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봄의 순례자
타오르는 듯한 감각, 피부 한 조각은 물론, 내장 전체와 신경 한 줄마저도 화마에 휩싸인 듯한 감각이었다.
작열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 중 가장 강렬한 고통 중 하나다.
하지만 주현성은,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기실, 고통이 느껴지더라도 참아넘길 수 있을만큼 전신에 힘이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신성이었다. 타오르는 제 영혼을 거름 삼아 타오르는 신성의 불꽃.
그것이 내면, 주현성의 깊은 곳에 잠들어있는 영혼을 타고 불타오르고 있었다.
유리된 고통 대신 고양감이 찾아왔다. 전능감 역시 그러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잔잔한 고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주먹을 쥐었다.
안에서부터 무언가 당겨오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이 해가 된다는 감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무척이나 편안하고 활력을 돋구고 있었다.
주현성은 숨을 내쉬며 앞을 보았다.
"…뭐?"
봄의 순례자는 당황했다. 주현성이 저런 권능을 습득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거니와, 그가 지금까지 쓰러트려온 신들 중 그 누구도 갖지 않은 권능이었다.
봄의 순례자는 당황감을 숨기려 촉수를 휘둘렀다.
휘둘러지는 검은 촉수는 촘촘히 이어진 액체로 이뤄져 있어, 휘둘러지는 과정에서 그 체적 이상의 소음을 자아냈다. 쏘아지는 궤적에는 살의가 담겨 있었다.
주현성은 그 촉수를 보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불굴의 정신은 옛적에 꺼져있었다. 영혼 발화를 쓰기 전, 자신도 모르게 꺼버렸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촉수가 느리게 보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현성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올렸다. 들어올리는 속도는 평소와 같았으나, 촉수는 아직 그의 지척까지 접근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주현성은 손을 휘둘러 촉수를 떨쳐냈다.
쩌어어어어엉!!!!
울리는 폭음과 함께 산산히 부숴져 흩어지는 촉수. 주현성은 그 작용에 놀라워 했고, 봄의 순례자는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고운 이마가 구겨지고, 몸이 흔들렸다. 뿜어진 충격파는 벌겋게 채색된 지면을 드러냈다.
'뭐가… 일어났지?'
봄의 순례자는 그것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단순한 손등치기였다.
묘리랄 것도 없고, 위력이 실리지도 않은 단순한 공격.
하지만 거기에 가격당한 촉수는 완전히 타들어갔다.
봄의 순례자가 화염 내성을 습득하고, 재생력으로 데미지를 무마하고 있음을 감안하자면 일어난 일은 간단했다.
상상 이상의 화염 데미지. 그것으로 재생과 내성을 무효화하고 촉수를 타격했다.
봄의 순례자는 잔잔한 분석 결과로 인상을 찌푸리고, 주현성을 노려보았다. 주현성은 여전히 멍청하게 선 채,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활력과 위력, 거기에 전신에 깃든 화염. 주현성이 그 화염을 눈치챈 순간.
고오오오오
주현성의 전신에서 후광이 흘러나왔다.
제 갑주와 망토에 어울리는 붉은 후광은, 그의 전신을 빈틈 없이 매운 채로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 후광을 내려다보는 주현성과 노려보던 봄의 순례자가 동시에 깨달았다.
뿜어져 나오는 후광은 열과 화염으로 이뤄져 있었다. 너무도 얇아보이나, 사실은 극도로 응축된 화염에 가까웠다.
마치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 그 화염은 화염 특유의 모양새를 벗어던진 채 후광이라는 형태만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바닥이 타오른다. 주현성이 딛고 있는 촉수의 웅덩이가 타오른다.
기이이이익!
비명을 지르는 촉수들이 제 몸을 꿈틀거리고, 주현성이 딛고 선 자리를 중심으로 웅덩이가 쪼그라들고 불타서 밀려나, 넓게 트이는 순간.
주현성의 머리, 투구 위로 반투명한 뿔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형태는 산양의 뿔을 닮아있었다.
봄의 순례자는 노려보다 말고, 무의식적으로 읊조렸다.
"여름의 도살자…?"
당황과 분노, 난처를 담은 목소리에, 주현성은 주먹을 쥐고 몸을 낮추었다.
아차하며 봄의 순례자가 가드를 올리려는 때에.
―!
주현성은 빛이 되었다.
빛이 허공에 그어놓은 선처럼, 후광이 길게 번져 나아갔다. 나아가는 선에는 단순히 폭력이라고 치장하기에 모호할 정도의 압력이 깃들어 있었다.
투콰아아아아아아앙!!!
포탄을 쏘아내는 듯한 굉음. 그 굉음에 멀찍이 떨어져있던 병사들이 귀를 틀어막고, 짐승이 놀라 기절하거나 죽어나갔다.
그 소리를 자아낸 것은 주먹이었다. 주현성의 단순할 정도로 정직하게 휘두른 주먹.
