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봄의 순례자
얜 또 뭔 미친 개소리야.
나를 붙들고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미친년은, 분명히 가을의 마녀였다. 내 거검에 가로막힌 창에서 파직거리는 전류와,그녀의 몸 전체에서 훅 풍기는 유황의 냄새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재앙의 어머니라더니, 확실히 닉값을 했다. 유황 냄새 하면 보통 떠오르는 것은 재앙이었으니.
거검을 밀어내는 창날에, 인상을 찌푸릴 찰나 내 뒤에서 메이가 소리쳤다.
"어, 혀, 현성이 엄마야? 저분이?"
이런 미친 이걸 믿다니.
나는 제 자식에게 창을 날려오는 미친년의 공격을 슬쩍 밀어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가을의 마녀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뭔 개소리야! 나, 씨발, 엄마 없어!"
아니 씨발, 인사했으면 됐지 뭐하러 창을 계속 눌러대는 거야.
내 거검의 위로 가해지는 압력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니 가을의 마녀가 미소를 띄었다.
곱게 접은 눈으로 눈웃음을 짓고, 또 다른 개소리를 뱉어냈다.
"물론 내 배로 낳은 아이는 아니나, 너는 네 자신을 증명했단다. 너는 내 아들을 칭할 자격이 있어."
진짜 뭐라고 하는 거지.
일단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라면, 서로 창칼을 맞대고 있지 않는다. 게다가 양부모라도 칭하려거든 상호간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내 생각을 읽어낸 건 아닐테고, 내게 더 말을 붙일 생각인 건지 가을의 마녀가 내게 속삭였다.
"그토록 무수한 시련을 이겨내고, 불가능과 죽음조차 거슬러 오르며 그 너머에 있는 걸 쥐었으니, 어찌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내 아들아, 네가 여기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총애를 얻을 가치를 입증했다."
난 그 개소리를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내 거검에 맞닿아있는 창을 보았다.
그간 준신들과 싸우면서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신의 신체능력은 확실히 준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준신들의 공격은 기실, 내가 갑주 없이 대가리에 쳐맞는 게 아닌 이상에야 치명적이진 않은 수준이었다. 1:1로 싸운다면 어지간하면 지지 않을 터였고.
그 반면, 가을의 마녀의 공격은 고작 한 합을 주고 받았을 뿐임에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 갑주를 썰어낼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고, 내가 대응하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빠르고, 난해하다는 것을.
거기에 권능까지 사용한다면.
파지직
"크윽…!"
치솟은 전류가 내 갑주를 타고 흐르고, 나는 이를 바득 갈면서 굳으려는 근육을 힘으로, 그야말로 억지로 풀었다.
겨울이 압도적인 힘을, 여름이 압도적인 열을 자랑했다면, 가을의 마녀는 어떤 연유인지 속도가 압도적인 듯 싶었다.
어쩌면 불굴의 정신을 켜야 겨우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내 맨 눈으로는 그 전조 동작을 읽어내지도 못했다.
체급도 나와 같다. 오히려 반신인 나와 달리 가을의 마녀는 완전한 신.
화염 면역 갑주 탓에 화염을 쓰지 않았던 여름의 도살자나, 나와 완전히 상성이 좋지 않아 손도 못 쓰고 수하를 잃어댔던 봄의 순례자와는 달리, 나와 그 어떤 상성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싸움의 행방을 추적할 수가 없었다. 맞서 싸운다면, 확실히 이길 수 있을까?
저 뒤에 있는 산왕국 놈들은 변수가 되지 않을까?
복잡한 생각 속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거검을 단단히 쥐었다.
알아보면 되겠지. 창을 튕겨내기 위해 검에 힘을 불어넣는 순간, 창날이 가볍게 검면에서 떨어져 거두어졌다.
휘릭, 하고 돌아간 창이 그녀의 등 뒤에 위치했다. 2m 쯤 될 법한 장창은 미약한 전류를 머금어 파직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가을의 마녀는 내게 양팔을 벌렸다. 큼직한 가슴이 가볍게 흔들렸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아, 한 번만 안아보자꾸나."
"…좆까쇼."
그녀가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내렸다.
*
그렇게 가을의 마녀가 물러나 산왕국 쪽 대열에 합류하고, 그제야 미뤄질 것만 같았던 교섭이 재개되었다.
