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군주들의 아버지
깨어난 내가 사람들을 그러모으고, 이제 막 다가오는 새벽을 맞으려는 이들은 발빠르게 모였다.
교단에서 가장 회의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지난 번 이단심문이 이뤄졌던 대회랑 뿐이었으니, 모두들 그 장소로 모였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거나, 팔짱을 끼며 내 말을 기다리거나, 먼저 의자에 착석하거나 했다.
모인 이들의 눈이 완전히 나를 향하고 나서야, 나는 말했다.
"갑자기 정신차리더니, 오밤 중에 불러내어 혼란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더 늦어 더 많은 희생이 생겨나기 전에 말이죠."
그 말에 반론하는 이는 없었으나, 대다수는 설명을 요구하는지 의아한 눈을 내게 향했다.
그 눈빛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말했다.
"봄의 순례자는 죽었습니다. 저는 그걸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죽었습니다. 비록 신성은 제 몸으로 들어오진 않았다지만, 봄의 순례자에게 신성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죽여 그 신성을 가져갔기 때문이죠."
개중 그 광경을 보았던 이들이 있는지, 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성을 가져간 이는 자신을 군주들의아버지라고 밝혔습니다. 한 때 제국의 황제였던 그는, 봄의 순례자의 힘을 빌어 준신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쳤으면 모르겠으나, 그 군주들의 아버지라는 자는 자신의 측근과 동료가 될 이들에게 신성을 나누어 준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내 말에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족히 스물을 좀 넘는 숫자. 봄의 순례자에게 신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는지, 그걸 해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더 있으리라는 느낌은 들었다.
고작 스무명의 준신으로 세상을 뒤엎는다는 계획을 세우진 않았을테니까.
"그는 아직 살아있으며, 조만간 완전히 신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오늘 당장일 수도 있고, 내일 오를 수도 있으나 오른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합니다. 그것만큼은 어쩔 도리 없이 진실입니다."
그러니 멈춰야 했다.
"그러니 저는 그것을 저지하러 갑니다. 나름의 사명과 목적이 있고, 인간을 해치긴 하나 그게 무분별하진 않았던 악신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아직까지도 인간에 가깝습니다. 인간에 가깝다는 것은, 사명과 목적이 없으며, 무분별하게 제 힘을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죠."
"으음…."
기사단장은 악신이라는 표현이 불편한 모양이었으나, 굳이 꼬집지 않고서 낯빛을 죽였다.
기사단장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선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내 말을 경청하거나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살피다 박수를 쳤다. 쩡, 하고 울리는 내 손뼉소리에 좌중의 이목이 다시 나를 향했다.
"제가 전장에서 했던 연설을 들었던 이들이 있을 겁니다. 봄의 순례자를 살려두면 세상에 해악을 끼칠 것이고, 그것이 만들어낸 준신들이 세상을 황폐화할 거라는 논지의 이야기였죠."
기사단장이 기억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마주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제 본심이었으며,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 준신들을 살려둔다면 세상은 완전히 망가져버릴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하면 될까요, 의인이시여."
그동안 조용히 이야기를 읽어내고 있었던 성녀가 내게 말을 걸어오고, 나는그녀의 적발과 붉은 눈동자를 눈에 담으며 손가락을 뻗었다. 지목받자 성녀는 얌전히 내 지시를 기다렸다.
"우선 성녀님은 산왕국에 전령을 보내주십시오. 빠른 발을 가진 사람으로, 빠른 말에 태워서. 최대한 빠르게. 가을의 마녀에게 협력을 요청한다는 요지면 될 겁니다. 상세한 건 '직접 만나서'나누자고 말이죠. 그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성녀는 내 말에 놀란 듯 보였다가 그 어떤 반문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먼저 일어서 대회랑 밖으로 나가는 이를, 사람들은 눈으로 쫓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퍼시벌 기사단장, 수고스럽겠지만 재출정 준비를 부탁합니다. 근위대장님께서는 퍼시벌 기사단장을 도와 군량이나 병기, 잔존 병력을 관리해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기사단장과 근위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회랑 밖으로 나서고,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중 대공에게는 웜홀의 준비를, 살로메에겐 마법사들의 관리를 맡겼다.
두 마법사마저 빠져나가고, 몇 명 남지 않은 대회랑에서는 묵묵한 시선만이 오가고 있었다.
그 중 세네카가 먼저 손을 들어올렸다.
"준비 끝나면 바로 출발하시는 겁니까?"
세네카의 질문은 시기적절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준비할 게 아직 더 있습니다."
"준비할 게 더 있습니까?"
의아해하는 세네카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아, 하는 탄성을 흘렸다.
