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5화 〉봄의 순례자 (175/274)



〈 175화 〉봄의 순례자
나를 향해 늘어서있는 글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당연하게도 고민이 먼저 들고 일어섰다.

와중에 목록도 완전히 만족스러운  아니었다. 떠오르는 의문점이 있을 정도로, 목록에서는 노골적으로 한 가지가 제외되어 있었다.


손 안에서 흩어지는 성유물의 파편을 손을 털어버리는 것으로 떨쳐내고, 목록을 찬찬히 보았다.

[거인의 힘]

[화염 부여]

[화신 강림]


가장 먼저 눈치챈 이변은, 불굴의 정신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신성으로 강화를 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목록에서도 띄워지지 않았다.

그게 시사하는 건  명료했다. 권능은 한 번 밖에 강화가 안된다. 혹은 영원의 정신은 한 번 밖에 강화가 안된다.


사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불굴의 정신을 강화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좋은 권능이다. 수천시간을 플레이하며 익숙해진 3인칭으로, 내 뒤를 노리는 적마저 들여다보면서 행동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시간이 느려지는  느껴지니, 그 사이에 전략을 수립할 수도 있었고, 더욱 정확하게 움직이거나 빈틈을 찌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정신 공격 무효.

애초에 정신 공격을 당해본 기억이 없어서 확언할 수는 없었지만, 보통 어떤 게임이든 매체든 간에 정신 공격은 꽤 거슬리고 강력한 기술로 여겨졌다.

그걸 아예 배제할 수 있다니, 꽤나 편리했다.


과연 계륵이던 영원의 정신이 맞나 싶을 정도의 혜자 권능. 그렇기에불굴의 정신을 강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충분한 성능이었고, 굳이 이걸 강화한다고 더 좋아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

그럼 남은 선택지는 세 개였다.

그 중, 거인의 힘은 유적지에서 떠올렸던 것과 같은 이유로 기각이었다.

거인의 힘을 강화해봤자, 엄청나게 가시적인 차이가 있진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거인의 힘 역시 이미 충분히 쓸만했다. 내가 가진 권능 중 가장 포기 못할 무언가를 꼽는다면 당연하다는 듯이 거인의 힘이 꼽혔다.


준신들은  근력에 맥을 못 췄고, 같은 신들도 애를 먹을 것은 자명했다.

그렇다면  둘은 제외하고, 남은 건 둘이었다.

화신 강림, 내가 가진 것  가장 단일 위력이 뛰어난 권능.

혹은 화염 부여, 꾸준히 쓰고는 있지만 슬슬 계륵이 되기 시작하는 모호한 권능.

그 중에 내가 먼저 가능성으로 꼽은 건, 화신 강림이었다.

이미  필살기라고 할  있을 이 권능은, 예상을 하려고 해도 강화가 어떤 방향으로 이뤄질지 알 수가 없었다.


위력이 오르나? 아니면 범위?


신성을 투자해 강화하는 게 그렇게 소박한 변화로 거듭날 것 같진 않았고, 뭔가 기능적 변화가 있을  같은데 그게 과연 지금의 화신 강림보다 엄청나게 쓸만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쓸모로는 거인의  다음이었을 정도로, 화신 강림은 여름을 쓰러트린 이후로 내게 쏠쏠한 범위 공격 기술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군이 있으면 쓰지 못하고,  역시 갑주가 없으면 휘말릴 정도로 위력도 막강했다.

만약권능을 강화해서 나오는 변화가 아군과 적을 구분하여 전장을 휩쓸어버리는 피아식별 기능이라면 모를까, 굳이 강화할 필요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24시간 제한은 여전히 귀찮았지만.


특히, 화염이 잘 먹히고 대군전이 주력인 봄의 순례자를 상대하는데 화신 강림은 톡톡한 전력이 되어주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능히 짐작할  있었다. 이미 제 밥값을 충분히 해내는데 과욕을 부려봤자였다.

"흐음."

흘리는 침음성에, 시스템 메세지 너머로 가을의 마녀가 보내는 끈적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메세지들을 보았다.

반신이 되기 이전에 이런 선택지가 주어졌다면 망설임 없이 화신 강림을 골랐겠지만, 이제 강점을 강화하는 걸로 가시적인 전력 차이를 보여줄 시기는 지나있었다.


