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9화 〉봄의 순례자 (179/274)



〈 179화 〉봄의 순례자

갑자기 출몰하기 시작한 촉수 병사들과 거대 촉수는, 일반 병사나 마법사가 상대하기엔 너무도 강력했다.


사실 봄의 수하가  병사들까지는 마법사의 선에서 나름 처리가 되기는 하나, 저 성벽에 매달린 채 회전하고 있는 촉수는 아니었다.


체급에서부터 어지간한 드래곤을 찍어누르는 크기. 성벽을 지지대로 삼는지 움직일 때마다 성벽이 삐걱이고 부숴지려고 하고 있었다.


평범한 촉수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이미 떨어져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어야겠지.

하지만 그 촉수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촉수들이 성벽에 휘감겨 바닥에 쳐박혀 있었고,  형태는 무척이나 익숙하고 단단한 구조를 닮아있었다.

뿌리.

 거대한 검은색 뿌리는, 제 가지  일부를 하늘로 향하며 구름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전장에서 거기까지의 거리는 꽤 된다. 그러니 놔둬도 당장에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게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많은 걸 시사했다.

예를 들자면, 봄의 순례자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뜻이라던지.

즉, 내 체급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인의 힘과 우수한 기동력, 봄의 순례자가 특히 쥐약인 화염을 사용할 수 있는 내가 아니라면 해결은 커녕  촉수에 전부 개죽음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편으로는 이상하기도 했다. 봄의 순례자가 나의 제도  진입을 저지하려거든, 제 병사들이 전부 죽은 후에 해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심지어 준신들도 남아서 숨어있는 상태다. 당장 저런 모습을 보여봤자 의미는 없었다.

뭔가 얼추 심층적으로 보이는 계획을 간파하기엔 단서가 너무 없었다.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촉수 저지를 위해 뛰쳐나가려는데 나보다 먼저 무언가 병사들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뻗어나갔다.


"…메이?"

그건 메이였다. 잘 뻗은, 일견 완벽 그 이상으로 보이는 전투마에 올라탄 메이는 앞으로 달려나가며  개의 화염구를 띄워내고 있었다.

띄워진 화염구가 불어나고, 늘어나고, 거대해진다. 그렇게 수십의 화염구를 곧장 쏘아낸다.

콰가가가가가!!!

날아간 화염구들은 드라마틱한 소리를 내며 촉수에 틀어박혔다.

평소라면 그정도로 싸움은 끝나야 할테지만, 과연 봄의 순례자도 불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온 것인지 화염에도 불타지 않고 멀쩡했다.

오히려 그 고통에 분노하는지, 촉수가 그 거체를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이런 젠장… 메이!"

이대로라면 깔린다. 말의 기동력 정도로는  촉수의 공격을 온전히 피해낼  없다. 내가 나아가려는 순간, 내 어깨를 대공이 붙들었다.

"무슨…!"


"메이님에게 맡깁시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뭐를? 쥐포 되는 거? 내가 불안한 눈을 다시 앞으로 향했을 때 보인 건, 예상을 넘는 성과였다.


메이가 올라탄 백마는 말이라고 보기 힘든 기동을 선보이고 있었다.

촉수가 내려찍어지는 순간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뛰어오른 높이도 상당하지만, 메이는 거기에 추진력을 더하는 것인지 화염을 휘둘러 가속했다.


가속한 백마는, 촉수가 휘둘러지는 궤적을 빗나가 그대로 촉수 위에 올라탔다.


올라탄 백마는 즉시라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그 촉수를 박차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땅에 내려왔을 때에는, 촉수의 타격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채였다.

그 위에 타고 있는 메이는  이마를 쓸고서 화염 마법을 쏟아냈다.


해일처럼 몰아치는 화염이 촉수를 뒤덮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비명이 전장에 울려퍼졌다.

"세상에…."

"놀랍지요. 저도 압니다. 메이님은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전투에서의 감각도 좋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죠. 마법의 수준은 높지 않으나, 전투에 마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저보다 익숙합니다."


물론 그야 그렇겠지. 메이와 내가 해내왔던 싸움과 해치운 적들을 감안하면 오히려 마법을 전투에 응용할 줄 모른다는 게 이상할 수준이다.

근데 저건…  예상을 좀 넘겼는데?


메이의 전투력에 벙쪄있던 내가 무의식적으로 나아가니, 내 앞에 화살이 다발로 날아와 쳐박혔다.


투두두둑!


내가 나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박힌 화살은 일렬로 늘어서 울타리를만들어냈다.


명확한 경고. 넘으면 사격하겠다는 뜻.


내 행동을 강제하고, 알면서도 속으라고 강요하는 듯한 처사였다.


나는 그 화살들을 보면서 '아, 알겠다. 가지 말라는 거구나.' 하고 납득하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솟았다.

수작을 부리고 있지만 다가서지 말라는 경고에, 화가 나 이를 바득 갈고서 화살을 발로 짓밟아 뭉갰다. 뭉개지는 고철덩이는 뭉쳐 일그러지고, 내 근육은 꾸득꾸득 소리를 내며 수축했다.

