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1화 〉봄의 순례자 (171/274)



〈 171화 〉봄의 순례자

타오르는 모닥불에서는 불티가 튀기고, 둘러앉은 이들은 그 불티를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 있는 모두가 모닥불 앞에 모여있는 건 아니었으나, 모닥불의 열기는 멀리 뻗어있는 대형 천막까지 그 온기가 닿았다.

따스함에 멀찍이 천막에 누워있던 보병들이 노곤한 표정을 짓자, 모여앉은 고참들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서 뭔가 튀어올라 자신들을 삼킬까 두려운 듯, 경계하는 눈동자. 그에 맞게, 그들은 제각기  단련된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무기는 가지각색이었다. 활, 쇠뇌와 같은 간단한 원거리 무기가 있는가 하면, 기사를 낙마시키기 위한 기다란 폴암이나 대검을 쥔 이도 있었다.


개중에서는 평범하게 검과 방패를 빗겨찬 이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상석에 앉아 육포를 질겅대고 있는  어떤 남자였다. 40을 조금 넘긴 나이에, 도끼와 방패를 갖고 있는 남자.

그는 한참 육포를 질겅이다가 목청 너머로 겨우 넘기고서 가죽부대를 들이켰다. 안에 들어있던 포도주가 배를 채운다.

"대장."

"그래."

남자는  불만 없이 제 가죽부대를 넘겼다. 그에 그의 부하들은 제각기 가죽부대를 들이켜 목을 축였다. 금방이라도 피곤해 쓰러질 것만 같았던 몸뚱이에 활기가 맴돌았다.


포도주가 든 가죽부대를 한 모금씩 마시고, 마찬가지로 잘 말려진, 질기지만 먹을만한 육포를 나누어 받은 후, 용병들은 각각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아 속삭였다.


야음이 그들을 덮쳐올까 두려운 것처럼, 가장 바깥에 앉은 이들은 이따금씩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금세 지쳐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장, 어떻게 될 것 같아?"

가장 먼저 말을  것은, 허리춤에 메이스를 차고 등에는 활을 두른 용병이었다. 젊은 나이로 보이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좌중의 이목이 그에게 몰렸다.

대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도끼를 내려다보았다.

도끼에 비친 얼굴은 40대 남성의 늙고 추레해진 모습을 비추고 있었으나, 거기에는 이 땅에서 보기 드문 동안 중년 특유의 관리된 느낌이 풍기고 있었다.

"주현성 대장?"

도끼를 한참 내려다보던 중년은,두번째 질문이 던져지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글쎄, 높으신 분들 뜻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이번에도 칼밥 좀 먹어야 할 거라고 본다."


 말은 그들에게 각기 다른 감상을 안겨주었다. 전투를 숭배하는 이에게는 환희를, 금전을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계산을, 살고자 하지만 벗어나지 못한 이에게는 희미한 실망을.

 각각의 감정을 떠안은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도끼를 손 안에서 한 번 굴렸다.

도끼에는 독특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젠장, 또 전쟁이야? 빌어먹을…."

그에 젊은 남자가 탄식하며  얼굴을 쓸고, 그 옆에 앉아있던 노후한 전사가 픽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은근슬쩍 겁쟁이라고 읊조리지만, 젊은이는 차마 뭐라고 하진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며, 그것이 별명이기도 했으니까.


어쨌거나, 그런 짤막한 선언에 뒤따르는 소리는 꽤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물었다.

"성전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거라면 그냥 도시는 옮기는 게 어떨까 싶은데. 보수도 별로  주잖아."

맨 처음에 어떻게 될 거 같냐고 물었던 젊은이였다.

그는 금전을 밝혀 이 용병단에 들었으므로, 이런 보수도 얼마 되지 않지만 위험하기로는 세계를 뒤져봐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 의뢰를 받고 싶지 않았다.


물론 다른 이를 타박하던 중년 역시 그러했다. 그는 금전을 밝히진 않았으나, 금전도 해결하면서 명성도 쌓고, 뒷배 없이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용병을 하고 있었다.

제 부하를 보던 대장이 제 왼팔을 흘긋 보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선택할 길이 별로 없다고 본다.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제야 젊은 남자, 중년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용병단원이 그의 팔뚝을 보았다.


어떤 괴물에게 먹혀 잘렸지만, 어떤 신의 변덕으로 인해 기이한 형태로 다시 자라난 팔뚝을.


그 팔뚝은 검고, 맥할 때마다 꿈틀거렸다.

"그래, 대장이 봄의 대전사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나는 또  전장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 적어도 대장이 말해서 보수라도 올려달라고 해야할 거야. 아니면 난 떠날테고."


