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봄의 순례자
전장에 내려선 나를 필두로, 병력은 빠르게 제도 앞을 점거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공성병기가 나아가고, 전장의 앞열을 막아내기 위한 보병들이 병장기를 들고 앞으로 나서는 모습에서는 이전에는 없던 굳건한 결의마저 느껴졌다.
연설 효과 덕분인지, 아니면 저들이 나름대로 생각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효과가 나온다는 점에서 불만은 없었다. 기실, 따져볼만한 이유도 없었고.
그렇게 자리한 보병의 양익에 궁병이나 소수의 기병이 자리해 개문하고 뛰쳐나올 병력을 경계하고 있는 동안, 잠잠하기만 했던 제도의 외벽을 타고 흐르던 촉수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후 오 오 오 오 오
바람이 갈라지고, 공기가 파열하는 소리와 함께 제 몸을 틀어올린 촉수가 기지개를 켜는 듯하는 모습.
평범한 사람이 아닌 나조차 인상이 찌푸려지는 광경에, 방금 전까지 의지를 다지던 병사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그 촉수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성벽의 돌덩이를 떼내어 던질 것만 같은 모습과는 다르게, 그렇게 제 몸체를 꿈틀대던 촉수는 다시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려앉은 때에, 우리는 어느새 열린 성문으로 걸어나오는 병력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오는 병력은 꽤나 기이했다.
황폐화된 도시에서 걸어나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반짝이는 갑주에 잘 단련된 무기를 든 기사들.
그런 고급 병력이 드문드문 섞여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그렇지 않았다.
허름한 갑주, 사슬조차 없이, 대부분이 평범한 천갑옷이거나 대충 털가죽을 둘러둔 것에 가까운 복장.
거기에 무기 역시 비루하고, 멀리서 보기에도 사기가 높아보이진 않았다.
그 허름한 차림과 무구에 어울리게, 그들은 금방이라도 세상이 멸망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은 채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행진에 힘은 없고, 전의도 없었다. 과연 이게 적인지, 아니면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고기방패인지 갈등하는 사이에, 그들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부 우 우 우 우 우 우 우
근위대장의 지시와 함께 뿔피리가 울려퍼진다. 울리는 소리에는 사전에 담은 신호가 담겨 있었다.
길게 울리는 것은 전투 대열을 잡으라는 신호. 보병이 앞열에서 버티고, 쌍익의 기병과 전사가 휘몰아치기 좋은 진형.
상황을 지켜봐 언제든 들이닥칠 때가 되면 기병으로 성문을 공략하거나 그대로 보병과 투닥거리고 있는 적성 병력을 일소하는 전략이었다.
상황을 전혀 모르겠는 비 군사 전문가인 내게는 그냥 뭔지 모를 움직임으로 보였지만, 기사단장에게는 아닌지 그는 양손에 검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팔 언제 나으셨습니까?"
"아, 살로메양이 시제품을 실험해야 한다길래 자원했습니다. 그간 팔이 없어 현역 시절만큼은 못 싸웠는데, 이제 그 반절은 하니 만족스러울 다름이지요."
쌍검충이었나. 의외인 면이라고 놀라워 하기에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곧장 쏠리기 시작하는 이목을 따라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전장은 확실히, 예상대로였다.
허름한 장비를 가진 이들이, 낮은 전의로 맞서싸워 봤자 사기로 오를대로 오른 훌륭한 장비의 병사들을 감당할 순 없었다.
거의 한 명이 두 명을 상대하는 형국의 수적 차이도 있었다. 이쪽의 병사가 한참은 더 많았다.
그 삭막할 정도의 숫자놀음에 눈을 가늘게 뜨니, 과연 적측의 기사로 보이는 이들은 꽤 솜씨가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잘 버티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버티고만 있는 수준이었고, 수적 열세를 풀어내기 위해 가세하는 잡병들은 우리 측의 병사들이 잘라냈다.
그럼에도 사상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사상자가 없으려고 해도, 여기는 전장이었다.
확실히 예상대로,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날아온 무기에 다치거나 죽는 이들이 생기고 있었다.
언제 끼어들어야 하지? 언제 뛰어들면 적당하지? 고민하며 전장을 둘러보았지만, 내가 찾는 건 보이지 않았다.
준신, 없음.
마법사, 없음.
봄의 순례자, 보이지 않음.
적측에서 마법사나 준신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우리 편의 마법사나 메이, 일부 정예병들은 전장에 합류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무기를 쥔 채 전장에서 물러나 관망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살로메나 메이, 대공의 마법사 등이 화력을 투사하긴 하지만, 전장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전장이 밀리지 않는 건 다행이었으나, 뭔가 석연찮았다.
공성하는 건 우리측, 지켜내야 하는 건 제국측. 그렇다면 우리의 병사들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병력을 온존해야 할텐데, 뭔가 움직임이 묘했다.
문외한인 내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게 현명하지 않았고, 뭔가 그럴 듯한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명령자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무작정 들이받고 있었다.
