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봄의 순례자
명백히 이상했다.
메이의 회차는 1회차, 나의 회차는 2회차. 이 선명한 숫자 차이는, 나와 메이의 세계가 같지 않으며, 같아서는 안된다는 걸 시사하고 있었다.
동시에 게임 시스템이 떠올랐다. 기본적으로는 싱글플레이 게임에 곁다리처럼 끼어있어, 난입의 형태로 이뤄지는 멀티플레이가. 그걸 떠올리니, 많은 것이 이상했다.
매복은 아니었다. 매복으로 들어온 플레이어는 몬스터나 NPC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월드의 오브젝트 같은 것을 부술 수는 있었지만, 그 외에 매복으로 들어온 플레이어가 해칠 수 있는 플레이어 뿐이었다.
그렇다고 협동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게임의 시스템을 곧이곧대로 들이대기엔 너무도 많은 것이 달랐다. 몇 번 나왔던 컷씬은 더 이상 나오지도 않았고, 보스 중 대부분은 방치하고 있음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최종보스일 4신이 멋대로 행동하는 건 또 어떤가?
막혀있던 둑이 뚫린 듯, 궁금증과 의문점이 쏟아져 나왔다.
그 의문점 사이에서 문득 든 추측은, 이 회차는 세계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인정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게임이 아닌 현실로 1회차를 겪은 듯 했다. 기억에도 없고, 실감도 없지만, 이따금씩 싸울 때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면 마냥 부정할 수도 없었다.
씨발, 내가 2회차라니. 기억 정도는 남겨줘야 뭐라도 대비하는 거 아닌가?
담담히 나의 좆됐음을 인정하니, 그제야 메이는 날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메이가 묻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나, 아무래도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아."
"…응, 솔직히 아니면 이상할 정도였어."
메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뺨을 문질렀는데, 문지르는 조막만한 손이 평소답지 않게 차가워서겨울의 신부를 떠올리게 했다.
1회차 내내 같이 다녔을 겨울의 신부. 아마 내가 중년이 되었을 때까지 함께했을 그녀.
먹먹해지는 가슴에 한숨을 내쉬니, 메이가 몸을 기울여 내 입술에 가벼이 키스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만들어진 거지?"
지금껏 내가 이 게임 속으로 들어온 원인을 메이가 사용했던 핵에서 찾았으나, 그렇지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들어왔었다면, 두번째 역시 내가 원인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씨발, 핵 썼다고 괴롭히지 말걸. 괜히 메이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죄책감이 살살 아려왔다.
"있잖아."
"어, 왜?"
메이가 침대에 걸터앉더니, 내 다리 위에 제 다리를 올리고는 말했다.
"회차 넘어갈 때, 어떻게 넘어가? 원리도 설명되어 있어?"
회차를 어찌 넘어가냐고?
나는 기억을 되짚어, 게임으로 이 세계의 1회차를 클리어한 후에 띄워졌었던 메세지를 떠올렸다. 그 메세지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겨울의 처녀 NPC한테… 새로운대화문인 '새로운 세계로 넘어간다'를 눌러서."
원리는 달리 몰랐다. 떠올려봐도 제작진이 그런 걸 설명했던 기억 같은 것은 없었다.
"그걸 누르면 게임이 새로 시작되어서 수용소에서 시작해. 원리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제작진이 그런 걸 설명했던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 대답에 메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려다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가슴팍에서 팔을 풀어내고서 슬쩍 지었던 울상을 서서히 풀었다.
"게임에서 회차가 높아지면 적이 강해지고, 패턴도 바뀌고, 아이템도 추가된댔지?"
"응, 그랬지."
"그럼, 아예 세계 자체가 변한다고도 볼 수 있겠네?"
그렇게 봐야하나? 어디를 중점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예 틀리다고는 할 수 없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메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손을 만지작 거리다 침대에 뻗었다.
기익, 하는 소리와 함께 메이의 침대가 구슬프게 울었다.
"너랑 나는 게임의 회차가 다르고…."
"어, 아냐. 내 게임도 1회차였어. PvP 하려면 필드를 다 뚫어두는 게 편리해서, 나는 1회차 클리어 세이브로 PvP를 돌렸어."
"…그럼 더 이상하지 않아? 현성이는 2회차라고 뜬다면서."
"그렇지."
하지만 나와 메이의 게임은 1회차였으며, 구태여 구분을 하자면 메이는 1회차 스토리 진행 중, 나는 1회차 클리어였다.
