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8화 〉군주들의 아버지 (188/274)



〈 188화 〉군주들의 아버지

그렇게 꾸려진 원정대는 빠른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애초에 진을 치고 있던 장소가 가을의 마녀를 섬기는 산왕국이기 때문인지 그다지 문제는 없었고, 아직까진 알력다툼이랄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끄는  무력 때문인지, 아니면 조율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노련함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내 손으로 내 아군을 줘패지 않는 것만 하더라도 꽤 다행이었으니까.

원정대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산왕국은 얌전하다고 하더라도, 이 대규모 원정대에 들어있는 병력의 파벌이나계보가 무수히 나뉘니, 막상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병사들은 나를 충실히 섬겼고, 중간 관리자들은 내게 무언가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거기서 이들이 군주들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위기감을 갖고 있는  아닌, 내게 위기감을 갖고 있음을 눈치챘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들은 제도가 완전히 부숴진 것을 들었으며, 그곳에서 신 셋이 만나 겨루었다는 걸 알고 있다.

거기서 살아남은 신은 둘이었으나, 하나는 도망쳤고 하나는 승리했다.

이들은  승리한 신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착잡한 일이지만 힘으로 찍어누른 셈이다. 자아내는 한숨에 따라붙는 이가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왕이시여."

"…아뇨, 뭐… 별 거 아닌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시군요. 조금 쉬시겠습니까? 이끄는 마차 중에  자리가 있을 겝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정도는 아니라서."

"그렇군요…."

따라붙은 이는 노인이었다. 화상 자국이 없어져 전보다는 덜 늙어보이긴 하나, 여전히 노화를 피하지 못한 자글자글한 얼굴을 가진 노인이었다.

퍼시벌 기사단장, 그가 내게 말을 걸어오며 왕이라 부르고 있었다.


퍼시벌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동대륙에서 건너온 내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 하기보다는 경애하고 친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신뢰와 경애에서 무엇이 주된 재료인지는   없었다.

하지만 호의는 반가웠다. 나는 내 뒤를 따르는 병력을 흘긋 보고서 말했다.


"자세히 듣진 못했습니다. 저희를 뒤따르는 병력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오히려 전하께 설명드릴 수 있어 기쁘기 그지 없군요."

겉치레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웃자, 파워아머의 헬멧 위로 웃음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우선 산왕국 측에서 보내온 전사들입니다. 투창과 도끼, 검 등으로 무장해 있고, 대부분이 보병입니다. 일부 독특한 기승물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보병이라고 보시면 될 법합니다. 이들이 가장 수가 많고, 가장 사기가 높습니다. 아무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여정을 함께하고 있으니 당연하겠지요."

고개를 돌려 그 전사들을 흘긋 보니, 과연 그 전사들 틈바구니에 껴서 유유자적하게 마차에 올라타있는가을의 마녀가 보였다.

그녀는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한지 자신을 떠받는 이들에게 차가운 무표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 다음은 공국에서 보내온 장검 연맹의 용병들입니다. 무장은 다양하고, 인종은 더욱이 다양하고, 마법사도 섞여있습니다. 명확한 통제를 기대할 순 없지만… 공국 측에서 보내온 구색만 채우는 기사단보다는 낫겠군요."


"구색만 채우는 병력은 또 얼마나 됩니까?"

"생각보다  있습니다. 실제 전력으로 기용하기에도 모호한 것이… 아마 생색만 내려는 이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구색 맞추기인 걸 잘 알고 있을 병력들이 내 통제에 거부하지 않는  다행이나, 그들이 신과 준신이 잔뜩 끼어있을 싸움에서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는 알  없었다.


텁텁한 입을 축이려고 생각하니 파워아머의 헬멧이 슬쩍 열린다. 마치 투구의 슬릿이 열리듯이.


나는 그 틈으로 도구낭에 끼어있던 수통을 꺼내어 들이켰다.


수통을 내리자, 기사단장의 설명은 이어졌다.

내가 알고 있는, 동대륙에서 건너온 병력을 구태여 다시 확인시켜주니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공화국에서 보내온 소수의 마법사들이나 교단의 성전사도 포함되어 있어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름을 전에 들은 적이 없는 소국에서 보내온 이들이나, 내가 도왔던 남작이나 내가 점령해 남작에게 양도했던 자작령의 병사들도 군데군데 섞여있었다.