보통의 용병단이라면 만류하거나 협박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 어떤 협박보다 이 팔뚝을 보여주는 게 가장 효과가 좋기도 하고, 그 어떤 만류보다 그가 바라만 보는  잘 먹힌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지 않았다. 만류하거나 협박하기엔, 이 일은 충분히 힘들고 까다로웠다. 오히려 그는 제 턱을 쓸면서 고갯짓했다.

"갈 거면  같이 가라. 남을 놈은 남고."

담담한 이별 선언에도, 용병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드디어 때가 됐다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그 반응으로 분위기가 식고, 모닥불이 비추는 온기에도 싸늘한 감각이 피부를 스칠 무렵에, 누군가 모닥불에 장작을 쏟아넣었다.

"장작 가져왔어요, 당신."

가져온 장작들로 인해 모닥불이 커졌다. 화염이 두려운 중년은 슬쩍 물러났으나, 그다지 추위를 걱정하진 않았다. 풍만한 여체가 그의 옆에 앉았으므로.


용병들은 그 여성에게 잠시 눈길을 던졌다가 거두었다.


여성의 머리칼은 은백색으로 길었고, 눈을 곱게 감은 채 베일을 얼굴에 드리우고 있었다.

 여성이 제 머리칼을 대장의 어깨에 얹었다.

"고맙소. 언제나 신세를 지는군."

"아니예요. 당신을 보필하는 것만이  기쁨인 걸요."

기실 그녀가 가져온 장작이 꽤 많아서, 모닥불은 꽤 상당한 크기로 커졌다.


고참병들은 보초만 충분히 세우고, 텐트만 충분히 여민다면 밤에는 아무런 일도 없이 보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면서 흩어졌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천막으로 몸을 숨기는 와중에, 한 남성과 여인 명만이 모닥불 앞에 남았다.


중년은 여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고요히 모닥불을 바라봤다.


부디, 최대한 오래 살아남을 수 있기를.

남자는 바라면서 곁눈질했다.


남자의 시선 끄트머리엔, 이미 20년 넘게 보고 있는 메세지가 띄워져 있었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0/4]

[현재 회차: 1회차]


*

"…허억!"

씨발, 이게 무슨 꿈이야.

깨어나자마자 드는 생각은, 방금 꿈이 존나 요란하게도 사실적이라는 것이었다.


단순히 가짜라던가, 아니면 허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다.

무엇보다 도끼에 비친 내 얼굴, 그 얼굴은 내가 늙는다면 취할 모습을 정확히 모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늙진 않았고, 내겐 그런 용병 동료들이 없었다.


무엇 하나 나와 일치하는  없었지만, 뭔가 나와 겹칠 듯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식은땀이 흘러내려 뒷목을 적시고, 내 머리칼을 축축하게 만드는 와중에, 나는 손을 뻗어 마른세수를 했다.

"…애미 씨발…."

뭔 꿈을 꿔도 이딴 좆같은 꿈을 꾸냐.


 꿈은 마치, 내가 그 나이가 되도록 늙을 때까지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할 거라는 담담한 선언처럼 들렸다.


그게 무척이나, 사실적이면서 공포스러웠다.

만약 신들이 전부 도망치고, 숨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 사실이 강하게다가와  머리를 두드렸다.

끔찍한 사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얼굴을 쓸었다.


"…현성아?"

감은 눈 너머로, 누군가의 온기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는 이들 중, 나를 그렇게 부르는 이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어쩌다 잠들었는지 기억해냈다.

"…메이. 깨어난 거야?"

얼굴을 쓸던 손을 떼어, 눈을 뜨니 거기엔 메이가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었다.


안색은 좀 흐렸으나, 쇠약해보일  그 외의 문제는 없어보이는 메이가.

나는 아무래도 메이의 침대 앞에서 지켜보다 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응, 방금… 현성이 목소리 듣고…."

눈을 부비며 졸린 티를 내던 메이는,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침대에 폭 소리를 내며 잠겨들었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 몸을 일으키니 메이는 헤헤 웃었다.

"이러니까  예전 생각난다. 예전에는 현성이가 다쳐서 이랬는데… 오늘은 반대네."

"…아, 그때? 그러게. 정 반대네."


봄의 순례자의 개수작이 도져 땅따먹기를 직접 관람했을 때처럼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고는, 메이의 등에 손을 얹고 몸을 침대에 기대게 도와주었다.

침대에 앉은 메이는, 그 풍만한 가슴이 크게 움직이도록 심호흡했다.

"으, 좀 가슴 아프다."

"그렇게 아파?"


"응, 붕대가 눌러서 아파… 가슴 답답해…."

그거냐고. 픽 웃으며 손을 뻗어 머리를 쓸어대니, 메이는 생글생글 웃어대면서 얌전히 쓰다듬을 받았다.

