을 노리고 왔었죠."
성유물. 그 말에 그녀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던 칼집을 떠올렸다.
"혹시."
"예, 그 혹시예요. 그 이단들은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능력과 무기를 이용해 성전사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제 심장과 석실에 보관 중인 성유물을 탈취하려고 했죠. 다행히 성전사들이 쓰러지는 순간에도… 메이님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덤벼오는 이단 무리의 대부분을 일소하는 결과를 낳았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명확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메이를 향하는, 짙고 깊은 신뢰가. 제 목숨을 구해준 메이에 대한 감사함이 특히나 짙었다.
…조금 끈적한 것 같기도 한데.
"놀라운 일이었어요. 저작은 몸으로 칼을, 방패를, 마법을 사용해 이단들을 해치우는 모습은 가히 성인의 반열에 들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더군요. 대부분의 이단은 전력에서 밀린다고 판단했는지 모습을 감추고 도망쳤습니다."
장하다, 메이.
손을 뻗어 메이의 이마를 쓸어주니, 성녀는 이어서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단신으로 저를 완벽히 보호해내기는 무리가 있었어요. 결국 저는 몇번의 공격을 허용해 완전히 망가진 육신으로 살기 위해 가슴팍과 머리를 겨우 감싸야했고, 메이님은 그런 저를 보호하려다 가슴에 상처를 입고 말았죠. 흉은 남지 않을 정도였지만, 피를 흘리는 몸으로 싸우다 보니 실신하셨어요."
혈액 부족으로 인한 기절이라. 좋은 단어는 아니라 내가 인상을 찌푸리니, 성녀가 나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내 어깨를 짚었다.
"어제도 깨어나 식사를 하시고 잠에 드셨으니, 조만간 깨어나실 거예요."
그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메이가 죽는다면 나는 굉장히 빡칠 것 같았으니까.
괜히 메이의 북슬북슬한 앞머리를 매만져 정돈해주니, 메이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겠지만.
"그래서, 그 이단들은 뭐였습니까?"
"그들은… 봄의 순례자를 섬기는 이들처럼 보였습니다. 본래는 저희 교인이던 이들도 있었는데, 마침 그 날 순찰과 초계를 맡도록 되어 있었던 이들도 남김 없이 가담했더군요."
그러니까, 내부자라 이거구만.
봄의 순례자가 건너온 게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자면, 그들은 입교할 때부터 숨은 이교도이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평범한 사제 출신 이교도에 용병들이라면, 메이가 패배할리가 없었다. 특히 성녀도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능력'이라고 표현했으니.
내 의문을 눈치챈 건지, 성녀가 말했다.
"그들의 몸에는 남김 없이 봄의 순례자가 남긴 씨앗이 발아해 있었어요. 전신에 검은 뿌리와 봄의 축복을 거느리고, 제 신체가 파괴되는 걸 불사하며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둘렀죠. 제 아무리 이단과 괴물 사냥에 뛰어난 성전사들이라고는 하지만, 무장이 덜 된 상태에서 독특한 무기들로 무장한 그들을 이길 수는 없었어요. 시체라도 멀쩡하면 다행일 정도였죠."
성녀는 그렇게 고하더니 멀뚱히 서있는 늙은이들에게 손짓했다.
원로들은 그 손짓에 아, 하는 탄성을 흘리더니 지나가는 사제를 붙들어 무언가를 속삭였고,그 사제는 빠르게 뛰어나갔다.
그 사제가 돌아왔을 때에는, 품에는독특한 무기가 안겨 있었다. 머리 부분이 독특하게 커다란 양날 도끼였다.
그 도끼를 품에 안고 우물쭈물하던 주근깨가 가득한 여사제가 내게 그 무기를 안겨주었다.
"…이건."
"아시겠나요?"
알다마다.
씨발, 신성이 흐르고 있잖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 무기 전체에는 신성이 감돌고 있었다.
거기에 만듦새 자체도 훌륭했다. 일류 대장장이 그 이상을 넘보는 인물이 만들어낸 듯, 그 무기는 아이템에도 견줄 수 있어보였다.
나는 그 도끼의 자루를 손에 쥐고는, 넓게 잡은 채 힘을 주어 양쪽에서 찍어눌렀다.
드 드 드 드 드 득!
나무로 된 자루는 그런 소리를 내면서 겨우 버티다, 뚝 부러지며 신성을 줄줄이 흘렸다.
확실했다. 이정도 내구성이라면, 아이템이었다.
나는 부러진 도끼를 바닥에 내던지고, 주근깨 가득한 소녀 여사제는 그걸 주워들어 총총 걸음으로 물러났다.
"신성도 있고, 물건 자체의 격도 높네요. 그것도 상당히."
파괴 불가로 보이는 내 방패와 파괴 불가가 걸려있는 거검, 도끼처럼그야말로 격이 다르다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기성품의 무기보다는 한참 좋아보였다.
적어도 적조 수준, 아니면 그 이상.
명확히 이상한 물건이었다.
"한 개가 다가 아니예요. 그 습격해온 이교도와 이단들은… 전원이 저런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어요. 처음부터제 물건이었던 것처럼, 맞춤 제작된 물건들이었죠."
게다가, 하고 말을 흘린 그녀가 내 팔을 붙들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의 육신은 잠시 흔들거렸으나 이내 균형을 되찾았다.
"성전사단의 생존자들이 말하길, 무기는 사용된 흔적이 없다고 해요. 정말 우수한 사람의 손에서 관리되었거나…."
"만든지 얼마 안됐겠군요."
"예, 그거예요."
자작이나 수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준신이 애용하는 애병들은 신성이 깃든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아이템에 준하는 수준까지 오르진 않겠지만, 나름 내구도는 오른다.
하지만 준신이 아닌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에 신성이 깃들어 있고, 갓 주조된 것 같으며, 전부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을 수준이라면.
"…누군가 만들어냈군요. 습격해서 성유물을 약탈해오기 위해서."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성녀는 선선히 대답하더니, 주변을 좀 둘러보다가 평범한 사제용 의복 같은 것을 몸에 둘렀다.
둘러진 의복은 그녀의 화려한 머리칼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갈색이었다.
"그리고 그 물건을 만들어낸 대장장이는, 분명히 몇 개 더 만들어낼 수 있을 거예요. 다음 기습을 성공시켜 성유물을 탈취하기 위해서라면 몇 개 더 만들어낼 수 있겠죠."
확실히 그랬다. 나라도 소모품으로 쓸 수 있는 이들에게 약간의 권능만 쓰고 무기만 쥐어줘서 목표를 이뤄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것 같았다.
왠지 씁쓸해지는 뒷맛에 입맛을 다시자,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대성당에는 이단이 숨어들어 있습니다.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희는 의인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두른 칙칙한 사제복을 너풀거리며 내게 걸어온 성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흉터 하나 없었다.
"저희를 도와서, 이단을 찾아주세요. 의인님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끼어들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교단의 역할은 나를 서포트해서 신을 죽이는데 도움을 주는 거지, 내가 얘네가 살아남도록 도움을 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쌕쌕 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메이를 보니,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나 주현성, 누가 내 것을 뺏어가려고 할 때에 참아본 기억이 없었다.
설령 있었더라도, 그건 양보였지 강탈당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씹새끼들은, 건드려선 안될 것을 건드렸다.
나는 뻗어지는 성녀의 손을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까짓거 해보죠. 이단색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