그들은 구색만 맞추는 일부 병력에 비해서 질적으로 뛰어났다. 수가 적은  여전히 흠이었지만.

그렇게 꾸려진 병력이 8천을 조금 넘었다. 급하게 꾸린 병력에 준비 시간이 한달 밖에 없었던 걸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였다.

"경로는 어떻게 됩니까?"


그 수를 헤아리던 내가 물으니, 기사단장은 침착하게 품에서 작은 지도를 꺼냈다.

양피지에 적혀진 글씨와 그림은, 우리가 향할 길을 표시해둔 듯 싶었다. 그는 그 지도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산왕국이 제공하고 닦아둔 북동쪽의 산맥의 길을 따라서 이동합니다. 이대로 올라가면서 산악지대 너머로 길을 따라갈 생각입니다. 계획대로에 습격하는 이들이 없다면 별 문제 없이 몇 주 안에는 목표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라. 없을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슬쩍 눈을 돌리니, 기사단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없을리가 없겠지요. 산악지대 너머에는 소국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부족들은 그보다  많은 수로 흩어져 있다더군요. 그들에게도 가을의 마녀님께서 사절을 보내셨지만, 그 사절들  대다수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돌아온 이들도 확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 잠재적인 적입니다. 되도록이면 피해가면서 체력을 온존하여 전하의 길을 돕고 싶으나, 힘들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낯색을 굳히던 기사단장은, 불현듯 눈을 번쩍 떴다.


"물론 전하께는 위험한 이들도 아닐 겁니다."


"그렇겠죠."


애초에 나한테 위험한 새끼가 그렇게 흔치는 않으니까. 나만 하더라도 반신이 아니던가.

준신을 데려와도 그다지 위협받지 않고, 신을 데려와야 체급이 맞는 새끼.

"산왕국을 지나는 동안 위협이라고 할만한 것은… 괴물 정도 밖에 없으나, 아까 산왕국 측 전사장에게 듣기로는 괜찮다고 하더군요. 괴물들이 오랜 시간 산왕국과 부대끼며 지내는 통에 인간의 무리가 크면 피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저흰 대군이니…."

"괜찮겠군요. 행렬의 속도만 좀 신경 쓰면 되겠어요."

기사단장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동의하고, 나는 그와 8천여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길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과연, 정말로 조용했다. 괴물의 습격은 커녕 전조조차 없이, 8천명의 인간이울리는 발소리에 부리나케 도망가는지 흔적조차 보이지않았다.

어쩌면 이대로 군주들의 아버지와 겨룰 때까지 병력을 온존하고, 전력을 지켜낼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잔잔한 기대를 걸어보는데, 앞으로 나서서 길을 살피고 있던 산왕국 측의 정찰병이 돌아왔다. 조금 심각한 표정을 얼굴에 걸치고서.


그는 내게 말했다.

"앞에서 병력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무장 상태는 꽤 좋지만, 수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기다란 깃발을 내걸고 있는 걸 봐서는 대화의 여지는 있어보이는데… 어쩌시겠습니까?"

글쎄. 어떻게 해야할까. 마음 같아서는 내가 뛰쳐나가서 쓸어버린다는 것도 있었지만, 내가 그럴 짬도 아니고 과잉 진압이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힘의 차이를 심어주어서 다른 새끼들이 안 깝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괜한 관심과 반발을 사지 않을 필요도 있어보였다.

일단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들어봐야겠지만.


"가서 무슨 용건인지 묻고 와주시겠습니까? 정 지치신다면 다른 이를 보내셔도 되고, 가까이 오라 하셔도 됩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뛰쳐나갔다.


그렇게 뛰쳐나간 전령이 돌아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헐떡이면서도 착실히 내 앞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었다.

"전언을… 듣고 왔습니다."


"…아, 예. 말하세요."


물이라도 쥐어주고 싶은데 존나 뛴 다음에 마시면 속쓰리다. 게다가 지금 당장 물이 없기도 하고. 텅  수통을 건네주면 좆같아할테고.


그렇게 정찰병이 늘어놓는 이야기는 길고 장황하며, 쓸데 없이 미사여구가 많았다.

말하는 본인의 불쾌한 듯한 표정으로 짐작하자면, 저기 멀찍이 말을 타고 있는 귀족이 그대로 그렇게 말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 길고 귀족적인 말의 결론은 간단했다.

