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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화 〉봄의 순례자 (183/274)



〈 183화 〉봄의 순례자

꿰뚫린 머리에서부터 무언가 돋아났다. 돋아난 그것은 주현성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상징성으로 가득차 있었다.

우뚝 솟아난 끄트머리는 날카롭고, 섬뜩한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검은색, 형연할 수 없는 타르에 피가 뒤섞인 듯한 검붉은 빛깔. 주현성은  색을 인지하자마자 봄의 순례자를 보았다.

봄의 순례자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상 재생하기엔 신성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창에 어떤 특수한 권능이나 기능이 깃들어 있는 것인지는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할 것이며, 사고하지 못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주현성은 봄의 순례자를 죽이려고 했다. 죽일 예정이었다. 가능하다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해치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주현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봄의 순례자가 부족한 뇌로 뭔가 하려고 했을 때, 그 행동은 허무하게도 무위로 돌아갔다.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화살들은 모두 신성을 담고있어, 재생력을 잃어가는 봄의 육체 따위는 가볍게 쪼갤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몸이 꿰뚫린다.

퍽, 퍼버벅, 콰득!

여섯 발의 화살이 차례로, 하지만 그 순서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빠르게 쳐박혔다. 화살이 꽂힐때마다 들썩이던 몸뚱이가, 마지막 화살이 박혔을 때에는 완전히 힘을 잃었음을, 주현성은 깨달았다.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으레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스러지려던 몸이, 눈을 뚫고  이상 튀어나온 창 때문에 걸려 쓰러지지 않았다. 창이 몸을 지지한 채로, 그 목이 쭉 젖혀지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젖혀진 목에, 벌려진 입. 신성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는 몸뚱이에 주현성의 말이 멎었다.

봄의 순례자의 마지막 표정은, 드디어 제 모든 것을 버리고 투쟁을 택한 이답지 않게더럽혀져 있었다. 창과 화살, 허망하고도 무의미한 죽음으로.

주현성이 눈을 돌리자, 구석에 떠있던 메세지가 점멸했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2/4]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2/5]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2/4]

시스템조차 뭔가를 혼동하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눈 앞의 신이 이제 죽었음을 명확히 알리고 있었다.

주현성은 벌리고 있던 입을 닫으며 그 너머를 보았다.

 너머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몸에 두른 털가죽 망토는 화려하다.


머리에 쓴 왕관과 투구의 일체형인 무언가 역시 그러하다.

그 화려한 존재는, 맑게 웃었다.

"아무 생각 안 들었나?"


"…뭐?"

"널 집요하게 쏴대던 준신들이 더 이상 쏘지 않을 때에, 너와 저 가증스러운 신이 싸우고 있음에도  누구도 쏘지 않을 때에,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했나?"

"…너."


"하하, 목소리를 듣자하니 예상하지 못한 거 같군. 허무한가?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며, 서로의 목숨을 개처럼 물어뜯으며 싸울 때는 언제고 적수가 죽으니 허망하기라도 한가?"


주현성은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는, 좀체 화가 예전만큼 자주, 강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이상하긴 했지만, 그 역시 자주 화를 내고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리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것에 대해 은은한 혐오를 품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변화를 좋다고 여기고 있었다.


비록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은 그의 분노로 말미암아 발동하는 것이라 본능으로 회귀하라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지만서도.


그럼에도 그는 편의점 점장 주현성일 때만큼 분노하지 않는 신살자 주현성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현성은 여러가지 낱말들이 떠오르는 족족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세계에 오기 전에는, 자주 이런 감상을 느끼고는 했었다.


말은 언어가 되지 않고, 고동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거칠게 맥동한다.

피가 전신으로 돌고, 내장으로 가야 할 모든 영양이 근육과 뇌로 향한다.


남는 것은 오로지 공격성. 끔찍할 정도의, 흉포한 공격성.


그가 숨을 내쉬니, 분노로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근육이 수축했다. 수축에 허공이 일렁이는 듯 보였다.

