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6화 〉봄의 순례자 (176/274)



〈 176화 〉봄의 순례자

가을의 마녀와 산왕국 측은 그 이후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공화국은 우리나 공국에 별 다른 관심이 없어 산왕국의 뒤를 이어 자리를 떠났으나 공국만은 순순히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옆에 서있는 토니 스타크가 장검 연맹이 간절하게 찾고 있는 맹주임을 감안하자면 당연했다.


맹주이자 유적지의 마지막 생존자, 동시에 내가 이름 붙이기를 토니 스타크가  NM-21은, 자신에게 돌아오라며 아우성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네. 하지만 내가 돌아가서 좋을  없음은 그대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허나 내가 이 친구와의 여정에서도 살아남고 모든 게 해결되거든, 그때 돌아올테니 부디 기다려주게. 그때까진 자네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공국 측의 기사단은 그의 말에 달가운 눈치였으나, 장검 연맹은 아쉬워 미칠 것만 같아보였다.

실제로도 그런지 무기를 뽑아들고 달려들었지만, 전신이 금속으로 이뤄진 무투가의 공격을 버티진 못했다.


뻗어버린 이들을 끌고 물러나는 공국의 교섭단을 물끄러미 보던 토니 스타크는 죄악감에 시달리는 듯 했다.

어찌됐든, 토니 스타크는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걸 천명했고, 메이와 겨울의 신부는 구태여 말할 것도 없었으니 남은 건 교단의 군대를 이끌고 제도를 치는 일 뿐이었다.

과연 그 군대가 충분할까, 하는 생각이들었으나 결국 군대는 곁다리에 불과했다. 내가 봄의 순례자와 싸우는 무대를 마련해주기 위한 엑스트라에 가까웠다.

군대의 질이나 수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없는 걸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렇게 대성당으로 복귀해, 토니 스타크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던 때였다.

머리가  벗겨진 사제가 내게 걸어와 말을 붙였다.


"아, 오셨군요. 의인이시여, 손님이 오셨습니다. 의인님의 지인이라고 합니다."


세네카도 나 따라서 교섭자리에 갔다왔는데, 지인이라고 할 이가 있나 싶어서 곰곰히 생각하니 의외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단서가 있음이 떠올랐다.

웜홀. 남작령 인근의 1차 거점에 만들어진 마법적 운송수단.

그게 완성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바 있음이, 불현듯 떠올랐다.

응접실로 향하기 위해 복도를 가로질러 문을 열어젖히니, 과연 익숙한 백골 하나와 비늘 하나, 얼굴 둘이 나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전사님."


"아, 드디어 오셨군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차례로 인삿말을 건네오는 이는 대부분 익숙한 이들 뿐이었다.

기사단장 퍼시벌과 발데가리아의 대공, 도마뱀 마법사 살로메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 샤론의 근위대장.

그들의 모습을 보고 괜히 향수병이 도질 것 같길래, 빠르게 말을 받으며 생각을 머릿 속에서 털어냈다.

"그러게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거의 1년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정도는 되지 않았지만… 만나뵙게 되어 기쁘다는 건 부정할  없지요. 피곤하실텐데 편히 앉으시길. 마법을 걸어드리겠습니다."

넉살 좋게 말을 붙이는 발데가리아 대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이후로 변한 게 없었다.


그들의 환영을 받으며 소파에 앉으니, 내 맞은 편 우측에 앉아 나를 노려보던 이름이 근위대장이 팔짱을 꼈다.

뭔데.

대공이 부리는 마법이 내 몸에 스며들고, 잔잔히 차오르는 기력을 느끼고 있을 무렵, 그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근위대장이 낯빛을 굳혔다.

"효과 좋네요. 어깨가 결리던 참인데 좀 괜찮아진  같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주현성님은 그다지 휴식을 취하시지 않으시는 편이니, 분명 피곤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새끼 배려해주는  봐라.  웃으며 말을 받자,  옆에 있는 근위대장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지  새끼. 왜 자꾸 꼬라보지.

서열 정리가  되었나 하기엔, 얘는 자기 기술을  쏟아넣고도 한 방 먹이는 걸로 밖에 못 끝냈던 년이었다.

그 눈을 째려보니, 근위대장은 흠칫했다가 주먹을 강하게 쥐고는 내 눈을 마주 노려봤다.


마치 내가 뭔가 잘못한 것처럼.