분명 뭔가 꾸미는 게 있었다. 준신들이고, 봄의 순례자고, 뭔가 꾸미는 게 있지만 그게 뭔지 알아차릴  없으니 대처할 수 없었다.


만약 뭘 하려는 건지 안다면 즉시 대응할텐데, 애석하게도 내가 아는 건 봄의 순례자가 가진 신성이 이 전장 전체에 넓게 퍼져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불길하기만 했다.


멀찍이서 병사들의 고함과 죽어가는 소리, 메이가 쏘아내는 마법에 고통스러워 하는 촉수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게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일이 단단히 꼬일 거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등을 돌려  뒤에 서있는 백골과 노인을 보았다. 그 둘은 박혀있는 화살이 우그러진 걸 보더니 불안한 눈과 공허한 눈구멍을 내게 향해왔다.


"혹시  화살을 쏘는 놈들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견제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기사단장부터 미안하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더니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만약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직선에 가깝거나, 곡선이기만 했다면  수 있었겠지만… 그 화살들은 제가 인지하기 힘든 속도로, 마구잡이로 방향을 꺾으며 주현성님께 당도했습니다. 제 능력 밖입니다."

어쩔수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인 대공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고개를 돌려 대공을 바라보니, 대공은  백골만 남은 턱을 짚어 훑더니 손을 뻗었다.


촤르르르르락!

억지로 끌려나가는 사슬과 같은 소리를 내며 쏘아진 마법은, 반투명한 막의 형태로 전장을 뒤덮었다.

그렇게 뒤덮여진 전장에서는  어떤 변화도 없었으나, 그걸 사용한 대공에게는 아닌지 다소 노골적인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찾았습니까?"

"아뇨,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너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지금 교전 중인 전선에서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마 탐지를 방해하는 성유물이나 마도구, 장비 등이있는 모양입니다. 혹은… 주현성님이 찾는데 애를 먹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권능일 수도 있지요."


하는 말은 명확했다.신성으로 역추적을 하기에는 봄의 순례자의 뿌려진 신성이 너무도 짙어 준신의 신성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거기에 탐지마법을 사용한 대공이 하는 말이니, 그들은 내게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준비를 해온 모양이었다.

"씨발…."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조바심이 났다. 단순히 쳐박혀 있는  내 취향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도  취향이 아니었다.

전황은 지금 서서히 밀리고 있었다. 갑자기 변이한 이들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싸워대거나, 인간을 넘는 움직임이나 완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뒤로 물러나있던 정에들이 전투에 참여했다. 멀찍이서 강철의 팔다리를 뻗어 싸우는 맹주와 화살을 연달아 쏘아내는 세네카가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더 많이 잃는다. 멋드러지게 연설해놓고 잃는  그다지 바라지 않는 바라, 나는 대공과 기사단장의 이목을 끌어 간단히 명령했다.

"전선을 도와주세요. 저는 앞으로 가보겠습니다. 다소 다치더라도… 초재생 물약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준신들을 처리하고 합류하겠습니다."

"…저희가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다름입니다."


"아뇨,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까지 해준 것만 하더라도 감사한 일이죠. 진심입니다."


기사단장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에 후드를 드리우며 쌍검을 뽑아들어 제 부하들에게 갔다.

그의 뒤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이 말을 이끌어 그에게 다가가고, 기사단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에 올라탄 채 전장으로 향했다.

말을 달리는 기사단은, 오랜만에 되찾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인지 기병들과 함께 변이한 적의 측면을 타격하고 있었다.

"저도 전선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몸조심 하시길."

대공 역시 전선으로 향하고, 마법의 불빛이 솟아오를 쯤에 나는 화살들을 바라보았다. 내 발에 짓밟혀 뭉개진 화살들을.


위협적인 외관에 확실한 위력이 몸소 느껴졌으나  때 나는 그깟 부상을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싸웠었다.


초재생 물약 같은 이적이 있는 한, 사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거검을 꺼내들어 손에 쥐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투두두두두두!

쏘아지는 화살들의 소리는   영화에서 보았던 총격음과 비슷하게 땅에 쳐박혔다.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듯 싶은 화살들마저도 치명적인 궤적으로 꺾이며 나를 향해 쇄도하는데, 그 중 어떤 화살도 전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직 나를 향해서만 날아왔다.


카아아아앙!

카각

쩡!


내리는 화살비는 온갖 방향으로 나를 노려왔다. 거검을 휘둘러 대부분의 화살들을 거둬냈음에도, 일부 화살들은 내 옆구리나 투구를 노리며 방향을 전환했다.

그  대부분을 불굴의 정신으로 감속한 와중에 방패나 다리를 휘둘러 꺾어내고 튕겨냈으나, 일부는  몸뚱이에 부딪히고 갑옷 표면을 구겨냈다.

