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군주들의 아버지
갓 지어졌음에도 허름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성, 비뚜름하게 꽂혀있는 성의 제일 상층, 어떤 탑에 앉은 이는 아리는 제 상처를 더듬으며 침음성과 고통을 억눌렀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말이 많은 이었다. 혹자는 그를 황제라고 불렀고, 때로는 제아비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패륜황제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 중 살아있는 이가 많진 않지만, 그의정체성마저 죽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제 아비를 칼로 죽였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
어릴 때부터 야망에 타오르던 황제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 이루었고, 철저하게 계획하여 제 손아귀에 두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지만. 그는 완전히 박살나, 신성에 적응했음에도 재생하지 않는 어깻죽지를 붙들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 했다.
"…빌어먹을 해방자놈."
이번에도 손쉽게 처리하고, 자신이 유일신으로서 신정을 펼치게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봄의 순례자가 어째서 주현성에게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어째서 마지막에 모든 걸 포기하고 그렇게 싸움을 걸었는지도.
하지만 깨달음은 늦었다. 늦은 깨달음은 그에게 심각한 부상을 안겨주었고, 공포와 스트레스를 떠넘겼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욱신거리는 어깻죽지를 붙들고는 의자에몸을 파묻었다.
그의 시야에 그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파묻히는 압도적인 질량을 인간의 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몸뚱이로 이겨내고, 그대로 도끼를 던져 자루로황제의 팔을 완전히 박살내버린 신살자를.
떠오르는 순간 전율과 공포, 저항감과 불안함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렇게 휘감은 감정들이 그를 채찍질하며, 마구잡이로 잡아서 흔들었다. 그는 흔드는대로 흔들렸다.
덜덜 떠는 신의 처참한 모습에, 이제 막 방에 들어오던 준신이 입을 닫았다. 실상, 준신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따를 이가 없고 저들끼리 통제를 잡으려고 한다면 필시 내분이 생길 게 분명했기 때문에 조용히 따르고 있었을 뿐.
힘의 균형이 조금만이라도 기운다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황제를 버릴 생각이었다. 그 불안한 신뢰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군주들의 아버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가리켰다.
"왔나. 지시했던 건 어찌 되었지?"
걸어들어온 준신은 나름 신분이 있던 준신이었다. 신성을 손에 넣기 전에는 귀족이었던 그는, 으레 그러하듯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더니 말했다.
"폐하꼐서 지령하신대로 보급로를 마련했고, 인근 부족들을 '납득'시켜 병사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인근 국가에 사절을 보내어 지시를 이행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없지만, 조만간 병력을 보내올 것입니다."
황제는 그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려다 어깨를 부여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팔이 아린다. 환상통이 그의 뇌를 욱신거리게 하며, 쓸데없이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황제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에, 소식을 전했던 준신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황제는 제 팔이 있었던 자리를 움켜쥔 채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위정자다. 전사가 아니다.
그리고 위정자에겐 그에 어울리는 싸움법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억지로 고통 속에서 힘겹게 웃었다.
천천히 고통이 잦아들자 군주들의 아버지는 제 고통이 사라지는 것에 달가워 하면서 준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교단과 산왕국을 필두로, 폐하와 저흴 타도하기 위한 병력이 모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에게 가담하겠노라고 서한을 보내온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국가는 그들에게 가담했다고 합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본격적으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두려운 신살자에게 다른 신이 가담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산왕국이라는 이름에는 이제 그런 평가가 뒤따르고 있었다.
황제는 제 어깻죽지를 움켜쥔 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유물은 챙겨왔나."
"예? 예, 전부는 아니지만 다소는…."
"신의 은총을 받고 싶은 이들을 추려내어 보내라고, 부족들과 주변국에게 전해라."
"…예."
준신은 일어서, 방 한 켠에 크게 트여있는 창문으로 향하는 황제를 눈으로 쫓았다. 황제는 비틀거리면서 겨우 창문 앞에서 멈추었다.
"회랑에 마법진을 그릴 수 있겠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준신이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니, 황제가 짜증을 섞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것으로 두 개."
"아, 그건… 예, 가능할 겁니다. 헌데 어째서…."
준신은 침착하게 생각해보았으나, 군주들의 아버지 역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짐작이 가는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군주들의 아버지에겐,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말 없이 내면으로 스며들어 신성을 느껴보았다.
뜨뜻하면서도, 마력과는 이질적인 감각. 자신의 안에서 마력과 공존하는 힘.
마력이 불이라면, 신성은 기름이었다. 실제로 그러한 형질인 것은 아니나, 그렇게 쓸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조금씩 신성을 태워보며, 그 감각을 몸에 익히려고 노력했다. 희미하게 스멀거리는 어둠이 그의 눈동자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준신은 그 이질적인 감각에 저항하려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황제는 그를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므로.
