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9화 〉군주들의 아버지 (189/274)



〈 189화 〉군주들의 아버지

부락에서 부락을 거치며 나아가는 길에, 서서히 산이 아닌 평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잩게 눈이 깔린평야에는 슬슬 인간의 흔적보다는 동물의 흔적이나 괴물의 흔적이 잦아졌고, 그럴 때마다 정찰병들이 나아가는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거리가 줄어듬에 따라 원정대의 속도는 줄어들고, 움직임은 굼떠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다운 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첫날 조우했던 귀족에게 큰 엿을 먹였기 때문인지, 인근 소국의 귀족이나 부족 등은 우리에게 딱히 공격을 해오거나 기습을 걸어오는 일이 없었다.

그것도 체급이 맞아야 하는 거지, 병력의 수도 크고 병력의 질조차 섞여있는 반신과 신 때문에 압도적이라면 꺼려지기 마련이었다.

심지어는 우리가 나아가는 진로에 미리 보급품을 내려놓고, 제발 자기들을 공격하지 말아주십사 하는 부족도 있었다.

나는 그 보급품을 챙기면서 아직까지 없었지만 약탈을 철저히 금한다고 했고, 병사들은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는지 선선히 동의했다.

그렇게 신의 분노를 피하는 부족들과 국가를 가로지르며 나아가면서 의심하게 된 것은, 군주들의 아버지가 황제였다는 이력에 비해서 포섭을 그다지 해내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부족들은 과할 정도로 조용했으며, 개중에서는 신과 반신이 이끄는 군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훌륭한 전사를 보내오거나 보급품을 보내거나, 미리 길을 트어놓아 우리의 전진을 돕는 경우도 있었다.

부족이라 힘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하기에는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지나는 길에 기사단을 보내어, 친히 지름길을 안내해주기까지 했다.


기습을 걸려거든 그때 할 수도 있었거늘, 기습은 커녕 우리가 돌변하여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몇 개의 부락을 거치며 내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나아가서, 이런 요청을 하는 이도 있었다.

"당신이 그 소문의 신살자로군… 우리 부족은 줄 수 있는 게 그다지 없다네. 하지만…."


하며 품을 뒤적이던 장로가 꺼낸 것은, 가죽 주머니에 가득히 들어있는 은화였다.


언제 긁어모았는지, 은화 중에서는 동화처럼 보일 정도로 은이 녹슬거나 벗겨진 것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이들의 전재산처럼 보였다.


받아들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니 그 장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한 가지를 요청해왔다.


"부디 그 악신을 죽여주게."


이야, 여기까지 올라온지 한 달 밖에 안됐는데 벌써 악신이야?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니, 그런 내 표정을 읽을 턱이 없는 장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돈 주머니를 내 손에 쥐어줬다.


묵직한 감촉을 보아하니 액수는 꽤 되었다.

애초에 돈에 궁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러는 이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부족에는 기이하게도 남성이, 특히나 성인 남성이 많지 않았다. 있다고 하더라도 팔다리에 하자가 있거나, 동네 바보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추 짐작할 수는 있었다. 돈 주머니를 사양하며 장로를 바라보니, 그는 당황감이 감도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리인 건가?"

"아뇨, 그건 아니고… 노인장이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새끼는 반드시 죽일 겁니다. 굳이 돈까지 줘가면서 부탁할 것도 없고, 보시면 알다시피 제가 노인장보다 돈이 많습니다."


일견 굴욕적인 말임에도 노인은 화내지 않고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감도는 초조함과 불안감은 내가 설령 마음에 바뀌어 군주들의 아버지라는 악신을 죽이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기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랑 그 악신은… 개인적인 악연이 있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죽일 생각이고, 그럴 겁니다."


그제야 노인장은 안심하면서 돈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애초에 자산에 대한 욕구가 강한 편은 아니었고, 노인장에게는  돈이 제 부족을 위해 필요했을테니 굳이 갈취하지 않았다.

단지 돈을 더 내어주며 식량을 매입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노인장을 지나쳐, 원정대는 더욱 북동으로나아갔다. 나아가면서 들리는 소문들이 있었다.