자세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오버핸드 훅이 봄의 순례자의 얼굴을 으깨고, 그대로 그 몸뚱이를 뒤로 쏘아날렸다.
쾅, 콰아아앙! 콰르르르르르
지면에 두 번 충돌한 후에야 자세를 되찾은 봄의 순례자가 바닥을 죽 미끄러지며 정지하고, 부숴진 촉수 투구 사이로 부숴진 뇌골을 재조립한다. 그녀는 재생하면서도 주현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격돌의 순간, 봄의 순례자는 주현성의 동작을 놓쳤다.
이 강화된 몸으로도.
수녀가 가진 생명 흡수와 자신의 뿌리를 뻗어 지배하는 권역을 합쳐 일대의 모든 생명체를 흡수했다.
심지어 유혈을 초래해 이 육신 하나에 모조리 정착시켰건만, 그런 몸뚱이로도 일순간 놓치고 말았다.
찰나조차 안되는 시간에 가격당한 얼굴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얼굴에 신성을 몰아넣어 재생을 촉진하는 동안, 그렇게 주먹을 뻗었던 주현성이 자세를 거두더니 주먹을 맞부딪혔다.
꽈르르릉!
울리는 것은 천둥과 다를 바 없었다. 열과 함께 굉음을 울리고, 그를 중심으로 다시 몰아가려던 촉수의 웅덩이들이 밀쳐났다. 충격파에 공간이 일그러지다 돌아온다.
"여름의 도살자라고?"
그 중심에서, 주현성이 말했다.
"아니지. 아니야."
봄의 순례자가 그 동작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언어를 받아섬기는 동안.
"네 죽음이다, 이 씨발놈아."
주현성은 준비를 마치곤, 그 신성을 열로 바꾸어 뿜어대는 몸으로 달려들었다.
봄의 순례자는 그에 맞서려, 자세를 단단히 굳힌 채주현성을 맞닥드렸다.
그렇게 일어난 충돌은, 주변을 까맣게 물들였던 웅덩이를 밀어내며 퍼져나갔다.
수싸움이랄 것도 없으며 전략이랄 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힘싸움. 주현성은 달려나가 주먹을 옆구리에 꽂았다.
그 주먹에 가격당한 봄의 순례자의 몸뚱이가 꺾이고, 그렇게 균형을 잃으려는 순간 촉수가 나왔다.
촉수가 붙드는 것으로 균형을 겨우 되찾은 그녀는, 그대로 촉수의 지지 하에 주먹을 휘둘러 주현성의 머리를 가격했다.
뻐억!
투구가 휘고, 반투명한 뿔이 흔들린다. 그에 아랑곳 않고 주현성은 기우는 몸으로 봄의 순례자의 뒷목을 붙잡았다.
붙들린 손에서 빠져나가기도 전에 주현성의 머리가 치닫는다.
쩌억!
퍼지는 충격파. 터져나가는 머리. 봄의 순례자는 우그러진 머리 대신 지면으로 감각을 옮겼다. 시각을 잃었으니 대신할 감각이 필요했다.
그렇게 바라보는 감각으로, 그녀의 육신은 쥐어터지고 있었다.
그녀는 촉수들을 웅덩이에서 뽑아냈다. 뽑아진 촉수들은 주현성에게 달려들어 두들기고, 주현성은 그렇게 촉수들의 난타에 당하면서 몸을 웅크렸다.
머리를 겨우 가린 채 내리꽂히는 촉수에 타작당하던 주현성이 손을 뻗었다. 튀어나온 손에 매달린 신성이 방패를 회전하게 했다. 그렇게 생겨난 톱날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애애애애애애애앵!!!!!
주현성은 그렇게 방패를 휘둘렀고, 휘둘러진 방패는 불타면서 제 적을 타격했다.
으지지지지직!!!
아까와는다른 양상.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재생과 신체능력으로 압도하던 그녀는 다시 신체능력의 균형이 뒤집히자마자 당하고 있었다.
찢어지고, 갈라지면서 봄의 순례자는 물러났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바로 웅덩이 전체를 제 몸으로 응집시켰다.
그렇게 응집한 촉수와 신성이 그녀의 육신을 둘러싼 채 갑주를 생성하고, 그녀는 한층 더 빨라진 채로 격돌했다.
가장 먼저 손을 쓴 건 주현성이었다. 주현성의 주먹이 그의 적을 몇 번이고 때려부쉈던 것처럼 뻗어졌다.
그 주먹에 담긴 힘은 강대하고, 스친 자리에서 열과 폭음을 울려냈다.
봄의 순례자는 몇 번이고 보았던 것을 통해, 주현성이 머리를 노리리란 것을 알았다.
아주 오랜 기간 수학해오고 음모를짜왔던 그녀답지 않은,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상체를 뒤로 물려 피하자, 스친 투구가 우그러진다.