과연 황제는 그에게 제 주의력의 일 할조차 쏟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입을 열어, 읊조렸을 뿐이었다.
"동대륙과의 거리가… 얼마나 됐었지?"
*
도착한 서한에 적혀있는 것은 간단했다. 지금 간다. 나는 그 서한을 받자마자 바로 대성당 밖으로 나섰다. 나서자마자 하늘이 우짖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부짖던 하늘이 갈라지고, 그 틈으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내리꽂히는 벼락이 앞으로 나아가며 길을 개척하고, 개척하는 길을 따라 누군가의 인영이 어지럽게 쏘아졌다.
콰르르르릉!!!!
그리고 내리꽂힌 자리에 피어나는 것처럼, 그 자리에 가을의 마녀가 나타났다. 번개를 두르고, 제 갈색 의복에 희끗한 벼락을 두른 채로.
그녀를 본 대성당 입구의 성전사들이 당황하며 창을 내렸다. 끌어내린 창을 겨누며, 그들이 소리쳤다.
"악신! 여긴 어쩐 일이냐! 여기는 주를 섬기는 순백교단의 대성당이다! 당장 꺼…."
내 손을 들어올리고 그들을 가로지르니, 그들은 그제서야 창을 어정쩡하게 든 채로 나를 눈으로 쫓았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나아간 나는, 가을의 마녀에게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갈테니,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 하지만 해방자님…."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성전사들은 문을 열지 않을 듯 했다가, 내가 꺼낸 차가운 목소리에 흠칫하더니 문을 열어젖혔다. 기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들어올려지는 격자문에, 그 너머의 정원이나 첨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들을 무시하며 가을의 마녀를 안으로 들였다. 대성당 안의, 대회랑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왜 부른 것이냐, 나의 아들아."
솔직히 달가운 여자는 아니었다. 가을의 마녀 역시 죽여야 할 신이었고, 그 속은음흉한데다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나 혼자 준신들과 어떤 망나니 신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군대와 많은 영웅들로는 불가능하다. 나와비슷하거나 적어도 준하는 수준의 신격은 필요했다. 그래서 데려온 가을의 마녀였다. 내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니, 그녀는 방긋 웃었다.
"군주들의 아버지를 죽일 거다.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뭘 도와주면 되겠느냐?"
내가 필요한 건 그리 많지 않았다.
"병력이 더 필요하다. 널 섬기는 산왕국에게 말해서 최대한 많은, 좋은 병사들을 데리고 오게끔 해라."
"흐음, 그들이 죽어도 싫다고 한다면?"
"전부 죽일 거다."
"…후후, 마음에 드는 모습이구나. 나의 아들아."
가을의 마녀는 정말 그러한지, 뿌듯한 얼굴로 나를 껴안으려다 내가 물러서니 아쉬운 표정으로 팔을 내렸다.
"타국에 압박을 넣어서 물자도 뜯을 거다. 병력이라도 내놓지 않으려거든 물자라도 내놓으라는 거지."
"순순히 내놓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그렇겠지. 그러니 군주들의 아버지가 어떤 놈이고, 뭘 꾸미고 있는지 널리 대륙 전체에 퍼트릴 거다. 그놈을 돕는 놈들이 있다면 동맹을 재고해보게 되겠지. 그런 개새끼를 도와서 득 볼 건 없을테니까."
"정확히 어떤 얘기를 퍼트릴 생각이느냐?"
가을의 마녀가 무구하게 묻고, 나는 그녀의 번개가 감도는 창을 흘긋 보고서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네가 할 일이니까."
내 말에 가을의 마녀는 이해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표정에 감도는 뿌듯함이, 내 계획을 정확히 이해한 듯 싶었다.
군주들의 아버지는 확실히개새끼지만, 그 새끼가 정확히 뭘 꾸미는지는 흐릿한 감이 있다.
그러니, 최대한 그럴 듯한 내용을 만들어내어 퍼트릴 생각이었고, 그건 종교권이라 의례적인 이단 선포처럼 느껴질 순백교단이 아닌 산왕국에게 떠넘길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산왕국에서 섬기는 어떤 신에게.
군주들의 아버지 새끼가 해낸 일과 대륙에 사전에 퍼져있는 악명을 감안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걸 눈치챈 가을의 마녀가 뿌듯한 미소를 지우더니, 만족감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내 뺨에 손을 얹었다. 정확히는 머리 전체를 뒤덮고 있는 파워아머의 투구를.