악신이 데려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악신의 정원에서 괴물이 되어 배회하게 되니, 그 영과 육은 휴식하지 못하고 영원히 붙들린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내어주지 말라, 라던가.


악신이 제 궁전을 만들기 위해  신성한 땅에서 땅덩어리를 띄워내어 이적을 행사해 허공에 땅덩어리를 고정하고 있으니, 그 위에서 군림하는 악신의 위세가하늘까지 닿는다던가.

소문을 적당히 걸러낼 필요는 있었겠지만, 일관된 소문이 너무 자주 들려오니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능력을 감안하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비처럼 내려온 성벽과 건물들의 향연을, 나는 아직도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꽤 아프고, 실제로 의식을 잃을  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면 허공에 땅덩어리를 띄우는 것 쯤은 신의 힘이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보였다.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하기에 신경 쓰이긴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건 아니었다.


어찌됐든, 그런 소문을 비롯해 숙영지를 펼칠 때마다 들려오는 이야기는 겨울의 신부를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뜬구름 잡는 소문에서부터 중요한 얘기, 병사들이 주요하게 나누는 고민이나 걱정 등, 대부분의 것들은  귀에 들려왔다고 할  있었다.


 덕에 숙영지의 마찰은 최소화 되었다.


가로막는 이도 없고, 마찰도 없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산왕국의 전사들이 함께하기 때문인지, 그들의 영향으로 사기가 전체적으로 오르는 경향도 있었다.

실제로도 그들이 하는 말이  설득력 있기도 했다.


그들이 말하길.

"신이 함께하는데 뭐가 두렵나?"

라고 했으니.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았는지, 대부분의 병사들은 안심하며 밤에 안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별 탈도 없이 나아갔다.

나아가는 길에 눈이 짙게 깔리고, 깔리는 눈이 슬슬 불어나 하늘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하고,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한치 앞을 구분하기 힘들어 8천명의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하는 때가 왔다.


그제야 우리는 슬슬 도착해감을 깨달았다.


조금 얕은 언덕 위,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가르며 나아간 나와 대부분의 측근들은 볼 수 있었다.

허공에 떠있는 거대한 땅덩어리와 그 땅덩어리에서 떨어져나온 듯 흩어져있는 잔해를.


 잔해는 듬성듬성 지면에서 자라는 금속 재질의 잡초 같았다.

멀리서 보고 있기에 줄어든 원근감은 그 빼곡한 금속의 숲을 독특한 외양으로 만들었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면탑이 보였다.

탑조차 마냥 멀쩡하지 않았다.

멀뚱히 선 탑은 비스듬하게 세워져 제 잔해를 지면에 떨어트린 흔적이 역력했는데, 그 탑에서도 무언가 살고 있는 건 사실인지 희미한 신성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읊조렸다.


"소문이 사실이군요."


"…예, 저도 믿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입니다."


하늘에 떠있는 땅, 거기서는 명확히 신성이 느껴졌다.

갈무리되어, 완벽히 제어되는 그 신성은 땅덩어리를 허공에 붙들어둔 채 얼마든지 고도가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높이는 곧 무기다.  높이에서 떨어트리면 뭐든지 무기가 되고, 저 높이에 오르는 일이 쉽지 않으니 천연의 방패가 된다.

이쪽에 비행 수단이 그다지 없는 걸 알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난처했다.


"그리고 저것도 사실이군. 아무래도 자네가 고생 좀 해야겠어."

천연덕스럽게 말을 붙이며 내 우측에  기계는, 제 관절을 기이잉 하는 소리를 울리며 돌려댔다.


그 움직임에서 인간적인 흔적과 동시에 기계적인 흔적을 찾아낼  있었다.


일단 인간은 어깨에서 스팀이 나오진 않으니까.

"…그래, 그렇겠네. 드디어 좀 나설 일이 생기겠어."


흘리는 말에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천천히, 그 금속의 숲에서 무언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건 괴물이었다.

인간의 흔적을 군데군데 갖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괴물들.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인체의 불균형을 타파하려는뜻도 보이긴 했으나, 그 동작들은 전부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간보다 거대한 손을 겨우겨우 짚으며, 이상 발달한 상체를 움직여 걸어가다 넘어지는 괴물들.