그럼 당연히 세계도 1회차여야 할 것이나, 세계는 2회차,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처럼 바뀌어 있었다.
서대륙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무대,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싸돌아다니는 신들, 그 신들이 꾸미는 음모.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솔직히 생각할만한 거리가 더 없었다. 여전히 사실들은 두루뭉실 했으나, 거기까지 추리해낼 수 있는 단서가 너무도 없었다. 넘겨짚기엔 너무도 짐작가는 게 많아서, 나는 결국 남은 게 하나 뿐임을 시인했다.
"겨울님한테 물어보지 않으면, 더는 모를 거 같아."
"…응, 언니가 알고 있겠지."
지금은 내 아내이며, 내 종자를 자처하는 그녀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이하게도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간 설명되지 않아 NPC의 특성이겠거니 했는데, 만약 1회차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면,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거기다 회차를 넘기는 것 역시 그녀에게서 행하는 상호작용으로 이뤄진다.
그녀의 그런 특성상단서를 더 쥐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급한 것은 아니었으나, 물어보려면 지금 외에는 모호했다. 몸을일으키니, 메이가 내게 팔을 뻗었다.
"으, 아프다."
"업어줄까?"
"아냐, 내 다리로 걸을래. 대신, 부축해줘. 힘들어보이면 꼭 안아줘."
이 응석쟁이 진짜.
메이를 부축해 바로 세우고, 그 조그마한 몸을 부축해 바로 세우니 어둑한 병실 바깥 복도가 눈에 들었다.
어디서 찾는다?
평소라면 내가 찾자마자 모습을 드러냈을 겨울의 신부는, 웬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웬일이래.
설마하니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숨었을리는 없었다. 그렇다기엔 너무도 때가 늦었고, 진즉에 그랬어야만 했을테니.
그간 나와 동행하며, 메이를 돌보며, 우리에게 했던 행동들은 단순히 도망친다고 성립하는 게 아니었다.
겨울의 신부가 잠시 메이에게 줄 약초를 구하러 밖으로 나갔을 수도 있었다. 억측을 하기엔 너무도 일렀다. 무엇보다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헛된 망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메이를 부축해 대성당의 회전하며 아래까지 닿아있는 계단을 따라 몸을 끌어내리니,어둑한 새벽녘 너머로 터오는 동이일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으응, 언니 어딨지?"
"네 가슴에 붙일 약초라도 구하러 간 거 아닐까?"
"그렇겠지?"
나나 메이나 최악의 상황은 가정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말을 주고 받으며 지층에 내려섰다.
차가운 바닥을 타고 흐르는 듯한 냉기가횃불 아래에서 똬리를 틀고 피부를 아리게 하는, 전형적인 새벽이었다.
"어디, 한 번 안뜰이라도 가볼―"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내딛는 앞에, 갑자기 시스템 메세지가 커다랗게 나타났다. 새삼스럽다며 치우고 싶었으나, 그렇게 떠오른 창에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적혀져 있었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1/4]
[봄의 순례자 현재 위치: 제도 니힐테리아]
[가을의 마녀 현재 위치: 산왕국 수도 천산 즈니흘]
[겨울의 폭군 현재 위치: 영원한 겨울의 땅]
…이런 씨발?
띄워진 메세지는 내가 지금껏 보았던 시스템 메세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아이템 설명조차 띄워주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그런 단계를 가볍게 뛰어넘은 듯한 무언가였다.
현재 위치라고? 그 씹새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현재 위치라고?
우선 이게 4신들이 벌이는 거짓부렁이 아닐지 생각했으나, 가능하다면 진즉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곧대로 믿을 건 아니겠지만, 신뢰성이 아예 떨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왜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창조신의 갑작스러운 행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뒈졌다는 양반이 갑자기 이깟 수작질을 부리는 것 역시 그랬고.
"아, 의인님! 여기에 계셨군요!"
와중에 사제가 하나 다가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이 메세지를 보며 더 오래 생각에 잠겨 있었을 것이었다.
"예, 왜 그러세요?"
내 친절한 말씨에 사제는 잠시 얼었으나, 이내 태도를 돌렸다.
어제 보여주었던 그 거친 이단심문과 비교했을 때이해가는 태도가 아니라 그러는 것으로 보였다.
"그게, 일단 따라와주시면…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도 기이한 현상이라…."