나는 그 전장을 바라만 보다, 눈을 감고서 내면으로 잠시 침잠했다. 가라앉는 의식 세계 바깥, 둘러싼 껍질 바깥으로 뭔가 희미한 온기와 구불구불하게 퍼져있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봄의 순례자의 신성인 건 확실했다. 착각할 수도 없는 게, 당장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단심문을 위해 내가 해치웠던 이들과 정확히 똑같은 신성이었다.
하지만 눈을 뜨면 그 감각과는 별개인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병사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광경.
거기에 뒤섞이는 화염이나 화살. 빗발치는 죽음 속에서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꺼내쥐었던 거검을 내려다 보았다.
"…가시겠습니까?"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기사단장이 말했다.
그는 아직 나가지 않을 셈인지 쌍검을 손에 쥔 채로 전장을 구경하고만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내가 뛰쳐나가도 전장을 지휘하며 전력을 보존하고자 하는 지휘관 특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좋아, 맡기면 안전하겠지. 애시당초 여기서 쳐박혀 있는 건 내 타입이 아니기도 하고.
난 기사단장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거검을 어깨에 짊어진 채 뛰쳐나갔다.
만약 봄의 순례자가 나와 맞서싸우길 기다리고 있거나, 내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뛰쳐나가서 불러내면 그만이었다. 나는 적의 병력을 향해 다리를 박차면서, 이따금씩 거검을 쥔 손에 주먹을 부딪혔다.
꽈르릉!
울리는 천둥 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 방금 전까지 창칼을 적에게 드밀어넣던 병사들이 달려나가는 나를 보고서 황급히 비켜선다.
삽시간에 트이는 길, 그렇게 트인 길 사이로 내달리다,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바닥을 박찼다.
콰아아아앙!
떠오르는 몸 주변으로 폭음이 울리고,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울린다.
나는 그 소리들을 넋놓고 듣다가 거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가속했다.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와 함께 가속한 몸뚱이가 지면을 향해접근하고, 그에 몰려들던 병력들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흐억…!"
단말마는 숨 삼키는 소리였다. 내 거검이 지면을 내리찍자, 그 진로에 끼어있던 병사 세 명이 뭉개지거나, 부숴지거나, 찢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뜨겁게 데워진 창자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다.
한 번 더.
이대로 크게 횡으로 휘둘러 전장을 트여놓는다.
보병들이 더 밀고 들어와 안정적인 진형을 구축할 수 있도록.
다리를 앞으로 뻗어 몸의 균형을 맞추고, 곧장 검을 횡으로 휘둘러 내게 몰려들던 병사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쪼개버렸다.
콰드드드득!
내 거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날아가는 시체들은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구태여 조각을 그러모아도 온전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처럼.
나는 그 틈바구니로 나아가려다.
카아아아아앙!!
[불굴의 정신이 자동 발동됩니다.]
날아오는 수십개의 화살에멈춰섰다.
느려지고, 3인칭으로 바뀐 시선으로 본 내 몸뚱이를 향해 화살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거의 내 전방위를 뒤덮고 있는 화살들은,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궤적이 움직여 내게 접근하고 있었다.
씨발 이게 뭐야?
단순히 화살 공격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화살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었다.
절대 일격에 나를 침묵시킬만큼 강력하진 않으나, 전체가 금속으로 이뤄진 화살에 담긴 거력은 보통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게 내 전방위로, 거의 동시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걸 전부 막아내기엔 내 기술이 부족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막아내는 것 뿐.
거검을 들어올려 휘두르면 빈틈이 난다. 그 사이에 몇 발 쳐맞겠지.
그렇다고 피하기엔 전방위다. 결국 거검을 들어올려 막아냈다. 검첨에 닿는 즉시 팔을 움직여, 피탄 면적에 검면을 끼워넣었다.
카카카카카카캉!!!!
그렇게 튕겨나는 화살들에는 상당한 위력이 실려있었다. 나라고 하더라도 넋놓고 전부 쳐맞으면 꽤 아플, 거슬릴 수 밖에 없는 거력.
전체가 금속으로 되어있음에도 온전히 전달된 속력과 충격량은, 잔잔한 떨림을 팔에 전달했다.
그때 격돌했던 가을의 마녀 수준은 아니지만, 이정도 거력에 신성이라면.
"준신새끼들…!"
어디에 숨어있는지, 궤적을 읽어내는 것도 무리라 어찌할 바는 없었다.
나아가야 하나? 아니면 화신을 써? 아니면 물러나?
조금 더 물러서며 느려진 세상 속으로 파고드는 전사의 창칼을 주먹으로 때려부수고, 그 아가리에 꽂아 머리를 터트린다.
터지는 피륙의 감촉과 함께 다가오는 화살들이 보였다.
그 화살들은 내가 보고 있지 않은 방향에서부터 오는지, 주로 하늘 위에서 내리꽂히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하늘 위에 있진 않을테고, 숨어있는 곳은 알 수 없다.
아무리 화신 강림이 범위 공격이라지만, 아무대나 때려박아서 전멸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쿨타임 24시간이 너무도 뼈아팠다. 비장의 수단은 아껴둬야 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나아갈지, 말지.