색적하기 위해 뛰쳐나온 길이었지만, 색적을 하기엔 화살들의 궤적이 지나치게 기묘했다. 그 시발점을 찾아낼 수 없게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지, 하늘로 떠오른 화살들은 방향을 꺾어 내게 내리꽂히기도 했다.


최대한 전부 쳐내면서 나아감에도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방어와 동시에 색적을 해낼 수는 없었고, 불굴의 정신으로 인해 3인칭으로 변한 시점으로도 준신의 위치가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발이 묶여서  나아가지도 못한 채로 나는 거검을 휘둘러 튕겨내고, 검면을 밀어내어 화살들을 튕겨냈다.


차라리 화신을 써?


비장의 수단을 벌써 쓴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으나, 차라리 그렇게 짐작가는 곳을 조져 연막도 피우고 피해도 입힌다면 기회를 충분히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내가 손을 하늘로 뻗어올리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콰직! 콰지직!

선명한 피륙음이었다. 내게서  것도, 내 근처의 누군가에게서 들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전장, 그 한복판의 적병에게서 울린 소리였다.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니 참상이 있었다.


일제히 으깨지고 있는 적병들.

바닥에 짙은 피를 뿌리며 터져나가는 것처럼 피를 흩뿌리는 그 시체들은, 공통적으로 검은 핏줄에게 압박당해서 죽는 형태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 죽음 사이로 피가 비처럼 내리고, 내린 비가 바닥에 고였다. 고이는 웅덩이가 붉으니 섬뜩하기도 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웅덩이 안에서, 무언가 자라났다.

자라나는 것들은 무척이나 익숙한 검은 광택으로번들거리고, 불길한 신성을 줄줄이 뿜어내고 있었다.


봄의 순례자의 뿌리였다.


"…이런 씨발?"

그 촉수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뿌리라는 역할에 어울리지 않게 살점에 뿌리를 내렸다.

육편에 뿌리내려진 검은 촉수들은 마치 혈관처럼 그 살점을 잠식하고, 이어서 땅을 뒤덮었다.

"으으아아아!"

"도망, 도망가! 후퇴!"

적병들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렇게 자라나는 뿌리들이 인간을 잡아채 바닥에 패대기채고, 뿌리를 쳐박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 기괴한지 아군들은 그 광경에 바로 등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광경을 보며 생각헀다.

"…지저인가!"


씨발, 그러니까 못 알아채지. 그간 신성이 느껴지나 보이지 않았던 건, 지저에 제 본 모습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알게 된 순간 행동은 빠르게 짜여졌다.

 뒤로 돌렸던 거검을 앞으로 돌려 쥐고,머리 높이 들어 힘을 끌어모은다. 아직까지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가로막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가로막지 않는다면 좋지. 방해 없이 내리찍을  있을테니.


바로 치켜올렸던 거검에 화염을 피어올렸다.

치솟는 화염은 거검의 길이보다 높이 치솟아 하늘을 향해 일렁이고, 나는 그것을 3인칭으로 관람하면서 전신의 근육과 여력을 쥐어짜냈다.

일격에끌어낸다. 흡, 하고 들이킨 숨과 함께 내리찍자, 땅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갈라지는  사이로 자라는 뿌리들이 끄집어내져 꿈틀거린다.


그렇게 솟아오른 뿌리들은, 무수한 눈동자를 단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빠르게 해치우고 전장으로 합류해야 한다. 무기를 들어올리려는데, 뿌리가 일제히 내게 보내던 시선을 거두더니, 마치 지네와 같은 모습으로 바닥을 기어 내게서 멀어졌다.


"어, 씨발놈아! 기다려!"


멀어지는 뿌리들은 바닥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흙을, 뭔지 모를 것들을 흩뿌리며 앞으로 달려나가는데, 달려나가는 자리는 짙게 피가 깔려있는 전장이었다.


전장에 도착한 뿌리는 응집하기 시작했다.


마치 벌레를 죽여 작게 뭉치는 것처럼, 그 믿을 수 없게 밀도가 높은 혈관과 뿌리들은 제 몸체를 중심으로 뭉쳐 구를 형성했다. 그렇게 형성한 구들이 응집한다.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사이, 그렇게 응집하는 구슬들은 몸에서 뿌리를 뽑아내어 땅에 쳐박았다.

그렇게 바닥에 있던 시체들, 시체로 만든 경단, 바닥에 짙게 깔린 피와 생명이 모두 긁어져 구로 응집되었다.


응집되는 생명력은 너무도 짙어,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있었을 정도였다.


헤로디아가 떠올랐다.제 영지민들의 생명력 일부와  생명이 담긴 체액으로 신성으로 이뤄내려던 그녀를.


이건 그와 유사한 무언가였다.

회오리를 만들어내며 솟아오른 피웅덩이들이 구체로 흡수되고, 내가  구체가 고치와 같은 형태임을 인지한 순간.

쩌적


고치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우화하려 하고 있었다.

그 고치 내에서, 거칠고 짙은 악의가, 신성의 형태가 되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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