그녀는 그대로 동작을 모방했다. 주현성이 휘두른 주먹의 궤적을 따라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뻗어진 주먹은 주현성의 팔을 겨우 두들겼으나 주현성은 그로 인해 자세가 흔들렸다.
자세가 흔들리자마자 봄의 순례자가 달려들었다. 몸을 낮추고, 주현성의 허리를 붙들며 밀었다.
그 거력과 속도에 주현성은 밀쳐지면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꽈아아앙!
내리찍는 주먹에 봄의 순례자가 바닥으로 꺼진다.이미 열과 압력, 신성으로 파손되던 땅은 푹 꺼지며 봄의 순례자를 그 수렁으로 빠트렸다.
그 수렁에서부터 뛰쳐나오는 봄의 순례자의 발차기. 제 몸 전체를 던지는 드롭킥이 주현성의 안면에 꽂히고, 주현성은 날아가면서 그 발을 붙잡았다.
쩌억!
콰아앙!
날아가며 내던지자 봄의 순례자는 빠른 속도로 다시 지면에 쳐박히고, 주현성은 하늘을 날다 겨우 몸을 뒤집어 착지했다.
콰드드드드득
드롭킥에 실린 거력은 상당했다. 주현성은 제 근력으로도 한 번에 제동되지 않는 것에 분노하는 한 편으로는 기뻐했다.
전투, 대등하게 주먹으로 두들길 수 있는 적수와의 싸움은 고양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짜증나게 술수를 쓰는 것도, 비겁하게 속임수를 쓰는 것도 아닌 서로 물러설 것 없이 격돌하는 싸움.
주현성은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투구 슬릿 너머로 뱉어내고, 앞을 바라보았다.
봄의 순례자가 무너진 지면 너머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현성은 그걸 보며 주먹을 다시 맞부딪혔다.
꽈르릉!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새어나오는 연기. 그가 가속할 때마다 사용하던 검은 연기는, 강대한 열과 신성에 섞여 후광과 같은 빛깔로 타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연기라고 할 수 없을 밀도로 솟아오르는 연기에, 봄의 순례자가 자세를 낮췄다.
제 몸을 두른 촉수를 바닥에 뻗어 구기고, 그렇게 구겨진 촉수를 스프링처럼 만들어 지면에 쳐박았다.
마치 총을 뽑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무법자들처럼, 그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숨을 죽였다.
"덤벼, 씨발아."
주현성의 말이 들린 뒤 봄의 순례자가 스프링을 펼쳐 달려들었다.
화살보다,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봄의 순례자는 이미 검은색 빛살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주현성은 그걸 보며 읊조렸다.
[불굴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이미 가속된 그의 신경이 더욱이 가속되어, 한 없이 느리게 세상을 비춘다.
주현성은 그 속에서 유이하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속도를 뛰어넘은 움직임으로 자신에게 쇄도하는 봄의 순례자.
주현성은 그빛살을 보고서 바닥을 걷어찼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바람이 우짖고, 불이 거칠게 그의 뒤로 따라붙는다. 후광이 주변을 휘황찬란하게 비추며 죽음을 선포하고 있었다.
주현성은 그렇게 나아가며거검을 쥐고, 내밀면서 가속했다.
화염을 닮은 노을색과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신성이 충돌했다.
―!!!!
충돌지를 중심으로 형연할 수 없는 굉음이 터져나오고, 그 굉음과 함꼐 검은색과 화염이 휘몰아치며 주변으로 퍼져나왔다.
그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던 대공은 빠르게 방어막을 펼쳐 제 군대 앞을 보호했다.
쩌어어어어엉!!!!
충격파가 방어막에 닿자, 방어막은 허물어지며 간단히 스러졌다. 밀려오는 충격에 대공은 무릎을 꿇었으나, 병사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러나야 한다. 저 싸움에 휘말리면 전원 죽는다. 대공이 생각하는 것에 기사단장도 동의하는지, 그들은 짧은 의견을 주고받고 군대를 뒤로 물렸다.
물러나는 군대는, 아직도 충돌하고 있는 두 신성자를 보았다.
그 충돌의 끝에서 주현성이 튕겨져 나가고, 봄의 순례자가 바닥에 쳐박혀 지면 깊숙히 쳐박힌 후에야, 그들의 싸움은 아주 잠시 중단되었다.
지면에서 걸어나오는 봄의 순례자는 전신이 너덜너덜했다. 이미 성한 곳은 없고, 기껏 뭉친 촉수들은 지면에 제 몸을 떨어트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주현성 역시 멀쩡하진 않았다. 주현성은 자신의 몸에 부딪힌 성벽에서 몸을 일으키고, 부숴져 허물어지는 성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너덜거리는 배갑을 억지로 끼워맞췄다.
주현성과 봄의 순례자가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가운데, 두 신성자 모두 짙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