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7화 〉봄의 순례자 (177/274)



〈 177화 〉봄의 순례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제도는 들었던 것보다 더 황폐했다.

흉흉한 분위기를 뒷받침하는 외관은, 군데군데 뻗어진 거대한 검은 뿌리와 무너지고 깎여나간 흔적으로 강조되고있었다.


외벽을 뒤덮은 촉수와도 같은 뿌리는 맥동하는 듯 꿈틀거렸고, 그 꿈틀거림이 한참 멀리 떨어진 숲에서도 보이는 걸 보자면 단순히 1~2m의 크기는 아닌  했다.


 때는 웅장했을 외벽은 이제는 완전히 영락하여 악신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외벽은 이미 보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그것은 나 뿐만이 아닌지 병사들은 흉흉한 외벽을 보며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가히, 인간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인간의 손길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을 듯한 배경. 배경을 두고 병사들이 불안해하거나, 괜히 헛숨을 들이키거나 하면서 심리적 저항감을 드러냈다.


어쩌면 저런 외관으로 병사들의 사기부터 꺾어놓을 심산인지도 몰랐다. 실제로 벽이 공격에 나설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고.


생각이 깊어진다. 침착히 해내는 숙고로 그 외벽을 바라보며 예상해보았다.

만약벽이 공격에 나설 경우엔, 위험해지는 건 내가 아니었다.


 공격에 당한 아군은 예외 없이 봄의 순례자가 되어 일어난다. 정확히는 그 수족이 되어서.

만약 그렇게 살아난 아군을, 병사들이 죽일 수 있을까?

죽일  있는 정신상태를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화력과 힘이 있을까?

쉬이 판단할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에 저 검은 촉수를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정신력은깎아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그렇게 생각하자니 쉬이 상대할 수 없어보였다. 병사들의 도움이 마냥 도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가능성도 상당했고.

감수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잡병들을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그게 전장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면 나 혼자서 틀어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메이를 보니, 메이는 무표정으로 그 촉수를 보고 있었다.


메이의 도움을 빌리더라도,힘들겠지.

차라리 군대를 여기에 두고 갈까?

고개를 슬쩍 돌리니, 기사단장이 내 옆에 서서  허리춤의 칼날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역시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분명했다.


그 옆에는 대공 역시 있었으나 그는 별로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 건지 아니면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건지 묵묵히 서있었다.


"…병사들을 두고 가면 어떨까요."


갑작스러운  말에 그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기사단장의 표정에는 놀라움이,대공의 표정은… 저게 뭔 표정이야 씨발.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그… 뭐라 해야할지…."

나는 그들에게 내가 생각한 것들을 들려주었다. 병사들에게 닿지 않도록, 대공이 소음을 억제하는 마법을 쓴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노인과 백골, 반신의 대화는 조용히 이뤄졌다.


 말이 끝나고, 그걸 유심히 듣고 있던 대공은 표정을 굳히고  턱을 쓸었다.


"으음, 대전사님께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제 미력한 수준으로는 파악하지 못하겠으나… 세네카 양이 얘기해주길 준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더군요."


거기까지 말해줬나. 그럼 설명할 수고는 덜어버리니 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기사단장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신에는 못 미치나 어지간한 괴물보다는 강력한 존재라고도 들었습니다."

"예, 한 번에 하나씩 상대하면 적어도 상대하는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게 한둘을 넘어서 열, 스물이 몰려온다면 주현성님께서도 곤란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간 제국 쪽에서 성유물을 존나게 긁어모았음을 감안하자면, 준신의 수도 상당히 불어나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준신이 많다면, 나는 확실히 곤란해진다.

물론 준신들을 상대하는데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떠오르는 건 암살자였다. 이름도, 그 정체도 제대로 모르는 암살자. 자작과 협공하여 나를 담그려고 했던 암살자.


묶어두는 건 아주 잠시라서 평시라면 위협이 되지 않을테지만,  잠깐의 묶어둔다는 상황이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특히나 지금부터 상대해야 하는 게 신임을 감안하자면, 1초 발이 묶이는 것만으로도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예, 확실히 곤란하겠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주현성님이 강력한 것은 사실이나, 언제나 다수는 강력했습니다. 인간들은 수를 모아 괴물에 대항해왔으니 말이죠. 그 형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준신의 무리가 대전사님이라는 괴물을 상대하려고 하는 거죠."


과연, 그럴 듯 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니 기사단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대공에게 눈을 돌렸다. 대공의 검은 눈구멍으로 그 시선을 받았다.

"큼큼, 이건 마법사로서의 관점입니다만. 제가 볼 때 준신은 인간들이 상대할  있는, 그야말로 괴물 수준에 그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성이 많지 않다면 뚜렷한 권능도 없을테고, 연구한 바에 따르자면 신체능력이 그다지 강화되지도 않는 모양이더군요."