그걸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이는 웃었다.

"너와 저 잡신. 둘 다 완전히 소모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 그냥 둘 중 하나를 죽이려고 하거든 승산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너는 그 어떤 궁지도 이겨내온 신을 죽이는 이고, 저 잡신은 배신과 음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였으니까. 그러니 예상하지 못한 거겠지. 설마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들 거라고 말이야."

웃음소리가 주현성의 신경을 긁어놓았다. 저만치, 메이가 고전하던 촉수가 스러져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현성의 시선은 두 번 이상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근데 좀 놀랍더군.  자네가 죽는다는데 걸었거든. 이래뵈도 전략전술은  배워 능통하다고 생각했는데,  저 잡신이 자네를 두려워 했는지 알겠어. 자네는 정말 변수로군.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완벽한 변수! 신이 애먹을만도 해."


박수치는 소리에, 주현성은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물었다.


"넌, 누구냐."

"나? 흐음, 곧 설명할 참이었는데. 참을성도 없군.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소개하지."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난 핑거스냅이 주변에 둘러져있던 마력을 거두고, 마력 너머에서 20명 가량의 궁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기 체형과 집어넣고 있는 무장, 몸에 두른 것은 달랐으나,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신성.


약소하지만, 주현성을 죽여 신성을 빼앗을  있는 기본적인 자격.


주현성이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를 향하고 있을 때, 그의 몸을 두르고 있던 후광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나는  미력한 군주들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이이자 제국의 황제, 대륙의 적법한 통치자이자 만물의 주인인… 아, 알게 뭐람. 가장 중요한  그게 아닌데."

주현성은 그 투구 너머, 그 황제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러했다.

황제는 웃으며 다소 과장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새로이 신이 된, 군주들의 아버지라고 하네."

그 말에 반응하는 듯, 시야 귀퉁이의 메세지가 빠르게 깜빡였다. 신의 최대숫자를 뜻하는 4가 5로, 5가 4로.


지금 죽여야 한다. 아직 신성에 적응하지 못한 지금. 말미의 이성으로 주현성이 판단하자, 그는 앞으로나아가며 도끼를 쥐었다. 낙인이  움직임에 반응하여 화염을 부여했다.

그 꼴을 찬찬히 바라보던 군주들의 아버지가 손을 휘저었다.

"헛수고 하지 마, 신살자. 나는 자네를 꽤 고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비장의 수라던 것들을 모조리 소모하고, 남은 건 적당한 괴력과 화염 뿐이니, 자네에겐 승산이 없어.  수를 보라고. 아무리 무술의 달인이라고 할지라도 한 번에 스무 명을 상대할 순 없는 법이야."


주현성은 나아갔다. 저벅거리며,죽은 뿌리들을 즈려밟으며.


"우린 자네에 대해 완벽히 조사했어. 동대륙에서 왔고, 전투의 기술은 미력하나 압도적인 힘과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지. 무예를 모르나 싸우는 법, 죽이는 법, 이기는 법 정도는 완벽히 터득하고 있는 기인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 자네가 이기고 죽이고 싸우는데 쓰는 도구들은 전부 다 소진되었지. 그렇지 않은가?"

 이죽거리는 말투에 주현성은 주먹을 쥐었다. 공간이 일렁거렸다.


"아까 그 잡신을 밀어붙일 때 쓰던 기술은 꽤 놀라웠지만, 그것도 지금 소진된 것 같고, 연달아  수 없는  같은데 말이지. 심지어 자네가 가진 가장 강력한 한 수는 방금, 그 잡신에게 쓰지 않았나? 그 덕에 내가 신을 죽일 수 있었고 말이야."

"아가리 닥쳐."


"교양 없긴. 물론 내게 지금  짜증날 순 있지만, 잘 판단해야지. 주현성. 자네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있어. 지금 내가 손을 내리면, 자네는 스무 명의 준신과 이제 새로 탄생된 신하고 싸워야 해. 그간 푹 쉬어서 피로 하나 없는 완전한 신과."

