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7화 〉군주들의 아버지 (187/274)



〈 187화 〉군주들의 아버지

"세상의 끝은 뭐하는 곳이지?"

내 새삼스러운 질문에,  천막 안에 앉아있던 가을의 마녀는 유감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전에도 설명했던 적이 있는 거겠지.


하지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내가 턱을 괴니, 그녀는 유감스럽다는 표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서대륙 최대의 동토. 소수의 부족 사회만이 제 움집을 틀고 살아가는 장소란다. 추워 작물은자라지 않고, 사냥감도 그리 많지 않지.  장소에 자리를 튼 부족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둘. 다른 국가에 자신의 전사들을 팔거나, 마을을 약탈하는 것 정도지."


"부족 설명은 됐고."

"그 부족 외에는 설명할  있는 게 없단다. 그야말로 영구동토니까. 특기할 건축물도, 특별한 무언가도 없지. 단지 그 뿐이란다."

생각 이상으로 척박한 땅인듯 싶었다. 신고 있던 장화를 벗어 내려놓고, 손목에 찬 팔찌를 돌려보며 살펴보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우리가 들어있는 천막은 넓직했다. 족히 5개국에서 파병한 병사들과 장수들, 병기가 즐비한 캠프의 책임자의 천막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거기에 머무르고 있는 반신의 체면을 위해서인지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얹어져 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본격적으로 순백교단을 통해 내 이름을 알리고, 가을의 마녀가 산왕국의 이름을 빌려 황제의 행적을 밝힌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뭘 하려는 건지 짐작하여 밝히고, 군주들의 아버지를 타도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좆될 것임을 알리니 그 뒤에는 그들이 알아서 병사를 파병해오거나, 물자를 보내오거나 했으니.

물론 가을의 마녀가 등에 업고 있는 산왕국이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협력을 제안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 점은 구태여 꼬집고 싶지 않았다.왜냐하면.

"나와는 협력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었니?"

 빌어먹을 년이 자꾸 저렇게 깝죽대니까.

인중을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니, 가을의 마녀가 음흉하게 웃었다.


"아니면 마음이 바뀐 계기가… 있었니?"

하고 웃으며 제 가슴께를 가리켰는데, 나는 그 큼직한 가슴에 눈동자가 향했다가 차게 식었다.


뭐, 어쩌라고 씨발년아.

존나 빨통 커서 좋겠네.

따위의 말을 눈빛으로 전하니, 가을의마녀가 슬슬 웃었다.

"넌 가장 마지막에 죽여주지. 지금은 저 녀석부터 먼저다. 그거 외에 다른 이유는 없어."

"그렇구나, 나의 아들아."

납득한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지만,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그걸 듣고 있던 메이가 부쩍 불안한 표정으로 나와 가을의 마녀를 살피고 있었다.


가을의 마녀 역시 그 눈빛을 눈치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메이에게 다가와 껴안았다.


"안심하거라, 나의 딸아. 나는 오히려 기대하고 있으니, 벌써부터 몸을 떨며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음이라, 마음을 놓고 다가올 싸움을 기대하거라."

싸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메이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가을의 마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고서 놓았다. 표정은 한결 풀렸으나 여전히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아니, 그보다. 걔도 딸이면 씨발 난 근친인가? 어이가 없어 바라보니, 가을의 마녀가 메이를 놓았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테니, 준비하면 나오거라. 전부 모여있으니."

가을의 마녀는 그런 말을 남기고 천막을 걷어붙이며 밖으로 나섰다.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 앞으로, 사람들의 분주한 소리가 들리다가 멎었다. 방음 마법이 걸려있다던 천막임을 감안하자면 당연했다.

나는 어정쩡하게 선 메이에게 시선을 보냈다가, 내 옆자리를 두드려 앉혔다. 다가온 메이가  옆에 딱 붙어앉은 후에야 나는 고개를 돌려서 겨울의 신부를 보았다.

겨울의 신부는 내 파워아머를 정비하고 있었다. 정비라고 해봤자, 간단하게 기름을 먹인 헝겊으로 닦아내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러고 있었다.


