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4화 〉봄의 순례자 (184/274)



〈 184화 〉봄의 순례자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하나 같이 당황과 놀라움을 담아 입을 떡 벌리고 있거나 물러나며 경계하고 있었다.

싸움의 수준에서부터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겨있었다. 신과 반신이 싸우고, 거기에 준신이 여럿 끼어있으니 당연했지만, 그 싸움에 끼었을  보통 사람들이 맞이할 결말은 죽음 정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싸움이 끝나고, 그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음에도 즉시 달려가지 못했다.


시력이 마냥 좋은 편인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먼 거리에서 누가 다가오는 것인지 판단하긴 힘들었으니.

다가오는 이의 인영이 점차 커지고, 등 뒤에서 흔들리고 있는 망토가 붉다는 것이 보인 후에야, 대열에 합류하여 사람들에게 방어막을 걸어대고 있던 이가 뛰쳐나갔다.


"현성아!"


메이는  짧은 다리를 움직여, 소리지를 힘조차 없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는 주현성에게 다가섰다.


주현성의 상태는 마냥 좋지 않았다. 초재생물약 같은 것을 사용한다면 즉시 해결할  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진 않는 건지, 다가오는 메이에게 눈길을 보내고는 헐떡였다.


"현성아… 으, 여기. 어깨 빌려줄게. 수고했어. 잘했어."


메이는  연인에게 그런 말을 흘리며 어깨를 빌려주었다. 주현성은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메이의 몸에 기대어 걸어가면서, 탈력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승리라고도  수 있다. 군주들의 아버지는 팔이 박살나고, 겁에 질려서 도망쳤다.  도망치는 꼴을 보면 분명히 당장의 전투는 주현성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현성은 승리감을 누리지 못했다. 굉장히 허망한 기분이었다. 창에 머리를 꿰뚫린 봄의 순례자를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분명 쓰러트릴 적이었고, 그가 목을 자르거나 쪼개버렸을 적인데도, 왠지 모를 아쉬움과 허망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1회차 때문인가? 아니면….'


주현성의 상념을 가르고, 대열 속에서 여자가 튀어나와 뛰어왔다.

다가온 여성은 베일 속에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주현성을 끌어안았다. 그에 부축하던 메이가 주현성의 팔을 붙든 채로 지지했음에도 주현성은 탈력감을 이겨낼수 없었다.

몸이 스르륵 기울어, 겨울의 신부에게 기대어진다. 주현성은 그렇게 안긴 채로 눈을 돌렸다.

투구 너머로 보이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당황감과 경악이 감도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부 표정이 다른 이들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그러했다.


주현성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서 겨울의 신부의 허리에 손을 얹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쫓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거니와, 그런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이를 당장 쫓아가야 한다는 만신창이의 반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현성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니, 겨울의 신부가 그의 등을 두드리고, 메이가  뒤에서 그 허리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이제 쉬자. 응?"

"맞아요. 당신께서 바라시는대로 할테니, 부디 지금은… 눈을 감아주세요."


주현성은 그 음성들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분노로 인해 촉진된 근력은 거둬져 탈력감을 선사했고, 영혼 발화로 소모된 심신은 그에게 피로를 선사했다.

졸려오는지 깜빡이는 눈꺼풀을 억지로 붙들고 있던 주현성은 결국 겨울의 신부가 안아오는 그 품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그는 봄의 순례자를 보았다.

"흐음, 오랜만에 오는군."


드넓은 검은 평야, 우후죽순으로 자라난 풀들과 구멍이 뚫린 하늘로 은은한 냉기가 들어오는 세계,  한복판에 이 풍경이 제 심상임을 겨우 눈치챈 주현성과 봄의 순례자가 있었다.

봄의 순례자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역겹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뜻 바라보니 그것이 방금 전까지 자신과 싸우다 창에 꿰뚫렸던 얼굴임을 주현성은 알 수 있었다.

그 여성의 얼굴과 목소리로, 봄의 순례자가 삭막한 감성을 드러냈다.


"다시 여기에 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늘, 이런 형태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이야…."

한숨을 내쉬는 봄의 순례자가 손을 휘저으니, 조막만한 뿌리가 바닥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신성은 완전히 빼앗겼고. 하하,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 음성에 주현성이 눈쌀을 좁히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봄의 순례자가 한 마디를 더 얹었다.

"기억을 살펴봤다. 아무래도…  세계는 굴레를 이겨내지 못하고 되돌렸던 세계인 것 같더군. 네 과거를 보았다. 이 세계 자체의 과거를. 너는 정말 대전사였던 모양이더군."

"…난 기억 안 나."