넌 못 지나간다. 정 지나가고 싶거든 돌아서 가라.  체면 좀 살리게.


 요청을 들어주면 뭔가 줄게.


별로 들어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 귀족은 그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지 멀리서 보기에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정찰병이  수 있도록 놓아준 뒤에 지그시 귀족과 그 병사들을 보았다.

병사들의 구성은 대부분이 보병이었으며, 일부 기병이 뒤섞여 있긴 하나 대부분은 단순 경기병이었다.

마법사는 보이지 않고, 신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순히 병력끼리 부딪혀도 저쪽이 패배하는 게 자명한 구성. 특별한 병기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돌아서 갈 생각은 없었다. 이쪽은 한시 바삐 산을 가로지르고 그 빌어먹을 새끼가 있는 곳까지 가야하는 상황인데, 저딴 새끼의 말을 들으며 여기에 발이 묶일 이유는 없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기사단장과 토니 스타크가 보였다. 기사단장은 특히나 언짢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귀족을 보고 있었다.


"쏠까요?마법사들도 있으니 마법 한 발씩만 쏴도…."


"아뇨, 병력에게 벌써부터 부담을 주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토니."

"음, 불렀는가."

고개를 끄덕인 기계는 인간적인 제스쳐로 나를 돌아보았다. 굳이 돌아보지 않더라도 나를 볼  있는 주제에, 충실하게 인간다운 놈이었다. 인간적이니 과하게 진압하진 않겠지.

"내가 나설 일도 아니지?"


기사단장은 내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맹주는 굳이 고민하는 동안 쓸어내릴 필요도 없는 제 턱을손가락으로 짚고서 적의 병력을 헤아렸다.


눈의 조리개가움직이는 소리가 좀 들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나 혼자서는 힘들겠는데. 전부 죽이는 거라면 모를까, 제압하는 거라면 힘들 걸세."

제압하려는 것까지 눈치챘나. 역시 괜히 맹주는 아니다 싶어 고개를 돌리니, 이미 메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메이양, 도와주겠나?"

다가온 메이가  손가락을  잡았다가 놓고, 맹주의 말에 생긋 웃었다.

그렇게 두 명…이라기엔 애매한 구성이 앞으로 나섰다.


전신에강철을 두르고, 인간과는 다른 정신을 가진 존재와 마법으로 단련된 플레이어가.


둘은 나아가서 귀족에게 몇 마디를 붙였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없었지만, 일어날 일은  수 있었다.

귀족이 역정을 내며 칼을 뽑아들려는 순간, 맹주의 주먹이 빠르게 뻗어졌다.


가격당한 턱이 비스듬히 꺾이더니 풀썩 쓰러진다. 죽이진 않았겠지만 위력은 상당하다.

그에 귀족의 사병들이 일제히 분노하며 검을 뽑아들고, 창을 겨누는 게 보였다. 말 위에 타고 있는 병사들도 검을 뽑았다.


물론 걱정하진 않는다. 메이가 쌓은 짬밥은 상당하고, 맹주는 그 장검 연맹 전설의 시작이니까. 팔짱을 끼고서 바라보니, 과연 결과는 예상한대로 흘러갔다.


화염이 뿜어진다. 수놓아지는 화염은 말을 미치게 하는지 말들은 일제히 앞발을 높이 쳐들며 제 기수를 떨어트렸다. 떨어진 이들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맹주의 주먹이 빠르게 그들의 턱을 두들긴다.


 먼 거리에서 보기에도 압도적인 풍경.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피워진 화염에 병사들이 우왕좌왕 하다가 무기를 내버리기까지 한다.

인마는 같이 뒤엉키며 지면에 넘어지고, 기절한 이들이 쌓여간다.


그렇게 쌓여가는 기절자들의 몸뚱이 위로, 넓게 트여있는 화염의 사이로 병사들이 몸을 내던져 도망간다.

갑주가 좀 그슬렸으나, 메이가 화력을 조절한 탓인지 그들은 문제 없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도망치는 이들이 지평까지 달려나가고, 뻗은 이들의 주변에 둘러진 화염이 사라진 후에.


원정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도망치는 이들이 지평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진군했고, 그렇게 나아가다 다른 부락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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