"음흉해서 마음에 드는구나, 나의 아들아. 무릇 시련을 이겨내는 이는 흉계 역시 능해야지. 생존에는 명예와 영광이 우선되지 않는 법이니… 이 어미는 너를 전적으로 도울 생각이란다."
겨울의 신부가 보이는, 자애롭고 고아한 태도와는 다른 속내가 언뜻 보이는 듯한 태도. 시련을 이겨낸 이들을 포식하고자 하는 거대 여우의 음흉한 속이 보이는 듯 해서, 나는 그 손을 쳐냈다.
"새 갑주도 잘 어울리는구나. 그 물건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아는 물건인가?"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띈 채로 내 몸을 그 손으로 더듬었다. 갑주의 연결부나, 그 연결부 위로 튀어나오게 된 사슬갑주 등을 쓸면서 만족감과 오묘함 사이를 왕복했다.
"그럼, 알고 말고. 나와 봄, 여름, 겨울이 찢어죽였던 주의 작품이니까. 왠지 익숙하다 싶었더니, 좋은 주인에게 돌아가 다행이구나."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창조신의 성유물 중 하나인 사슬갑주에 반응했던 것을 보자면, 적어도 연관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발견된 장소도 창조신이 만들었다는 유적이었으니까.
어쨌건, 나는 내 갑주 위를 문질러대는 가을의 마녀의 손을 밀어내고서 대답했다.
"그래보였지. 그렇게 말하는 거보니 성능은 인상적인 모양인데, 다행이야."
내 뚱한 대답에, 가을의 마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음흉하게 웃었다.
"화나있구나, 나의 아들아."
"네 아들 아니야, 씨발년아."
"그런 실랑이는 되었단다. 너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내 모성을 위해 협박할 생각은 없으니 헛된 생각일랑 치우고, 어째서 화가 났는지 말해보지 않으련?"
대답하지 않으니 가을의 마녀는 웃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내가 뒤집어 쓴 헬멧의 불투명한 부분을 꿰뚫어볼 듯 바라보던 그녀는 요염하게 눈을 접었다.
"봄의 순례자와 너는 오랜 시간 만나온 건 아니었겠지. 기실, 좋은 관계를 쌓아올린 적도 없지 않느냐? 나의 아들아, 네가 지금 동정하고 분노하고 있는 이는 네게 빈번하게 암살자와 음모를 보내오던 흉수란다. 어째서 그를 동정하고 그를 위해서 이 싸움을 바치려는지 이해가 안 가는구나."
모르고 있을리가 없었다. 상대는 신이었으니. 나는 가을의 마녀가 짚어낸 내 심상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뜨고, 나보다 조금 작은 가을의 마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의몸을 하고 있으니 여우의 꼬리와 귀를 가진, 그에 걸맞게 요염하고 음흉한 신.
본래라면 그녀가 하는 어떤 질문이든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겠지만, 나 역시 말하고 싶었다. 적어도 말하지 않으면 정리가 될리가 없었으니까.
"…네 말대로, 그 새끼랑 나는 알고 지낸 대부분을싸우면서 지냈지. 녀석이 음모를 꾸미면 내가 쳐부수고, 녀석이 나를 죽이려고 들면 얼굴을 부숴줬지. 이번 싸움으로 완전히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었고. 내 손으로 죽일 생각이었지. 근데…."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고개를 비스듬하게 들어올리니 높이 걸린 천장의 테피스트리가 보였다.
"싸우려는 놈은, 제 싸움에 스스로 나서는 놈은 싫어하지 않아. 여름의 도살자는 그래서 인정하고 있었고, 봄의 순례자도 그러니 인정한 것 뿐이야. 그놈이 맞이한 죽음은, 걸맞는 죽음이 아니었어. 놈은 나와 싸워서, 내 손에 전사답게 패배했어야 한다."
가을의 마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정말로 뿌듯하다는미소였다. 음흉한 의도는 전혀 섞이지 않은 미소.
"그게 전부다."
가을의 마녀는 내 말에 방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다리가 가볍게 뻗어져, 대회랑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 테이블에 다리를 꼬아 앉은 그녀가 요염하게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어떻게 찾을 생각이니? 그 아이는 마법사란다. 그것도 공간에 특화된 마법사."
그녀의 물음은 무의미했다. 나는 구석에 떠있는 시스템 메세지를 바라봤다.
[가을의 마녀 현재 위치: 대성당]
[겨울의 폭군 현재 위치: 영원한 겨울의 땅]
[군주들의 아버지 현재 위치: 세상의 끝]
"다 방법이 있어."
가을의 마녀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고아하게 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맡긴 일을 하기 위해 떠났다.
떠나는 그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준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