기이하게 턱이 거대해 바닥에 질질 끌면서 걸어가는, 이상한 자세의 괴물들.

언뜻 악몽 속에서라도 나올 법한 외관에 목을 풀고 있자니, 어느새 앞으로 나온 이가 흠, 하는 소리를 흘렸다. 회색 단발을 찰랑이며 걸어나오는 세네카였다.

"살로메씨의 연구실에 있던 실험체들과 비슷하군요. 재생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재생합니다. 아마 저것도 그럴테죠."


내가 무심히 흘리는 말에, 세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등에 걸린 장궁이 앞으로 뻗어나와 손에 쥐어졌다.

"방법은 있으십니까?"

"화염을 쓰세요. 저것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화염이 잘 먹힐 겁니다."


세네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자기 혼자 웃었다.


"옛날 생각납니다. 그럼 가서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멀어지는 그녀의 회색 단발을 눈으로 쫓자, 기사단장이 어느새 칼을 꺼내어 쥐었다.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 쓴 채로 그 기사단장은 제 의견을 피력했다.


"군주들의 아버지가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잡아가 제물로 삼는다는 소문과도 꽤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그냥 뜬소문이라기엔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군주들의 아버지가 준신을 늘리려다 실패한 건지, 아니면 괴물을 만들 생각으로 저리 해놓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단 하나 있었다.

그 신삥 신 새끼의 멱을 따버리려면, 저 괴물들부터 지나쳐야 한다는 걸.


눈을 돌려 금속의 숲을 바라보니, 기하학적인 구조물들 사이로 괴물들이 머리를 들이민 채로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군주들의 아버지 그 개자식이 어떤 이유에서 만들었다고 확언할 수 있진 않았지만, 적어도 만들어진 후로는 경비로 세우기 위해 저기에 뒀으리라는 건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양측에 넓게 펼쳐진 설원. 지나쳐 지나가기엔 우리의 경로 전체에 깔려있는 잔해들.


크게 돌아서 가기엔 한쪽은 산을 끼고 있고, 다른 한쪽은 눈이 소복히 쌓여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호수라도 있으면 곤란했다.


결국 잔해를 돌파해서 어떻게든 저 거대한 땅덩어리에 올라야 했다.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병력이었다.


내 병력과 적 병력 모두.


군주들의 아버지는 자신을 보좌할 병력을 곳곳의 소국이나 부족으로부터 긁어모았다고 했는데, 막상 그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전부 괴물로 바꿨을리는 없을텐데. 아무리 성유물이 많다고 하더라도.


게다가  잔해들을 돌파하며  병력들이 멀쩡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해야하는 건 섬멸이었다.

처음부터 쓰는 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이 먼 길까지 따라온 이들한테 지금부터 싸울테니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최선을 다 해야지.

주먹을 쥐었다 펴고, 목을 좌우로 움직여 푼 뒤에, 파워아머 속에서 심호흡을 뱉었다.


"전원 전투 준비."

"전원 전투 준비!!!!"

내가 읊조린 말을 기사단장과 맹주가 외치고, 그 말들을 각각 병단의 지휘관이 외친다. 외치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자, 잔해 속에서 꿈틀대던 괴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고개를 들어올리고, 여기까지 들리지 않을 고함을 치며 잔해에서 기어나온다. 기어나오는 괴물들의 수는 상당했다. 그냥 넋 놓고 싸운다면 이쪽 병력이 얼마나 손실이 클지는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등에 짊어진 거검을 꺼내어 쥐고, 나는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내리꽂힌 후에 돌격합니다. 병기의 설치를 서두르세요."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이 빠르게 명령을 하달하고, 퍼지는 명령이 8천명 병력 전체를 휘감는다.

빠르게 설치되는 공성병기와 앞으로 나서 구릉 위에 자리를 잡는 궁수들.

빠르게 매겨진 시위들이 일제히 화살을 머금자, 나는 들이킨 숨을 뱉으며 손을 떨어트렸다.

[화신 강림이 발동됩니다.]

그 오 오  오 오 오  오  오!!!!!

시야 한 구석에 차오르는 메세지와 동시에, 종언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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