"예, 생각하신대로. 제 갑주는 완전히 파손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고 있죠. 건져낸 금속이 좀 있지만, 걸려있던 마법은 완전히 사라져 평범한 갑주만큼도 못합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겨울의 신부를 바라보니, 그녀는 드물게 맨 얼굴을 드러낸 채로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금속, 한 때는 갑주였을 강철 조각이 왠지 새벽의 어스름 아래에서 구슬펐다.
"지금껏 잘 버텨온 갑주이며, 저 역시 제 애병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물건이지만… 저 갑주는 여기까지인 모양입니다. 이번 전투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이 갑주로는 전투에 나설 수 없습니다. 물론 새로운 갑주를 찾지 못하더라도 이 사슬갑주나 기성품을 입을 수는 있겠지만…."
세네카는 납득했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머지는 아니라서 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기성품은 제 근력을 못 버텨냅니다. 설령 버텨낼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더라도, 앞으로 싸우게 될 준신들의 공격이나 군주들의 아버지의 마법 공격에는 무력할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 비처럼 내리던 성벽과 건물의 향연을 똑똑히 보셨을 겁니다."
대회랑에 남아있는 이들 중 그 광경을 직접 보았던 이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질량 공격을 상대로 멀쩡하긴 힘들테니. 설명을 더할 필요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니, 세네카가 다시 말했다.
"그럼… 갑주를 찾으러 가시는 겁니까? 늦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합당한 지적이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건 시간이 중요한 자산이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세네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세네카씨의 지적은 합리적입니다. 보통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군주들의 아버지는 이번 접촉으로 팔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마법으로 쓰러지지 않는 저라는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죠. 설령 습격할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만전은 아닐테니, 다소의 시건은 벌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 황제란 놈은 꽤 경계심이 높아보이는 놈이었다. 신중한 놈인 것처럼 보였다. 나의 정보를 읊어댔던 모습을 떠올리자면, 확실하지 않은 싸움은 하지 않는 주의겠지.
그렇다면 놈의 경계심이 공격성을 뛰어넘었을 지금 준비를 하는 게 맞았다. 세네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동안,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러니 제가 아는 것 중에서 가장 쓸만한 갑주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웜홀 마법과 함께라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겠죠."
"그렇겠습니다… 그 갑주도 꽤 상등품이었으니, 대신할 건 찾긴 어렵겠군요."
물론 그렇긴 했다. 나 역시 그걸 대신할 수 있는 물건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으니.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템 중에서 어지간한 갑주는 어떻게 얻는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수준인지 머릿 속에 다 담겨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 한복판에 아이템의 목록을 띄워, 그 목록에서 갑주를 추려냈다. 판금이 들어간, 최대한 전신을 덮지만 방어력이 높은 것으로.
그렇게 되새기는데, 갑자기 토니 스타크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거라면, 내가 좋은 물건을 하나 알고 있네만."
그 말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토니 스타크가 다가왔다.
*
우우우웅―
울리는 소리는 조용히 도시를 가로질렀다. 그 소리에 메아리 정도는 돌아올 법 하건만, 돌아오지 않는다. 기묘할 법 하고 경계심을 높여놓을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와 동행하는 이 역시 그러했다.
"흐음,다시 돌아오게 될 줄이야."
"네가 여기에 있다며."
"그랬지."
이 새끼 믿을만한 거 맞나?
의심의 눈초리를 향하니, 토니 스타크는 허허 웃더니 먼저 길을 안내했다.
지나는 길목마다 부숴진 건물, 불타버린 시체, 토막이 난 시체 따위가 어지러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두가 좀비인 걸 감안하면, 경계할 까닭은 하나도 없었다. 저만치에서 일렁이는 웜홀을 흘긋 보았다가 NM-21을 따라 어떤 건물로 들어섰다.
들어선 건물은 현대적이면서도 어딘가 삭막했는데, 삭막한 와중에 대부분의 설비들은 폐쇄적인 느낌을 선사하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나아가 NM-21이 기계를 뜯어내는 걸 바라보고 있으니, 어떤 방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들어선 방은 무수한 모니터와 기초적인 수준의 콘솔이 잔뜩 늘어선 방, 보안실이었다.
방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좀비의 시체만이 내가여기서 얼마나 날뛰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시체들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니, 앞에서 얼쩡대던 아이언맨이 콘솔을 두드렸다.
타닥 타다다닥
재빠르게 움직이는 강철 손가락과 가장 커다란 모니터에 나타나는 명령어. 읽어내리기엔 너무도 빨리 지나가, 나는 그 흔적만을 쫓으며 눈을 돌렸다.
한적한 보안실. 그야말로 뭣도 없는 보안실의 한 켠, 닫혀있어야 할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듯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져 있던 공간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어있는 것도 잠시, 토니 스타크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서 고갯짓했다.
"저 안일세."