자동 수복이 걸려있는 파워아머에는 굳이 필요 없는 일이었으나, 나를 위해 애쓰겠노라고 하는 사람을 내치는 법을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그녀가 좋도록 하게 두고서 나는 그 모습을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번들번들해진 파워아머의 뒤편에서 겨울의 신부가 걸어나왔다. 손에 든 헝겊은 거의 다 말라있었다.

"다 되었어요. 직접 입혀드리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지난  당신의 갑주보다 더욱 좋은 상등품이예요. 어쩌면… 제 수리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조금 침울한 기색을 띄는 겨울의 신부에게 다가가 그 뺨을 주무르니,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내게 손짓했다. 그 손짓이 향해있는 건 개복되어 있는 독특한 파워아머였다.

나는 그 파워아머에 빠르게 올라탔다. 갑주 다리에 다리를 맞추고, 갑주 팔에 내 팔을 맞추고 숨을 들이키는 순간 사슬갑주가  전신을 휘감았다.

휘감고 나서는 뻔했다. 내 전신을 두른 사슬갑주 위로 판타지스러운 외피를 가진 파워아머가 입혀졌다. 철컥거리고, 위잉거리며  신체에 둘러졌다. 둘러지는 기색에는 그 어떤 주저도 없었다.


빠르게 내 몸을 휘감은 판금과 복잡한 구조의 파워아머에, 즉시  사슬갑주가 내달렸다. 관절, 구동부를 보호하는 형태로 뒤덮였다.


나는 그렇게 내 몸에 둘러진 파워아머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내 몸에 밀착한 파워아머는, 내 거력에 찢어지거나 파손되지 않고  힘을 온전히 전체로 전달했다.


기이한 물건이었다. 창조신의 물건이라니까 당연하겠지만.

그렇게 주먹을 쥐었다 펴거나, 목을 움직여 구동을 테스트하고 있자니, 메이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감도는 건 걱정이었다. 마치 내 감정 상태를 잘 아는 것만 같은 그런 모습.

"현성아… 아직도 화났어? 괜찮아?"

역시 메이는 눈치가 빨랐다. 겨울의 신부 역시 눈치가 빠른 편이나, 내 일이라면 내게 일임하고 나를 신뢰하며 굳이 캐묻지 않았다.

메이는 눈치는 빠르지만, 내게 문제가 있다 싶으면 걱정하여 함께 해결하려고 하거나 미력하게나마 나를 돕고자 했으니. 이 두 기특한 여자를 한 번씩 돌아보고서 픽 웃었다.

"괜찮진 않아. 솔직히 좀 거지같긴 해. 그 빌어먹을놈이 아직 살아있고, 나를 노리고 있는데다 내가 공격해올 걸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서 장이 뒤집히는  같아. 근데… 너한테 굳이 화풀이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다가가 손을 뻗으니, 메이는 오히려 얼굴을 내밀었다. 그렇게 내밀어진 조막만한 얼굴을 외피가 씌워진 장갑으로 그 보들보들한 뺨을 문질렀다.

메이는 그 손길에 미미하게 웃더니, 제 뺨을 내 건틀릿 위로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그새끼 흠씬 패주면 해결되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응, 그치! 현성이한테 걸리면 다 한 주먹 감이니까."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던 메이는, 내가 할 말이  남은 것을 알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봤다. 놀랐다기 보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인 듯 보였다.


"거기서 네 역할이 중요해."

"응, 으응? 내가?"


메이는 내 말을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했다.자신이 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는지, 자신의 힘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일행 중에서  다다음으로 센 녀석인데도.

"응, 메이의 역할이 중요해. 같이 싸워줘. 나한테 지랄하는 개자식들에게 후회를 안겨줄 수 있도록."

메이는 내 말이 갑작스러운지 우물쭈물 하다가, 환하게 웃었다. 웃으며 양 주먹을 움켜쥐었는데, 그 동작마저도 귀여웠다.


"나  할게.현성이가 진심으로 싸울  있도록, 최대한 열심히!"


"그래, 메이는  수 있어. 마법도 열심히 했고, 검술도 열심히했잖아. 누구보다 잘할 수 있지."


메이는 내 칭찬과 격려에 방실방실 웃더니 내 갑주 위로 내 몸을 껴안았다. 파워아머 탓에 조금  커진 내 눈높이는 메이의 정수리조차 내려다보기 힘들게 했다.