교섭의 내용도 썩 대단하다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전원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산왕국을 제외하고.
이쪽을 도와서 제국의 땅을 먹을 심산이 전혀 없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나와 가을의 마녀가 이뤄낸 그 한 합을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벼락처럼 날아와 창을 휘두른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악신 그 본인과, 그 악신의 일합을 받아내 반격을 준비하던 교단의 의인.
그런 내가 불가침 조약을 제안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번 제국과의 전투가 평범한 숫자 싸움이나 병력간의 싸움이 되진 않으리라는 것.
그들은 신과 신이 부딪힐 거라는 걸 눈치챈 건지, 아니면 그에 준하는 재앙을 예상했는지 별 특이한 조건 없이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
양피지 위로 끄적이는 글자가 늘어나고, 가구를 가져와 설치한 공병들이 뒤에서 물러서있는 동안, 다리를 꼬아앉은 가을의 마녀와 그녀의 열렬한 신자들은 우리에게 시선만 보내며 조용히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처음엔 교단에서도 일부, 나라던가 메이라던가 하는 극히 일부만 신경 쓰고 있었다.
하지만 서명하는 이가 늘어나고, 그 내용의 살이 붙여지고 있는와중에도 산왕국 측에선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그제야 신경 쓰는 이들은 늘어났다.
마침내 공화국까지 서명하고, 불가침 조약의 서명란에 단 하나의 공백만이 남았을 때.
이 황무지에선 모든 이들이 산왕국을, 정확히는 다리를 꼬고 앉아 털북숭이 꼬리를 잔잔히 흔들고 있는 가을의 마녀를 보았다.
나를 비롯한 모두는, 가을의 마녀를 보며 알아챌 수 있었다.
저 가슴, 존나게 크다는 걸.
아까 충돌할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 했던 것이지만, 가을의 마녀의 빨통은 메이보다 큰 편이었다.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몸에 두른 드레스 위로 생겨난굴곡은 상상을 넘는 풍만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에 귀가 있을 자리에서 쫑긋대는 두 개의 동물 귀. 나는 그 독특한 구성을 바라보면서 턱을 쓸었다.
한참 양피지를 바라만 보던 가을의 마녀가 고개를 들어올리고, 길게 땋아서 등 뒤로 끌어내린 머리칼을 넘기며 내게 시선을 마주쳤다.
갈색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감정은 내가 읽어내기엔 지나치게 낯설었다.
"이제 이 어미의 차례구나. 이 어미가 제안하는 건 불가침 조약이 아닌, 동맹이다."
처음부터 꽤나 의외인 이야기였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그녀는 방긋 웃는 낯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하는 일을 전적으로 도와줄 의향도 있고, 네가 바란다면 봄의 순례자. 내 오랜 동포를 내 손으로 해치워줄 수도 있단다. 네가 나서지 않더라도 말이지."
"조건은?"
내 대답에 그녀는 꼬리를 움직여 그 풍만한 가슴팍을 가리더니, 웃는 낯에 오묘한 감상을 깃들게 했다.
그건 유혹에 가까웠다.
인상을 찡그리는 것으로 반응하니, 그녀는 샐쭉하게 웃었다.
"없지. 개인적인 관심이란다. 너와 같은 시련을 이겨낸 훌륭한 아들들이 익히 받아야 할 대접이기도 하지. 그렇지 않니?"
퍽 호감이 넘치는 듯 보였으나, 존나게 수상했다.
당장에 첫 만남부터 내게 창을 들고 날아들어 부딪힌 건데, 저 말을곧이곧대로 믿고 봄의 순례자와 싸우러 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만약 저게 거짓말일 경우, 봄의 순례자와 싸우는 때에 갑자기 배신이라도 한다면 난 영락 없이 신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 하는 형국에 말려들게 되어버리니까.
나는 그 가능성을 경계했다. 확률을 떠나서, 그런 걸로 도박을 하기엔 가을의 마녀는 너무 강력했다.
고작 일합일뿐이라 그 밑천이 다 드러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봄의 순례자 그 병신보다는 한참 셌다.
그 일합에, 나는 그야말로 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여름의 도살자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야말로 그 전사신이 봐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준비를 철저히 해서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상성이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었다면 패배했을 싸움을.