함정 있는 거 아니냐고 하기에는, NM-21은 나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 뒤를 따라서 보안실의 비밀방에 들어섰다.
비밀방은 상상 이상의 심플함이었다.
분명히 이 좀비들을 만들어낸 원 개체거나 관련된 실험의 결과물인 듯 보이는 샘플이 널려있고, 그 중심지에 처음 보는 갑주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 중심지의 위치한 갑주는 내 정신을 쏙 빼놓기에 좋았다.
일단 겉에 둘러진 장갑은 중세 판금 갑주의 그것을 똑 닮아있었다.
그래서 그것 자체에서는 그다지 불만을 품지 않았다. 설령 판금 위를 내달리는 문양 중 대다수가 뭔가 마법적인 무언가가느껴졌더라도.
문제가 있다면 그 장갑으로 보호받는 내부였다. 갑주는 초록색 액체에 둥둥 뜬 채로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내부는 분명히 내가 보기엔….
"이거 SF에나 나올 갑옷이잖아 씨발."
어지간한 SF에 나올 법한 외골격 슈트라던가, 파워아머와 유사했다.
빈틈 없이 자리한배열과 기계적인 구조, 그 구조 내부의 인체공학적인 설계까지.
이 유적지에 올 때마다 이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토니 스타크를 돌아보았다.
하기야, 로봇도 있는데.
나는 불현듯 물었다.
"나… 이거 입어도 되냐?"
"음? 안될 게 뭐가 있겠나. 이 유적에 남은 망자를 정리한 건 자네일세. 이 유적에 있는 모든 건 자네의…."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뭐가 말인가?"
토니 스타크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를 가장하며 고개를 기울였는데, 나는 그러면서도 충실하게 콘솔을 두드리는 그 로봇을 볼 수 있었다.
몇 번 더 강철 손가락이 콘솔을 두드리고, 초록색 액체로 가득차있던 앰플이 비워졌다. 비워진 앰플이 열리고, 반짝이는 판타지 파워아머가 나를 반겼다.
나는 그 파워아머로 다가가면서도 중얼거렸다.
"너무 껑충 뛰었는데…."
"뭐가 말인가?"
"기술력이 새끼야…."
토니 스타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라, 슬슬 그를 무시하고 나는 파워아머에 다가섰다.
"입는다? 진짜 입는다?"
"입게나."
새끼 말리지도 않아. 파워아머의 다리 부분에 다리를 대고, 몸을 파워아머에 가까이 붙이는 순간.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기이이잉
갑자기 팔찌의 형태로 줄여놓은 사슬갑주가 내 몸을 뒤덮는다. 그 와중에 파워아머는 내 몸을 꼼꼼하게 조이고 감아 제 몸에 붙였다.
나는 그렇게 파워아머에 밀착하면서 전신에 둘러진 사슬갑주가 위로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 살피기 위해 불굴의 정신을 켜 3인칭으로 바꾸자, 중세 판타지적 감성이 가미된 파워아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음성이 들렸다.
[신성을 감지하여 자동 수복을 가동합니다.]
[성유물 - '역설'을 감지하여 동기화합니다.]
[마도구 - '화룡의 허물'을 감지하여 통합합니다.]
울린 두 개의 음성과 함께, 내 몸을 빼곡히 뒤덮었던 사슬갑주가 뻗어진다. 뻗어지는 사슬은 파워아머에 맞물리더니, 차르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파워아머의 군데군데를 감쌌다.
동시에, 내 몸에 둘렀던 붉은 망토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내 몸에 둘러져있던 것이 거둬져 파워아머의 장식으로 변하고 있었다.
파워아머의 등 뒤로 길게 뻗어진 망토가 멋스럽게 자리하고, 검은 사슬이 구동부나 관절부를 뒤덮었다.
[동기화 완료, 기동을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들린 소리가 함께하니, 내 팔다리를 타고 흐르던 은은한 불일치감이 사라졌다.
손을 쥐었다가 편다. 강하게 힘을 쥐어 쥠에도 갑주의 손상은 없었다. 오히려 부드럽게 움직여 내 힘을 보조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손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이다 나를 멀뚱히 보고 있는 토니 스타크에게 다가갔다.
"야… 장르가 많이 달라졌어."
갑자기 왜 이런 게 나오는 건데. 내 당황감을 못 알아들었는지 그 로봇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음? 아, 하하, 그렇군. 많이 달라졌어. 못 알아보겠군 그래."
그거 말고 씨발….
착잡한 가운데, 토니 스타크가 만족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갑주가 자네의 이전 갑주만큼의 성과를 낼진 모르겠지만, 부족함은 없을 걸세."
나는 그 음성에 착잡한 가운데,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간지는 나니까. 성능은 차차 확인해봐야지.
나와 토니 스타크는, 열렸던 웜홀로 다시 몸을 비집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