이제 나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계륵인 것을 쓸만하게 만들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더 그럴 듯 해보였다.

쓰지 못하는 것이나 써봤자인 것 하나를달고 다니느니,   있는 패를 하나 더 늘리는 게 좋을 것이었다.

그럼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권능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그 글자를 보았다.

[화염 부여]

거의 처음부터, 거인의 힘이 내 의지로 발동되는 게 아닌 때부터 톡톡히 제 역할을 해내며 내 여정을 도와줬던 권능.

무난하게 쓰기 좋고,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광원 겸 공격 수단, 방어 수단으로 작용하던 그 권능이었다.

지금은 화력이 부족해 쓰나마나 했고, 굳이 이게 권능으로 있어야 하나싶을 정도로 모호한 면이 있었다.


물론 쓰기야 지금도 쓰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권능을 바라보니, 화염 부여가 내게 떼를 쓰는 듯 가볍게 점멸했다.

"현성아?"

"아, 응."

"뭐 하는 거야?"

"있어 그런 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무 오래 조용히 있었나.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기야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충분히 이상해 보일만 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서, 화염 부여의 글자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화신 강림보다는 확실히 강화의 여지가 많아보였다.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쉴새 없이 뽑아낼 수도 있었다.

만약 이게 여름의 도살자가 화염을 다루는 것처럼 변한다면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던 내게도 원거리 견제 수단이자 마법에 준하는 범용 범위기가 생기는 것일테고.


만약 그 경우엔  몇 안되는 약점이라고 할  있을 원거리도 보완될 가능성이 높았다.

세부적인  직접 봐야겠지만, 화신 강림을 고르기 보단 이걸 강화하는 게 장기적으로 좋았다. 잠시 망설이던 손가락이 허공을 꾹 누르고, 글자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잘게 쪼개졌다.


부스러기에 가깝게 잘게 쪼개진 글자들이 날아들어 내 주변을 떠돌다가, 내 앞에서 재조립 되었다.

모이는 글자가 차례로 늘어설 때마다, 띄워진 문자열은 내게 정보를 전하려고 애썼다.


그 문자열  첫번쨰를 본 내가 감탄사를 흘리기도 전에, 뒤이어 띄워지는 내용이 내 추측이 존나 틀렸음을 증명했다.

그 문자열들은 이렇게생겨 있었다.


[영혼 발화]

[당신의 내재된 분노와 제 영혼조차 불사를 정도로 격정적인 싸움법이 반응해, 권능이 변화합니다!]

[사용  영혼을 태워 신성과 신체능력 전반을 폭발적으로 상승, 타 권능과 중첩됨, 화염 면역 부여, 화염 회복 부여, 모든 공격에 강렬한 화염이 깃듬]

[화염 부여와 분리되어 각각 사용될 수 있음.]

[화염 부여의 화력이 상승.]

이런 씨발?


사기당한 기분으로 문자열을 다시 살피지만, 내용은 읽어내린 그대로였다.


이름만 보노라면 적의 영혼을 태우는 원거리 기술일 것 같았는데, 그런 예상을 정확히 빛나가는 기묘한 기술이었다.


성능 자체는 사실, 꽤나 강력해보였다.

화염 위에 있으면 회복, 화염 면역에 공격에 강렬한 화염이 깃든다는 건 평범하면서 강력했으나, 가장 중요한  그게 아니었다.

신성과 신체능력의 폭발적 상승, 다른 권능과의 중첩.


거인의 힘을 가진 내가 쓰면, 예전에 쓰던 거인의 힘 2중첩을 가볍게 뛰어넘는 힘을 부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문구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 가장 앞에 있는 문구였다.

내 영혼을 태운다는 문구.


불은 타오르고, 타오르면서그 장작이 된 것을 잿더미로 만든다.


그런데 그런 불을  영혼에 붙인다면, 과연 내 영혼이 멀쩡할 것인가.


솔직히 아니라고 보는  맞았다. 사용하면 내 영혼을 실시간으로 깎아먹는다는 얘기로 보였다.

그만큼 성능은 강력하긴 했지만, 존나 하이리스크였다.

어지간하면 안 쓰는 게 좋을테고, 위험해도  번 세 번은 생각해봐야 할테지만….