의아해하는 찰나, 대공이 헛기침을 흘렸다. 폐도 없으면서.


"얘기는 세네카님께 다 들었습니다. 서한으로나마 되어있어 상세한  저희가 교단 측에 머무르면서 얘기를 들어봐야 했지만… 얼추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더군요. 봄의 순례자를 공격하려 제도로 가시는 게 맞습니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대공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군대가 필요하실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살로메 양과 제가 웜홀을 준비해뒀으니, 고대의 도시와 발데가리아에서 숙련된 병사들이 넘어와  여정을 도울 것입니다."

벌써 거기까지 준비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으나, 대공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기사단장에게 고갯짓했다.


기사단장은 노인 특유의 인자함 아래에서 꿈틀대는 전투광적인 미소를 흘렸다.

"그 외에도 공성병기와 전투 교육을 마친 기승용 도마뱀 등도 준비했습니다. 전투가 어떤 양상으로 흐를지 알 수는 없으나, 저희의 미력한 힘을 최대한 발휘하여 대전사님을 돕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병력에 대해서 고민하던 차였는데, 여러분들이 도와준다면 안심입니다."

그들이 웃고, 내 덕담에 만족한 듯한 반응을 띄고 있으니 소파에 앉아 꼬리를 흔들던 살로메가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그건 세 개의 앰플에 들어있는 초록색 약물이었다.

그 약물을 알아보지 못하기에는, 나는 이미  약물의 효과를 톡톡히 누린 여성을 알고 있었다.

"저도 대전사님께 도움이 되고자 완성된 시제품을 조금 갖고와봤어요. 부디 대전사님이 이걸 쓰실 일이 없으셨으면 하지만… 준비는 아무리 해도 모자란 것이잖아요?"

초재생물약. 복용하든, 바르든, 사용자에게 막대한 재생력을 부여하는 물약이었다.

내가 그걸 받아들며 씩 웃어주자, 살로메는 눈에 띄게 부끄러워 하면서 꼬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 꼬리에 부딪히는 백골의 소리만이 요란하게 방에 울려퍼졌다.


"다들 오랜만에 뵙는데 이렇게 잘 해주시니 어떻게 이 감사함을 다 표현해야 할지… 다들 고맙습니다.  따라와줘서."


"저희의  일이지요. 저희는 당신께서 없으셨다면 모두 죽었을테니까요."


진짜 그런지, 저게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그렇게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려다가.


"…."

나를 아직도 노려보고 있는 근위대장 때문에 그러려다 말았다. 근데 뭔가 그 노려봄이 기이했다.


왜 노려보는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광신도 출신의 살로메나 기사단장도 조용히 그 모습을 관조하고 있었다는 점이 뭔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

마치 내가 그 노려봄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처럼, 그들은 근위대장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 있었다.


"…뭡니까? 뭐  말이라도 있어요?"


그래서 근위대장을 노려보면서 말을 거니, 근위대장의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수 없다는 것처럼 그녀의 표정과 감정이 이리저리 바뀌더니 한숨으로 새어나왔다.

"아닙니다. 그저…."

다시 한 번 한숨. 존나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의아하게 다른 이들을 쳐다보니, 기사단장은 곤란함을 가득 띈 미소를 지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토벌이 끝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하고 말을 흐린 기사단장은 고뇌하는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슬쩍 웃었다.


"괜히 대전사님께 혼란만 심어드리는 것이겠죠.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각하지 않다는 얘기에 나쁜 일은 아닌 건가, 하는데 근위대장이 가늘게 뜬 눈으로 기사단장을 노려봤다. 기사단장은 그 눈초리에도 허허 웃기만 했다.


"저는 공성병기의 사용법 등을 남작령에서 징발한 현지 병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외에도 전술의 상세한 조정이나 현지에서의 전투 방침은 제가 수립하게 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노려본 게 언제 있었냐는 듯, 그녀는 내게 정중하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체념과 현자타임에, 내 얼굴은 더욱 의아한 빛을 띄었다.


뭔가 미묘한 소외감이 들었지만, 별로 중요한  아닌 듯 하여 나는 이목이 내게 몰려있는 틈을 타 말했다.

"출정 준비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면 3일 정도 걸릴 겁니다."


기사단장의 대답에, 나는 턱을 쓸었다. 3일은 좀 긴데.


봄의 순례자가 평소에 하던 개얍삽이 짓을 떠올리면, 가을의 마녀와 내가 만나 불가침 조약을 맺었음을 모르진 않을 것 같았다.