주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주먹을 세워 부딪혔다.

―!

평소와는 다른, 압도적인 질량으로 부딪힌 사슬갑주가 비명을 질렀다. 그에 군주들의 아버지는 눈쌀을 찌푸렸다.

"시끄럽기는. 정말 우리 모두와 싸워 우리를 전부 죽일 수 있겠나?  몸상태로? 가진 수를 전부 소모한 채로? 말도 안되는 소리. 자네가 지금 해야할 건, 무릎을 꿇고 내게 자비를 구걸하는 것 뿐―"


투쾅!

대포를 쏘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주현성이 일순 시야에서 사라졌다. 강화된 감각과 제국의 재산으로 긁어모은 마법서적을 모조리 탐독한 군주들의 아버지는,  특기인 공간마법으로유리시킨 공간이 쪼개지는 것을 보며 제 몸을 이동시켰다.

쩌저저저적


콰창!

"윽, 이게 무슨…!"

주현성이 날아들어 군주들의 아버지가 있던 자리를 가로지르자, 그 자리에 남아있던 방어장이 산산히 부숴져 유리 조각처럼 흩날렸다.

공간 자체를 유리하여 날아드는 모든 공격을 방어하는, 빠르게 지치게 되지만 그가 쓸 수 있는 것 중 가장 강력한 방어 마법이었다.


하지만 주현성의 주먹은, 너무도 가볍게 그 방어장을 으깨버렸다.

군주들의 아버지가 일순 파랗게 질렸다가, 손을 뻗었다.

"처리해!"


그 명령에, 화살들이 곧장 활시위를 떠났다. 활시위에서부터 단단하고 유연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준신이 아니거든 쏠 수도 없을 고급품.

쏘아진 화살들은 하나하나가 공성병기를 뛰어넘는 위력이었다.

투투투투투!!

콰콰콰콰콱!


공중에서 자유롭게 궤적을 바꾸던 화살들은, 목표를 잃고 바닥에 쳐박혔다. 우수수 가시가 자라나는 땅들은 마치 하늘이 뒤집힌 듯 솟구쳤다.


그 중심지, 주현성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전신에 검은 갑주를 뒤집어 쓴 채.

"이런 젠―!"


으직!


주현성이 스치는 거리에 서있던 준신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행해진 공격은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다. 단순히 너무 빠르고 너무 강력해서, 주현성의 궤적을 읽을  있는 준신이 없었다.

다만 단면은 확인할 수 있었다. 단면은 무척이나 어지러이 뜯어져 있었다.


주현성은 불타는 분노로 바닥을 걷어찼다.


쩌어어어엉!


바닥이  움직임에 갈라지고, 파편이 어지럽게 튀었다. 튀어다니는 파편 속에서 준신 하나가 활을 겨누었다가 반으로 쪼개졌다.


"으걱…."

좌우로 쪼개진 시체가 쓰러지고, 주현성이 달려든다. 다른 준신들을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군주들의 아버지를 향해.

군주들의 아버지는 그 광경을 보며 안색을굳혔다가 손을 뒤집었다.

그 손동작에 공간이 갈라졌다.


갈라진 공간이 무저갱을 드러내고, 그 무저갱 너머로 무언가 떨어졌다.


주현성이 진격하는 진로를 향해 떨어지는 그것은, 봄의순례자가 뿌리내렸던 제도의 성벽이었다.

쿠우우우우우우웅!


먼지가 피어오르고, 주현성의 궤적에 추락이 완벽히 겹쳤다.

성벽이 끝이 아니었다. 지휘자처럼, 군주들의 아버지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제도에 박혀있는 건물들이 뽑혀졌다. 뽑혀진 건물은 그렇게 쓰러진 성벽 위로  몸을 내던졌다.


쿠우웅 쿵 콰르르륵 콰아아앙!


성벽 위로 누군가의 주거, 경비탑, 높게 솟은 동상, 제도의 절경을 남김 없이 드러내던 건물들 따위가 어지럽게 부딪혀 제 몸을  위로 퇴적시켰다.