억지로 웃긴 하지만, 가슴의 상처가 아예 안 쓰린  아닌지 메이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메이는  물음에, 살짝 울상을 지었다가 억지로 웃었다.


"으, 응.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새끼 거짓말 되게 못하네. 언짢은 표정을 지으니 메이는 뒤늦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 무리를 하고 그래. 내가 시켰다지만, 교단이든, 성녀든, 성유물이든. 너보다는  중요해."

메이는 내 말에 기쁜 건지, 약간 미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정 네 목숨이 위험해지면 도망쳐야지. 바보 같이…."

내 말에 메이는 잠시 고민하는  했다가, 씩 웃었다.

"그치만, 현성이가 믿고 맡긴 거니까.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게다가 게다가… 내가 만약 도망쳐서 성녀님이 죽고, 그 사람들이 신을 더 만들어내면… 현성이가  수도 있잖아. 힘들어질 수도 있고. 그래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

메이가 하는 말은, 평소의 귀여운 말씨에는 어울리지 않는 식견이 담겨있었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메이의 말에, 한숨이 나오면서도 좀 기뻤다.

우리 메이, 다 컸네. 괜히 메이에게 팔을 뻗어 안아주니, 메이는 당황한듯 눈을 크게 떴다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으히, 좋아. 좋아해."

"그래, 나도.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자기 몸을 좀 아껴. 나야 재생력이 있다지만, 너는 그런 거 없잖아."


"으응, 알겠어. 현성이 걱정  시킬게."

메이는 생글생글 웃는 말씨로 그렇게 대답하더니, 몇번  뺨에  뺨을 부볐다. 나는 메이의 스킨쉽을 즐기며 그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말캉한 감촉과 여체 특유의 달큰한 냄새가  풍기는 와중에, 메이가 멈칫했다.


"근데 현성아, 뭔가 안 좋은 일 있어? 혹시, 성유물 찾는 게 잘 안 풀린 거야?"

"아냐,  풀렸어. 성유물도 흡수했고. 더 강해졌지."

"…으음, 근데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있었지? 그치?"

얘 은근히 예리하네.

방금  꿈을 차마 얘기하기엔 뭣해서, 둘러대려고 하니 메이가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더니 뺨에 입맞췄다.

"여자친구인 나한테 털어놔. 내가 상담해줄게. 현성이도 나 많이도와주고, 내 말도  들어주니까…."


이런데서 보답이라니.


얘기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다지 메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털어놓기 힘들어 한숨을  내쉬니, 메이가 나를 끌어안은 팔을 움직여 등을 쓸어주었다.

풍만한 가슴에서 모성이라도 나오는 듯 했다.

"…뭐라고 해야하나… 이상한 꿈을 꿨거든.  모습인데, 내 모습은 아니었어."


"응응."


 물어보네.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 듣겠다는 것처럼, 메이는 계속해, 하고 속삭이고 강하게 나를 껴안았다.

"한 40대 되어보이더라고. 여전히 난 존나 잘생기긴 했는데… 팔도 한짝 없고, 그 팔 한짝이 봄의 순례자 권능처럼 검고, 심지어 봄의 대전사라더라. 거기까지면 모르겠는데… 왠지, 익숙했어. 그게 사실이었던 것처럼. 생동감도 넘치고, 현장감도 넘치고. 겨울님도 내 옆에 있었고. 왠지 너는 없었지만."


"…응."

메이도 예상했던 말이 아닌지 대답이 늦었다. 이 바보 짱깨는 그걸 무마하려는 것처럼 가슴을  셔츠 위로 꾹 눌렀다.


"거기에 1회차라고 뜨더라고. 지금 나는 2회차라고 뜨는데."

"…응?"

말하고보니 이상했다.


메이와 매칭되었던 세이브는, 분명 1회차 세이브였는데?

올클리어 하고 PvP용으로 파둔 캐릭터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2천시간 정도는 그걸로만 했으니.

근데 난 왜 2회차로 뜨는 거지?

슬쩍 눈을 내리니, 분명히 2회차라고 쓰여진 시스템 메세지가 눈에 보였다.


뭔가 많이 이상했다.


"어, 나, 나는 1회차라고 뜨는데?"

"…뭐?"

메이가 나를 껴안고 있던 팔을 놓고, 눈을 노골적으로 구석으로 향했다.

그 눈동자에 시스템 메세지가 비치지도, 메이가 보는 곳에 메이의 시스템 메세지가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메이는 다시 소리 높여 말했다.

"나는 1회차라고 떠.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1/4. 현재 회차 1회차…."

메이의 의아한 표정이 짙어지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낯빛을 굳혔다.


내 시야 한 구석에는, 명확하게 이렇게 쓰여있었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1/4]

[현재 회차: 2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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