손을 뻗어 그 머리를 쓸어대니, 메이는 행복하다는  머리를 내 배갑에 부벼댔다.

"겨울님."


"네, 듣고 있어요."

"겨울님도 해주셔야 하는 일이 있어요."

"분부만 내려주세요, 당신께서 바라시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진짜 언제든 충성스럽네. 새삼스러운 생각에 웃으니, 메이는 내 배갑에 볼을 댄 채로 눈을 꼭 감았다. 그 모습이 마치 겨울의 신부를 떠올리게 했다.

겨울의 신부는 기름을 묻힌 헝겊을 버렸는지 빈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채로 베일을 쓰지 않은 얼굴을 내게 향하고 있었다.

고아하게 감은 두 눈과 기다란 속눈썹, 은은하게 감도는 꽃냄새에 내 마음이 다 편해질 지경이었다.

"이제부터 오는 병사들이나 병단들은 수가 꽤  겁니다. 그들을 섬기는 종자들도 꽤 있을테고, 그들이 대동한 행정인원 역시 있을테지만… 그들만으로 굴러가기엔 규모는 이미 너무 커졌습니다. 그러니."


"네."

"이 대규모 숙영지와 병단의 보급과 물자 관리는 겨울님께 일임할게요."


"…네."


그녀의 능력은 뛰어나다. 요리면 요리, 야영 준비에 연금술, 의학에다가 온갖 시중을 드는데 최적화된 기술들까지. 그녀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종자였다.

물론 그녀는  이외에는 그다지 대화를 해본 적도 많지 않았고,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진 않았다. 아마  1회차에서도 그랬을테지. 그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런 대규모 숙영지 겸 병단을 능숙하게 다루기엔, 내게는 경험이 턱 없이 부족했다.

단순히 내가 이끌거든 문제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이윽고  문제에 떠내려갈 것임을 능히 짐작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대안은 겨울의 신부를 적극 기용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관리 능력과 잡무를 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겨울님은 일반인보다 뛰어난 감각을 갖고 계십니다. 청각, 후각, 촉각. 어느 하나 범인에 접하는 수준이 아니죠. 그건 알고 계실 겁니다."

"…네에."

한층 누그러든 목소리로 보아하니, 내가 말하는 것에 설득되는 모양이었다.


조금 풀린 표정으로 내게 다가온 그녀를 보고서, 나는 메이의 등에 얹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 잡힌 손가락 끄트머리가 가냘파보였다.

"그 감각으로 잘 판단해서, 숙영지에서 주로 나온 이야기, 문제가 될 것 같은 이야기, 온갖 불평들을 매일 제게 전달해주세요."


"…염탐인가요?"

겨울의 신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리송한 표정으로 내 얼굴이 있는 방향까지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볍게 앙다문 입술은 차가운 혈색이 감돌아 그녀의 고아한 이미지를 더하고 있었다.


그런 여자한테 스파이 짓을 시킨다니, 못해먹을 짓이지만 오래 생각한 것이었다.

"예, 염탐해주세요. 염탐해서,  야영지가 중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제가 해결할 생각이예요. 싫으신가요?"

"아뇨… 당신께서 제게 이런… 적극적인 일을 시켜주시는 게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답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내 손을 양손으로 쥐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좌우로 흔들린 건틀릿이 절걱절걱 소리를 냈다.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당신께서 맡겨주신 일이니까…."

"좋아요."

생긋 웃으니, 겨울의 신부가 마주 웃었다. 그리고는 내게 안겼다. 나는 내게 안긴 두 여자의 등을 쓸어주다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차단하기로 되어있는 천막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차단되지 않는데서 밖에서 들리고 있을 소리가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모인 모양입니다."


"네에, 그런 것 같네요. 당신의 칭호를 외치고 있어요."

칭호라, 해방자겠지. 씩 웃으니 겨울의 신부와 메이가 내 품을 놓고서 내 등을 떠밀었다.


"힘내, 현성아!"

"힘낼 것까지야."

나는 파워아머 위로 둘러진 망토를 흩날리며, 바깥으로 나섰다. 바깥에는 과연 병사들이 시끄럽게 모여 내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연호되는 이름을 들으며 거검을 꺼내어 들어올리니,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더욱 커져 숙영지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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