그…런 건가?

내 경우엔 거인의 힘이 있어 별로 상관이 없었으니, 다른 사례에서 정보를 끌어낼 수도 없어 어깨를 으쓱하니 대공이 뼈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결론을 냈다.

"한 마디로, 준신들은 병사들이 많다면 충분히 상대할만한 적수일 겁니다. 그러니 군대로 준신들을 묶고, 대전사님이 봄의 순례자를 상대하는 게 어떨런지요?"

"그 과정에서 꽤 죽지 않겠습니까?"

준신이 아무리 신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준신이다. 인간의 수가 많으면 상대할 수 있다는 얘기는, 인간의 희생 없이 완전히 압살할  있노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예, 그렇겠죠. 꽤 죽을 겁니다."

이런 씨발.

달갑지 않았다. 눈쌀을 찌푸려 그것을 드러내니 그걸 지그시 보던 기사단장이 말했다.


"지금껏 희생 하나 만들어내지 않고 싸워오신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전쟁에서까지 그럴 순 없습니다. 주현성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전장 전체를 신경 쓰실 순 없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빼고 나 혼자 가는  낫지 않냐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방금 들었던 말이 떠올라 다시 입을 닫았다.

준신의 군대.

자작이 말하길 준신을 양산하고 있다고 했었다. 오직 나를 상대하기 위해.


내게 피해를 강요하기 위해.

그간 조용하던 대공이 기사단장의 말을 받았다. 그의 백골손이 내 어깨에 걸쳐졌다.

"저는 오히려 대전사님께서 나서서 맞서 싸워주시기 때문에, 저희에게 승산이 있으며 희생이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괴물을 잡으며 평화를 유지해야   사명을 내버린 신들이 인간들과 상생하려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대전사님께서 없으셨다면 저희는 신의 노예가 되거나 신의 노리개가 되었겠죠."


"그 중 봄의 순례자는 가장 악질이니, 주현성님이 나서시지 않았더라면 저희 측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피해로 다가왔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감 갖지 마십시오."

인간의 수명 이상으로 살아온 백골 마법사와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이 차례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난 그 위로를 받으며 솔직히 불만이었다.


 싸움에, 내가 집에 가고자 벌이는 일에 사람들이 말려들고 있는 게 아닌지.

차라리 내가 다치는 거라면 그러려니 할  있었겠지만, 나 때문에 괜히 더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는다는 건 왠지 부담이 됐다.


그것도 내게 신뢰와 경의를 보내주는 이들이 그런다는  왠지 싫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내 옆구리에 찬 투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금속으로 된, 호흡과 시야에 관련된 효과만을 갖고 있는, 내가 가진 물건 중 가장 평범한 물건을.

이 투구도 앞으로의 싸움에서 버틸지 알  없는데, 신과 신이 싸우는 자리에서 평범한이들이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에서 떠돌던 나는,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누구도 죽지 않게 싸워오신 것만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신 거지요. 이미 하실 수 있는  다 하셨다고 봅니다. 싸움에서 누구 하나 죽지 않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니, 주현성님께서는 지금껏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죠. 설령 한 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낱말들 위로 떠도는 노장 특유의 무게감에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웃었다.

"…후우, 그렇죠. 그렇겠죠. 그러면, 어지간하면 죽지 마세요. 되도록이면 최선을 다할테니."


"물론입니다."

"게다가 전 이미 죽어서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지요."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공이 농담했다. 나는 그들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틀딱들의 위로로 힘을 얻다니.

왠지 묘하게 간질간질한 기분이라  웃으니 그들이 내 등을 떠밀었다.


"가서 병사들에게 해야할말을 해주십시오. 그런 거 잘하시지 않습니까."


내 사이비스러운 언행에 넘어와 도시에 머물다, 결국 먼 대륙의 전장에 서있는 노익장이 나를 부추겼다.

나는 고개를 뻣뻣히 들고, 옆구리에 투구를 끼운 채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마법으로 쳐진 장막을 벗어나니, 웅성대고 불안해하며 술을 들이키는 병사들의 소리가들려왔다.

웅성대는 소리는 가까이 갈 수록 가까워진다. 가까워지다 못해 지척이다. 나는  웅성대는 소리를 가로질렀다.

"왕이시여…."

"…대전사님이다…."

"여름이시여…."

"해방자님…."


각기 다른 종교, 다른 가치관으로 내 칭호를 부른다. 인간의 왕이자 여름의 대전사로서, 여름 본인으로서, 순백교단의 해방자로서, 그들은 나를 보며 마음을 다 잡았다. 손에 든 술병이 바닥을 나뒹굴고, 무기를 불안하게 만지던 이들은 손을 뻗었다.