"그렇겠지. 어쨌든, 살아남으려고 꽤 골몰했던 모양이더구나. 해방자."

주현성은 다시 한 번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봄의 순례자도 알고 있을테니.

"이렇게 되리라 예상은 했거늘… 설마하니 전투의 고양감 탓에 대비를 잊을 줄이야. 돌고 돌아 배신당한 끝에 내 숙적의 신성 속에 곧 사라질 사념만이 남게 되니, 겨울이나 가을이 본다면 비웃겠어."


봄의 순례자는 여러가지 감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곳에는 처음 주현성에게 침입하려고 했을 때, 겨울의 폭군의 방해를 받으며 트였던 길이 뚫려있었다.


아직도 죽음과 종말의 신성이 흘러드는 구멍이었다.

"유일한 승산은 그대와 정면으로 맞붙는  뿐이라고 여겼다. 실로 그러했지. 그대가 음모에 당하는 적은 없었으니. 그게 내 마지막 '전략'이었으나 오판이었어. 조금 더 계산했으면 좋으련만… 해방자야. 네 변수를 나는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뜬구름 잡는 듯한 말에 주현성이 표정을 바꾸자, 봄의 순례자가 웃었다.


"궁금한  있다는 표정이구나. 물어보라, 대답해줄테니."

그에 주현성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며,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도 꽤 있었다.

주된 감정은 분노나 투지에 관련이 있었으나, 지금 물어볼만큼 시급하지 않았다.


시급한 것은 단서였다. 이 세계에 대한 단서, 대답을 구하고 싶었으나 구할 곳이 달리 없었던 질문들. 주현성이 물었다.


"굴레가 도대체 뭐냐."


"모든 것의 한계지."

그 설명은 명확하게 뜻을 전달하지 못했다. 주현성이 묵묵히 기다리니, 봄의 순례자가 허공을 바라보던 눈을 내려 주현성을 마주보았다.

"마침  기억 속에 적당한 단어가 있구나. 엔트로피. 그 엔트로피를 생물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엔트로피라면, 열역학 법칙이었던가. 언젠가 읽어본 기억은 어렴풋이 있지만, 그는 그걸 제대로 이해했다고  수 없었다. 희미하게 지은 표정에 봄의 순례자가웃었다.

"이 세계를 만들어낸 것은 온전히 창조신의 신성이자 그녀가 뿌린 인간과 모든 생명의 생명력. 즉, 생명 에너지다. 엔트로피는 그런 것이더군, 시간이 흐를 수록 에너지가 옅어지리라는 법칙이라고.  세계 역시 그러하다. 생명은 어떤 식으로든 깎여나가고, 그렇게 깎여진 것은 죽는다. 이 세계에서의 죽음은 그런 형태다. 그리고  죽음은, 세계에도 작용하지. 아무리 채워넣고 보충한다고 한들."

봄의 순례자가 손을 뻗자, 길게 뻗은 손가락이 허공을 그었다. X자였다.

"언젠가는 고갈되어 사라진다. 이 세계와 생명 모두. 그게 굴레다."

주현성은 그 대답에 헤로디아를 떠올렸다. 마침내 굴레를 벗어난다던 그 마법사를.

 표정과 생각을 읽어낸 봄의 순례자가 첨언했다.

"그녀는 신이 되어 굴레를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 하던 모양이더군. 애시당초 고대인에겐 긴 수명과 생명력이 보장되진 않는다. 그녀의 그것은… 빼앗고 연구한 결과물이었지. 하지만 그녀도 굴레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그래서 끝에 달했음을 알고는 신이 되고자 했겠지. 신이 되면 신성으로 말미암아 굴레에서 잠시간은 벗어날 수 있을테고, 차후 연구에 따라서는 완전히 굴레를 벗어던질 수도 있었겠지. 개인에 한해서겠지만."


주현성은 엔트로피에 대한 이야기는 그정도면 족하다고 여겼다.


"그 씹새끼가 신성을 적응시킬 때까지 얼마나 걸리지?"

"적응 자체는 얼마 안 걸린다, 해방자야. 가장 큰 문제는 그걸 제 수족처럼다루는데 얼마나 걸리느냐겠지. 나나 다른 4신들과는 달리, 그것은 내가 완전히안정시킨 가공된 신성만을 받아먹었으니, 적응 자체는 슬슬 끝났을 것이다."


"그럼 승산이 없는  아니냐?"

 대답에 봄의 순례자가 웃었다. 웃는 소리는 다소 남성적이었으나, 그 장본인이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탓에 기묘한 질감을 선사했다.

주현성이 웃어재끼는 봄의 순례자를 노려보니, 그녀는  눈에 맺힌검은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멈추었다.