설령 모른다고 하더라도,  새끼는 하루 빨리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내 신상에 좋았다.


아무래도 준비를 서둘러야 할테니,  대공에게 시선을 보냈다. 내 시선을 받은 해골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제안했다.

"아까 제게 사용해주신 피로 회복 마법, 출정 준비 과정에서 일손들에게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 어려울 건 없지요. 출정을 앞당기실 생각이실 것 같아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새로 육성해낸 마법사들도 함께 있으니…."

계산하는 것처럼, 그 백골손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틀 정도까지는 단축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제 철야를 전제에 두는 것이겠지만, 이런 몸이  이후로는 휴식을 필요로 해본 적이 없으니 문제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걱정 안 했는데, 라고 말하면 대공이 상처 받을 것 같길래 괜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틀 뒤 출정일, 나는 정말 준비까지 이틀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

봄의 순례자는 다가오는 신성을 느꼈다.

이미 신성이 가득해 구분하기 어려울 법도 하건만,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향해 다가오는 신성의 복합성을 통해 추측할 수 있었다.


동대륙의 신살자, 주현성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 접근을 눈치채자마자, 봄의 순례자는 기껏 뻗어둔 뿌리들을 되돌리고, 각지에 퍼져있는 자신의 수족을 일일히 연결을 끊었다.


지금 육신으로 삼고 있는 화신만을 제외하고, 그녀의 침잠한 시선 속 어둑한 기척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라지고 사라져, 남은 건 하나. 홀로 남은 제 육신을 관조하던 봄의 순례자는  의식마저도 그 육신에 몰아넣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그녀는 낯선 감촉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육신의 감촉이었다.

"…준비는  되어가나?"

제 육신의 감촉에 낯설어하던 봄의 순례자의 뒤로, 황제가 공간을 찢으며 나타났다.

이미 성유물을 충분히 먹어, 반신이라고  수 있을 수준까지 성장한 그는, 이제는 공간 마법을 제 수족처럼 다루고 있었다.

봄의 순례자는 그 기척에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래, 아주 완벽하군."


사실, 구태여 물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봄의 순례자의 육신을 향해 집결하는 막대한 양의 신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 역시, 그녀의 기준으로 하자면 아직 부족한 것이겠지만, 황제 역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육신 하나만을 갖게 된 것은 어색하고 불안하기도 하나, 그 신살자는 다수의 폭력에는 그다지 굴하지 않는 존재다. 차라리 상대하려거든 강력한 소수로 압박하는 것이 좋겠지. 그로 인해 전장의 부담은늘어날테나, 그건 그대에게 일임하도록 하겠다, 어린 황제야."


"…그래, 그게  역할이니."


평소라면 이유를 물어오거나 불편해 해야할 황제는 순순히 동의했다.

봄의 순례자는 그 기척에서 기묘함을 느꼈으나 구태여 꼬집지 않았다. 애초에 황제는 그녀를 해치기엔 너무 약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건가? 네 입으로 그 반신은 강력하다지 않았나."

물음이라기엔 확신에 찬 음성. 그에 봄의 순례자가 연구소로 뿌리를 뻗었다. 뻗어진 뿌리가, 실험대에 묶여있던 괴물에게 틀어박혔다.


틀어박힌 뿌리는 살을 쥐어짜내는 듯 하더니, 그 곰처럼 생긴 괴물을 완전히 으깨버렸다.

그 르 아 아!!!


콰직!

으깨지면서 나온 비명과 함께, 그 괴물이 품고 있던 생명력을 뿌리가 빨아들였다. 뿌리를 타고 흐르는 생명력이 제 신성에 더해지는 것을 느끼며, 봄의 순례자가 슬쩍 웃었다.


"이 육신에 있던 생명 흡수 권능과 내 권능은 정말 궁합이 좋더군.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 신살자는 더 이상 나를 쉬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대답에 황제는 눈썹을 한 번 들썩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에서조차 오묘한 기척을 느낄  있었으나, 마찬가지의 이유로 봄의 순례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히려 해보란 듯이 가만히 있으니, 황제가 허공에 손가락을 그어 공간을 찢어냈다.

"그럼 나는 이만 준비를 서두르러 가보겠다."


"그래, 부탁하지."

황제가 찢어낸 공간이 닫히고, 어둑한 연구소에서는 봄의 금색 눈동자만이 희번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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