내 등을 손이 두드리고, 내 어깨에 손바닥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내가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병사들이 길을 비키면서도 내게 닿기 위해 손을 뻗어 내 몸을 두드렸다.

그 두드림에 담긴 것은 공포와 더불어 잔잔하게 떠도는 신뢰였다.


나는 그 신뢰를 받으면서 눈을 깜빡였다.


내가 뭐했다고 이러는 걸까.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던가.

이들은 과연 내가 신의 대전사라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왕이자 신이 점지한존재라는 사실만으로 나를 믿고 따르는 걸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두려워 하면서도, 그런 존재를 따라서 사지로 걸어들어올 정도로 믿고 있는 걸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해야하는 일은 잘 알고 있었다.


기대를 받은만큼, 보여준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존재임을.

마침내 행렬을 가로지르며 내가 선 곳은, 전장이 될 넓은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바로 뒤에 숲을 끼고 있어 드러난 바위가 곳곳에 널려있는 언덕.

나는 그 중 적당히 높아보이는 바위 위로 몸을 날렸다. 가볍게 뛰어올라 착지한 바위는, 내가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도 모든 이들이 나를 올려다볼 수 있는 적당한 높이를 갖고 있었다.

"여러분들께 고할 것이 있습니다."


조용히 시작한 낱말에, 병사들이 나를 일제히 바라봤다. 나는 투구를 옆구리에 끼운 채로 말을 이었다.

"이 앞에 존재하는 것은 이 대륙에서는 악신으로 알려져있으며, 여러분들은 4신이라고 알고 있을존재  하나입니다. 족히 수천년 전부터 살아왔으며, 아주 강대한 존재입니다. 음모를 숨쉬듯 꾸미며, 자신이 죽인 것을  소유로 만드는 흉폭한 권능을 사역하는 존재입니다."

내 조용한 선언에, 병사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해야 했다. 적어도 어디로 들어가는지는 잘 알아야 하니까.


"저는 지금부터 그것을 죽이러 갑니다. 그것이 해내는 악행을, 여러분들의 세상에 저지르는 악덕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것은 순전히 제 생각이며, 이건  싸움입니다. 여러분들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당장 무엇을 얻는 건 아닙니다.  싸움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평소와 같이 일상을 보내고, 가족을 돌보고, 연인과 애정을 나눌  있을 겁니다."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병사들 중 일부는 이미 삭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충분히 살피다, 눈을 감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싸우러 갑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니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을 지닌 괴물은 여러분들이 사는 세계에, 신성을 가진 존재를여럿 양산해내어 풀고 있습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이나 천인공노할 이들에게마저 휘두르기 편리한 흉기를 쥐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존재들이 과연 얌전히 이 싸움이 끝나고 종적을 감출까요? 아니면 세상을 떠나 한적한 곳에서 농사라도 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노려올 겁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을 겁탈하고 죽일 겁니다! 여러분들이 일궈낸 터전을 빼앗아 그들의 배를 채울 겁니다! 과연 봄의 순례자, 그 빌어먹을 신새끼가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죽었노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받아줄까요? 자신의 신도가 된 이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심어 음습한 하수인으로 만드는 미친 신이?"


 말이 이어질수록, 병사들의 얼굴은 칙칙해지는 걸 넘어 붉어지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맞이할 미래를 보고 계십니다. 저 성벽을 보십시오! 저 한 때는 웅장했으나 완전히 쇠락하고, 악신의 둥지가 되어버린 성벽을 보십시오! 무엇이 보이십니까? 죽어나간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이, 앞으로도 희생될 여러분들의 허무한 죽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방금 전까지 거대한 촉수를 보며 공포를 태우던 이들은,내 말에 일제히 성벽을 보고서는 이를 바득 갈았다.


"저는 그렇게 둘  없습니다. 일궈낸 터전을, 사람들의 웃음을,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싸웁니다. 싸우러 갑니다. 저 높이 고개를 들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악신을 죽이러 갑니다! 여러분들께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께 무어라 하지 않겠습니다. 도망치고 싶은 분은 도망치십시오. 가족들을 데리고 숨으십시오. 하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십시오!"

드디어 좌중은 내가 바라는 상태가 되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은 지금, 단순히 믿는 이를 따라서 전장에  게 아닌, 가족들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나와있다는 것을."

그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등을 돌려 도망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병장기를 굳건히 쥐고, 성벽을 원수처럼 바라보는 이들을 보며 나는 투구를 뒤집어쓰고 후드를 눌러썼다.

당기는 손을 따라 바짝 당겨진 후드가 내 투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읊조렸다.

"신을 죽이러 갑시다."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고, 나는 등에 짊어진 거검에 손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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