군주들의 아버지는 어지럽게 손을 휘두르면서 땀을 흘렸다. 그렇게 손을 휘둘러 제 마법으로 거대한 질량들을 떨구다보니, 주현성이 있던 자리에 생겨난 것은 벽돌과 강철의 산이었다.


"…자, 끝."

황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손을 털어냈다. 식은땀이 머리에서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과연, 봄의 순례자가 말한대로 괴물이었다. 봄의 순례자가 주현성을 한계까지 소모시키지 않았다면 분명히 방금 죽은 건 군주들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몰아쉬고, 다음으로 죽일 이들을 찾기 위해 눈을 돌렸다.

…그 벽돌과 강철의 산이 들썩이지 않았더라면.


―쿠구구구구

뱃속 깊이 울리게 하는, 저 깊은 지저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군주들의 아버지와 그를 섬기는 군주들이 일제히 눈을 돌려 그 산을 보는 순간, 그 산 전체가 미친듯이 격동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

'이건, 이건 뭔가 잘못 됐어.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저런 힘을?'

신이  순간 늘어난 그의 인지능력은, 주현성의 저 근력이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눈치채고는 파랗게 질렸다.


하얗게 변하는 사고능력으로, 그는 제 수하인 군주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어붙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튀어나온다.  이상 쌓아올리는 건 의미가 없다. 그 순간 생각해낸 건 간단했다.

"물러난다. 당장!"

누구도 역문하지 못하고, 군주들의 아버지는 낯빛을 굳혔다.

'신성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지금, 저 괴물과 싸우는  사양이다. 도망쳐야 해.'


그는 주현성을 죽여 나오는 신성으로 다른 이들의 신성을 살찌운다는 계획을 전면 철회하며 공간을 갈랐다. 갈라진 공간 너머로 그의 은신처가 일렁이고, 산이 들썩였다.


마침내.

투콰아아아아아아아앙!!!!!

제도의 반절 이상을 쌓아올린 산이 무너지고, 그 잔해가 어지럽게 하늘로 떠올랐다. 그것을 이뤄낸 중심지에는, 피를 흘리는 신살자가 격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신살자가 군주들의 아버지를 노려보더니 앞으로 나아간다. 비처럼 내리는 벽돌과 강철을 동반하며.

 걸음마다 땅이 울고, 하늘이 떨린다.

군주들의 아버지가 도망이라는 단어를 눈에 담기도 전에, 주현성의 도끼가 허공을 격했다.


―콰르르릉!


휘두른 것도 아니고 던진 것인데, 밀려나는 공기에서 소닉붐이 일어나 공간이 마구잡이로 일렁였다. 날아드는 도끼의 궤적을, 군주들의 아버지는 읽지도 못했다.

그렇게 날아온 도끼자루가 어깨에 닿고 군주들의 아버지의 팔 전체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크으으아아아악!!!!!"

박살난 팔은 그야말로 핏물로 변해있었다.  어깻죽지를 움켜쥔 군주들의 아버지가 허겁지겁 피를 뚝뚝 흘리며 공간 너머로 몸을 던졌다.


"끄, 끄흐으… 어, 어서! 다 비켜!"

찢어진 공간으로 몸을 비집어 넣으려던 준신들을 밀치며 군주들의 아버지가 공간 너머로 사라지고, 그의 앞을 가로막던 준신들이 죽어나간다.


주현성의 다리가 스치는 것에 완전히 상반신이 으깨져버린 준신이 널부러지고, 주현성은 그제서야 공간이 닫혔음을 깨달았다.

닫힌 공간이 있던 자리에는, 핏물이었던 흔적과 낙인 한 자루만이 남아있었다.


주현성은  도끼로 다가섰다. 도끼의 자루에 묻어있는 핏물은, 선명하게 붉은색이었다.


그에, 신살자는 다음 신이 피를 흘릴  있음을 알고는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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