거인의 힘을 가진 내가 이걸 사용하면 얼마나 강력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켠이 떨려왔다.

진짜 비장의 수단으로 쓰는 게 좋을 권능이었다.

납득하자, 시스템 메세지가 빠르게 거두어져 시야 한 켠으로 사라졌다.


모래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라지는 활자 부스러기 사이로, 가을의 마녀가 인자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신성이 살찌워지는 것이 느껴지느냐?"


무슨 권능을 골랐는지 묻는 것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내 눈동자에 마주쳤다. 금색 눈동자가 나를 훑어대며 가늠하려고 했다.


나는 그 눈동자를 찬찬히 바라보다,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으음? 무슨 수신호인 게냐?"

"좆까라는 수신호. 댁한테는  알려줘."

내 대답에 가을의 마녀는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쟤한테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적인데, 그걸 알려줘서 얻을 이득이 없었다.


오히려 알려줬다가는  권능에 대한 대비책이라도 짜오겠지.

"너무 경계하는 게 아니냐? 성유물도 주었거늘, 너의 어미는 네가 보이는 태도가 너무도 가슴 아프구나."

누가 내 엄마야 씨발.

굳건하게  중지로 가을의 마녀를 가리키자, 그녀 뒤에 서있던 전사 몇명이 무기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시던가 씨발. 다 뒈지고 싶으면.

"까놓고 말해서,  너 못 믿어. 그렇게 방심시켜놓고 나중에 통수친다고 해도 뭐 어찌할 수 있는 도리도 없고. 그러니까 이 거리감을 유지하자고."

내 호의를 걷어차는 말투에, 결국 전사  하나가 무기를 뽑아들었다. 험악하게 찌푸린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 자식, 감히 어머니께―"


정확히는 다가오려고 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콰릉!!


시인할 수도 없는 속도로 창이 쏘아졌다. 휘두르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정확한 타이밍에 불굴의 정신을 발동했다.

[불굴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내려치기였다. 번개 한 줄기를 동반한 창은,  비대한 창날을 이용해 내게 달려들려던 전사를 으깨고 있었다.

잘라낸다기엔,  휘둘러지는 궤적이 너무도 강력했다.

그걸 휘두른 장본인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그야말로 가볍고 빠른 공격. 그에 전사의 갑주나 무기 따위가 녹아 쇳물로 변하고, 시체는 잘 으깬 고기죽처럼 되어 바닥에 깔렸다.


철퍽!

흥건한 핏자국은 기이하게도 으깨진 자국을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다.

그 흔적을 흘긋 본 가을의 마녀는 창을 등 뒤로 넘겨 메었다.

"그럴  있지. 나의 아들은 경계심이 깊고 중요한 순간에 의심할 줄 아는구나. 훌륭한 영웅의 덕목이다."


그리고는 내게 보란 듯이 나를 칭찬하고,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나는 거기서 겨울의 신부나 메이가 보내오는 호의와는 다른, 계산적인감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기에 망설임 없이 제 신자를 쳐죽여버리는 무자비함까지.


악신이라는 서대륙인들의 말이 틀리지 않은 듯 했다.


좌중은 충격적인 광경에도 그다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저렇게'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나 역시 그녀를 경계했다. 방금  공격이 실전이었다면, 과연 안전하게 막아낼  있었을까?

피하긴 커녕, 겨우 막아내는 게 고작이었을 것 같았다.

가을의 마녀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우리가 적대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의 아들아. 너는 재각이 있고, 자격 역시 있어. 너와 내가 협력한다면 넌 그야말로 모든 것을 이룰  있을 거란다. 그러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을 따라, 드레스 자락이 너울대더니 꼬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만약에 생각이 바뀌거든, 언제든 나를 찾아오렴."


그렇게 일어서 자리를 벗어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세네카가 헉 하는 헛숨 삼키는 소리를 흘렸다.

고개를 돌리니, 세네카는 양피지 위 산왕국의 서명란에 새겨진 서명을 보고는 까무러칠 듯 놀라는 반응을 내보이고 있었다.

아니 씨발, 어느새?


 양피지에 감도는 은은한 유황 냄새에 내가 고개를 돌리니, 가을의 마녀는 나를 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역시 불길한 미친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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