나아가면 위치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화살들에 대처하면서 혹시 모를 함정까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나아가지 않으면, 안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아무것도 나아지는 건 없게 된다.
저 새끼들이 뭘 꾸미든, 알고서 당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성질상, 그런 건 내게 맞지 않았다. 후, 하고 내쉬는 숨을 따라 호흡을 뱉어내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화살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가각!
쇠붙이가 긁히는 소리, 거검을 따라 튀는 불똥, 튕겨져 나가는 화살 사이로 내가 달려나갔다.
최대한 화살의 시발지를 알아내기 위해 3인칭으로 변한 시점을 움직여 주변을 훑었다.
넓찍해진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적병들은 나를 보고 겁에 질렸음에도 창을 내질러오고, 화살들은 내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침착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다가오는 화살들의 숫자는 상당했다.족히 20은 넘는 숫자.
실제로 준신이 그 이상은 되리라고 예상했던 걸 감안하면, 저 20개의 신성이 담긴 화살은 모두 준신이 쏘아낸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준신 궁병대라니, 끔찍한데.
그 좆같음에 나아가던 속도를 끌어올리려는 순간, 나를 향해 치닫는 화살들의 숫자가,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퍼버버벅! 카아앙!
"씨발…."
차라리 근접전이라면 한 동작에 한 놈씩, 철저하게 찢어죽일 수 있을텐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화살만 쏘아대는 준신 새끼들의 좆같은 화망은 내가 나아가게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물러나야 했다. 불굴의 정신에 유지 시간은 달리 없지만, 날아드는 화살의 숫자는 많고, 너무 앞으로 나간 탓에 주변엔 적병이 많았다.
뒤로 물러나 몸을 빼내니, 내 진로를 따라 화살이 후두둑 꽂혔다.
투두두두두!
카앙!
방패를 들어올려 화살을 빗겨내고,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3인칭으로 파악하여 피한다.
그런 기예에도 불구하고 뒤로 돌아 도망간다는 사실 때문인지 모든 화살을 피해내진 못했다.
갑주를 두들기는 화살들에 갑주가 움푹 패였다.
그걸 겨우 버티며 적진을 벗어났을 때, 화살은 그쳐있었다.
마치 내가 물러나는 게 바라던 것인듯, 화살은더 이상 날아오지 않고 하늘은 잠잠했다.
적진에서 다시 화살이 날아와 아군 병사들을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고요했다.
나는 그게 몹시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마치 속임수나 음모에 대놓고 말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무작정 돌격으로 위치를 알아내기도 요원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뒤로 물러나 기사단장과 대공이 서있는 자리로 돌아오니 그들은 내게 시선을 보냈다가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전장은 아직까진 우리 측이 우세했다.
적병들이 제 기량을발휘하지 못하고, 보란 듯이 죽어나가면서도 엉망진창인 진형을 해결하고 있지 않은 탓처럼 보였다.
다소의 사상자는 여전히 나오고 있었으나, 조악한 진형을 밀어붙이며 우리 측 병사들은 적을 압박하고 있었다.
양 옆으로 들이치는 장창병과 기병에, 허물어지는 적의 보병진이 일품이었다.
"…이상하군요. 마치 희생자를 더 내려는 듯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 진형을 지그시 바라보던 기사단장이 툭 내뱉고, 대공은 제 백골 턱을 쓸면서 침음성을 흘렸다.
나도 기사단장의 말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깊숙히 파고드는 것을 경계하고, 내게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해오지 않는 것이 마치 시간을 벌기 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을 벌어서 뭘 한단 말인가? 장기전으로 간다고 딱히 유불리가 뒤집히는 것도 아닌데.
삭막하게 흐르는 전장을 바라보는 순간, 그간 조용하던 대공이 흠칫했다. 그리고는 제 백골손을 뻗어 내게 손짓했다.
"…대전사님. 저기를."
"예?"
갑자기 왜 부르는 건데. 대공의 머리가 향해있는 전장으로 고개를 돌리니, 과연 대공이 나를 부를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으으아!"
"뭐, 뭐야! 떼어줘! 떼어줘!!!"
"크으윽, 떨어져 이 개자식아! 쇠뇌병!! 빨리 쏴!"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곧 죽을 것처럼 싸우고 있던 적병들이, 제 본래의 피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핏줄이 돋아난 채, 날뛰고 있었다.
그렇게 날뛰는 적들은 인간을 뛰어넘은 용력을 보이며 갑작스럽게 밀어붙였고, 그에 아군 병력들이 점차 물러났다. 물러서는 이들의 얼굴에 번진 당황감은 선명했다.
"이런… 마법사들, 당장 전장에 지원을…."
당황감을 숨기며 제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대공이 멈칫하고, 나와 기사단장, 대공은 물론이오 전장에 있던 모두가 성벽을 바라보았다.
크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성벽에 매달려있던 거대한 촉수, 그 거대한 질량이 비명을 내지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