"하하…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뭐가."


"신을 이미 두 번이나 죽이고, 온갖 괴물과 이적을 문제 없이 쳐죽인 이가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답지 않구나 야만인."

맞는 말이었다. 주현성은 이미 신을 둘이나 죽였다. 소위 막타는 빼앗기긴 했지만, 봄의 순례자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건 순전히 주현성의 위업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금껏 만나온 모든 괴물은 그의 손에 쓰러졌다.


주현성이 그걸 떠올리자니, 봄의 순례자가  웃었다.

"겁이라도 나는 거냐? 그놈은 별 것도 아니다. 그간 네가 야만스럽게 죽여온 것들에 비하자면 어려울 것도 없는 적수지. 물론 준신의 군세는 좀 귀찮긴 하겠다만… 인간이었던 때부터 신을 죽이고 괴물들을 죽여온 네 상대는 되지 않겠지."

"…그래, 그렇겠지."

"그놈이 창을 던지지 않았다면 네가 얻어냈을 신성임을 떠올려라. 그리고 기억해, 너는 해방자임을."

주현성이 고개를 들어올려 그 눈을 마주보니, 봄의 순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승리다. 해방자. 긴 악연이었군."


그 말과 함께, 봄의 순례자의 사념체가 부스스흩어지기 시작했다. 조각나서 떨어지는 것은 봄의 순례자였던 마지막 흔적들이었다.


주현성이 그 흔적들을 눈에 담더니 말했다.


"갑주는 부숴졌다. 군세는 지치고 소모되었고, 나도 꽤 지쳤어. 솔직히, 저걸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에 흩어지고 있던 봄의 순례자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그걸 나한테 묻는구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유쾌하다기 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웃음에 가까웠다.


주현성이 그 웃음에 짜증조차 내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웃어대던 순례자는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


"보아하니 가을의 마녀, 그녀와 연을   같더구나. 가서 도와달라고 해보거라. 비록 미친 신이긴 하나,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자식'에게는 손을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테고… 갑주는 미안하게 됐지만 알아서 하거라.  갑주와 연이 멀다."

주현성은 그 대답을 머릿 속에 새기면서, 이제  정도 흩어져 하반신이 사라진 봄의 순례자를 보았다. 그녀는 왠지 산뜻한 표정이었다.

한참간 조용히 그녀의 조각들을 눈에 새기던 주현성이 말했다.

"좋은 싸움이었다."

"…그래, 그랬지."

대답하는 말은 여러가지 감정이 섞여있었다. 의외라는 것에서부터, 당황, 인정을 받은데에서 오는 잔잔한 기쁨과 고양감.

그 감정들에, 봄의 순례자가 하, 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봄의 순례자와 주현성은 그렇게 다시 눈을 마주쳤다. 봄의 순례자가 씩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남길 말은 오직 하나였다.

"지지 마라, 해방자."

그녀는  말을 마지막으로 산산히 부숴져 흩어졌다. 그렇게 흩어진 검은 조각들이 하늘로 날아들어 사라지고, 주현성은 그 조각을 눈으로 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현성은 제 의식 세계가 땅으로 꺼지는 감각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


…씨발.


깨어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아렸다. 내 위로 떨어진 성벽과 건물의 갯수, 봄의 순례자가 나를 두들겨댄 횟수를 기억하노라면 당연하겠지만, 의외로 상처는 없었다.


나는 깨어나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시스템 메세지임에 한탄했다.


떠있는 것은 간단했다.

[신을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하십시오. 2/5]

이미 군주들의 아버지가 신이 되었음을 알리는, 잔잔하고도 좆같은 정보.

괜히 이가 바득 갈고 몸을 일으키니, 그제서야 방이 눈에 들어왔다.


방은 익숙했다. 사실, 익숙할  밖에 없었다. 메이가 가슴팍을 베이고 누워있던 병실이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였지만.

그 병실, 내가 누워있는 침대 양 옆으로 두 명의 여자가 곤히 내 침대에 머리를 얹거나 비스듬히 머리를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간호하다가 잠든 게 분명했다.

뻐근한 팔을 들어올려 주먹을 쥐었다. 초재생물약을  건지,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자잘한 고통은 있으나 피로 자체는 없었다.


나는 봄의 순례자를 떠올렸다. 그간 나를 지독하게도 괴롭히고, 두들겨 맞았던 신을.


마지막의 마지막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싸움에 응했던신을.


마음에 안 드는 새끼였지만, 그런 싸움을 방해한 군주들의 아버지가 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탁은 들어줘야지."


 혼잣말을 남기며 메이와 겨울의 신부를 깨웠다.

해야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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