좋아, 서프라이즈가 늘었군. 내 옆에서 나와 똑같은 메세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메이를 부축해 걸음을 옮기니, 사제는 나를 이끌고 유적지를 답사하기 전 들렸던 기둥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가는 길마다사제가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당이니 일찍 일어나는 걸까, 하기에는 졸린 기운을 미처 떨쳐내지 못한 이들도 드문드문 보이고 있었다.
뭐지? 왜 다들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의아해하는 나를 안내하던 사제는, 마침내 그 기둥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서는 멈춰섰다.
"기둥을…."
확인해달라고?
메이를 부축한 손을 끌어, 메이를 품에 안고서 사제들을 가로질렀다.
멀뚱히 서서 그 기둥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거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성직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보고는 길을 비켜주었다.
그렇게 길이 트였다. 넓게 트인 길은 내게 넓은 시야를 제공하고, 나는 뒤늦게 그 바로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겨울의 신부와 기둥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입교식을 치뤘던, 그 재생하는 기둥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누가 새겨놓은 것이 아닌지, 그 글자는 아주 정밀하게 음각되어 명확한 문자열을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글귀는, 내 시스템 메세지에 적힌 것과 똑같았다.
나머지 3신의 위치.
"…재촉하는 건가. 빨리 죽이라고."
무심결에 흘린 말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침묵은 끔찍하게도 사려깊어,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만약 이 위치 정보가 사실이라면, 유적지에 나타났던 산왕국 측은 독단적으로 해낸 것이나 사제의 말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닌 가을의 마녀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다는 말이 되었다.
애초에 신이 아니면그 유적의 위치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걸 감안했을 때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기둥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으니, 사제들이 침묵하는 나를 보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그들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호기심이 느껴졌다. 이단심문을 성공적으로 해낸 의인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가을의 마녀는 산왕국을 시켜 교단을 압박하고 있으며, 성유물을 회수하려고 했다.
봄의 순례자와 동맹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유적지 앞에서 제국 측과 산왕국이 싸우고 있던 걸 보면 불가침 정도로 그치는지도 몰랐다.
그럼 우선해야 하는 건 간단했다.
가을의 마녀와 불가침을 맺는 것.
이유는 명확했다.
준신 둘과 싸우는 건 괜찮지만, 제대로 된 신 둘과 동시에 싸운다는 건 고역을 넘어 자살행위나 다름 없다.
제 아무리 봄의 순례자가 내게 상성상 밀린다고 하지만, 그 새끼가 병신이 아니라면 이번엔 대비를 해왔을테지.
그렇다면 신과 삼파전을 벌이거나, 신에게 협공을 받는 건 반드시 피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봄의 순례자와 불가침 조약을 맺기엔 그 새끼는 너무 뒤가 구렸다.
내게 온갖 개지랄을 해왔던 걸 떠올리면 차라리 잘 모르는 가을의 마녀를 상대로 도박을 시도하는 게 이로웠다.
물론 가을의 마녀가 어차피 자신을 죽일 것을 안다며 반항해온다거나, 협상을 결렬하고 공격해올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봄의 순례자는 제 거점을 틀어놓은 것이 아니면 전투력이 그리 높은 놈이 아니었다. 게임에서도 그래왔고, 여기서도 그랬다.
가을의 마녀와 산왕국에서 싸우는 동안에, 그 새끼가 다가와 내 등에 칼침을 놓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었다.
봄의 순례자와 싸우는 동안 가을의 마녀가 찾아오는 것보단, 가을의 마녀와 싸우는 동안 봄의 순례자가 개고생 하며 찾아오는 게 좀 더 상대할만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계획은 뚜렷해졌다. 나를 무심히 바라보는 사제들을 돌아보는 순간, 그들이 기대에 찬 표정을 보내왔다. 나는 그들 중 가장 밝은 머리칼을 지닌 여성에게 시선을 향했다.
"산왕국, 공화국, 공국과 교섭을 준비한다고 하셨던가요."
묻는 것이 아닌 확인. 그녀는 재빨리 대답했다.
"예, 서한을 만들어 보내고 있었습니다. 혹시 요구하시는 것이라도…."
그렇게 말을 흐리는 성녀는, 어느새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성녀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뭐라고 산왕국 측에 서한을 전해야, 가을의 마녀가 나와 만나러 올까. 교섭의 의지가 없더라도, 어떻게 하면 나를 만나러 올까.
생각은 길지 않았으나, 방법은 솔직히 뻔했다.
나는 떠올린 것을 입에 담았고, 성녀는 낯빛을 칙칙하게 하며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