근데 가을의 마녀는 대비할 수 있는 수단이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근접 전투에 능하고, 범위 공격을 비롯한 원거리 공격 역시 완비하고 있다. 이른바 만능형이었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아니, 필요 없어. 오히려 네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끼어들지도, 도와주려고 하지도 않고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면 그게 내가 바라는바다."
내 험한 말에 산왕국의 일부 전사가 이를 드러내며 역정을 냈으나, 가을의 마녀는 인자하게 내 말을 받았다.
"병력도 필요 없느냐?"
"그래, 필요 없어."
병력도 마찬가지다. 내가 상대하지 못할 건 없지만, 기왕이면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제국 측 병력과 우리 쪽 병력끼리 부딪힐 때 배신이라도 하거나, 전투 중에 이탈을 하면 곤란해진다.
가을의 마녀는 내 말에 처음 창을 맞부딪혔을 때 지었던 것과 비슷한, 황홀경에 가까운 표정을 지어올렸다.
그 섬뜩하리만치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에, 나는 뭔가 가을의 마녀가 좋을 일을 한 건가 불안해 하면서 노려보았다.
가을의 마녀는 이내 말했다. 그 풍만한 몸을 숙여 내게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하고서.
"자기 스스로 시련에 들고, 자신의 격에 맞는 재앙을 이겨내기 위해 파도가 치는 바다에 몸을 내던지는구나. 아아, 나의 아들아. 이 어찌 나를 기쁘게 해주느냐. 그야말로 너는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최고의 전사다."
씨발.
갑자기 나온 칭찬은 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착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을의 마녀를 경계해서 저지른 일인데, 저 돌아버린 년은 자기 멋대로 내가 시련을 치루고 재앙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돌겠네 진짜. 하며 이마를 두드리자 가을의 마녀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제 큼직한 가슴골에 손을 넣었다.
오, 씨발 뭘 하려는 거야. 미묘한 기대감을 섞어 바라보자, 가을의 마녀가 샐쭉하게 웃었다.
"정 네 뜻이 그러하니, 내가 그 모든 걸 대신할 수 있는 소소한 도움을 주겠다."
이 새끼 예상하고 있었나?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같은 반응과 함께 그 큼직한 가슴골 사이에서 꺼낸 것은, 그 목적을 전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구슬이었다.
그 구슬의 겉면에는 그 묘연한 정체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뭔데?"
"성유물이란다, 나의 아들아. 네가 들렸던 그 유적에 있었던 인공태양처럼, 아주 강력한 신성을 품은 성유물이자 내가 그간 갖고 있던 소소한 기념품이지."
성유물이라는것치고는, 신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폭탄이고 넘겨받으면 터지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가을의 마녀는 보란 듯이 손에서 그것을 굴리고는 내게 내밀었다.
"왜 주는 건데?"
"이 성유물의 신성이 필요하지 않느냐? 비록 위업을 쌓은 영웅이라고 한들, 아직은 반신. 신성은 부족하여 아직 제 권역을 갖지도 못했을테지. 그러니 주는 것이란다, 나의 아들아. 이 성유물을 받아들여, 너의 신성을 살찌우거라. 너의 권능을 진화시키고, 너의 권역을 쟁취하거라."
존나 꾸미는 말이지만, 일종의 권능 강화 찬스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저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나는 가을의 마녀가 뜬 요염한 갈색 눈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 성유물을 받아들었다. 묵직한 감촉과 함께, 그 표면에서 잔잔히 흐르는 신성이 느껴졌다.
진짜 폭탄이나 뭔가 개수작 아닌가?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음에도 가을의 마녀는 웃는 낯을 띈 채 내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다는 것처럼.
가늘게 뜬 눈과 가을의 마녀가 요염하게 치켜 뜬 눈이 허공에서 부딪히고,나는 한참 그 눈을 바라본후에야 성유물로 눈을 돌렸다.
으직
콰작!
스마트하게 흡수하는 방법은 모른다. 유일하게 내가 아는 방법은 박살내서 갈취하는 것 뿐.
부숴진 성유물사이에서 온수에빠진 것처럼, 따뜻한 감촉이 뭉실대며 전신을 메우더니 밀려들었다.
그 촉감이 거두어질 쯤, 눈 앞에 커다란 메세지가 나타났다.
[성유물을 파괴해 신성을 흡수합니다.]
[강화할 권능을선택해주세요.]
[거인의 힘]
[화염 부여]
[화신 강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