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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화 〉군주들의 아버지 (191/274)



〈 191화 〉군주들의 아버지

괴물들의 약진은 거칠고, 그들의 공격은 매서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큰 피해나 사상자 없이 안정적으로 막아낼  있었다.

고대에 가까운 전장일 수록 소수의 강자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했던가. 괴물과의 전투는 그런 셈이었다. 가장 고전적이고 고대에 가까운 전투 방식. 괴물들이 보여주는 양상은 그러했으므로, 소수의 강자가끼어있는 이쪽이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박살난 2파가 전장 전체에 흩어지고,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 예비열에 있던 병사와 자리를 교체하고 나서야 허공에 떠있는 땅덩어리에서 제 3파가 내려오고 있었다. 떨어지는 괴물들을 보며 내가 생각하는 건 간단했다.

"이대로는 못 버틸테지."

그런 내 생각을 읽어낸 것처럼, 가을의 마녀가 문득 말했다. 나 역시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라, 나는 그 허공에 떠있는 땅덩어리와 거기서 내려오는 괴물들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대로 전부 잡을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쪽의 병력은 소모되고 있으며, 이대로 묶여있다면 저기에 올라있는 괴물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전부 소모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이 흐름, 괴물들을 순차적으로 보내어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준신들의 화살을 날려보내 우리를 가로막는 이 흐름이 무척이나 유감스럽지만, 익숙하기도 했다.


봄의 순례자와의 전투에서, 그 신이 자신의 신성을 피와 살점, 아마 생명을 거두어 강화시켰던 것처럼.


이 시간을 끄는 행위 자체가 군주들의 아버지가 바라는 흐름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후에, 나는  조력자와 동료 중에서 힘  쓴다 하는 놈들을 불러모았다.


그렇게 가을의 마녀, NM-21, 메이가 내 옆으로 모였다.


내리는 괴물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금속 숲 사이로 보이고, 그 괴물들이 정신 없이 바닥을 박차며 침을 줄줄 흘려대는 모습을 눈에 새겼다.


"지금부터 적진을 돌파해서 탑으로 들어갈 거다."

"…흐음, 그렇군."

처음 말을 받은  NM-21, 약칭 토니 스타크였다. 그는 금속질의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긍정의 뜻을 드러내고 싶은지 엄지를 들어올렸다.


"자네 판단이 맞으리라고 생각하네."

 새끼는 이해했고. 메이와 가을의 마녀를 돌아보는데, 메이는 살짝 멍청한 표정인 걸 보니 눈치 못챈 것 같았다. 가을의 마녀는 읽어낼 표정도 없었고.

 표정을 묵묵히 보고 있자니, 메이가 내게 고개를 기울이며 '무슨 뜻이야?' 하고 입모양을 보여주었다.

나는  표정을 보고서 조금 맥이 풀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게 시간끌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봄의 순례자가 그러했듯 신성을 끌어모으는 거일 수도 있고, 뭔가 강대한 마법을 사용하는  수도 있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거나. 어쨌든, 저쪽 계획대로 어울려줄 이유는 없다는 거지."

그제야 메이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그렇게 메이가 질문을 마치자, 가을의 마녀가 방긋 웃었다.


"아무튼, 탑까지 들어가야 하고 적진을 돌파해야 하는데, 나와 한 명이 같이 그럴 거야. 그러는 동안 우리 진형이 돌파당하고 전원이 죽는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누군가는 이 전장의 조커로서 일을 계속해야 해. 하지만 그렇게 부담은 크지 않을 거야. 내가 생각하는  맞다면,  전장을 돌파하는 순간 준신들이나 대부분의 주요한 공격 수단은 나를 향해올테니."


 말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맹주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 있었고, 가을의 마녀는 별 기색을 띄지 않은  제 창날을 살펴보고 있었다. 전류가 이글거리는창날은 화려했으나 실용성도 높았다.


"그럼 전장을 유지하는 역할은, 가을의 마녀와 토니 스타크가 맡는다."


 말에 메이가 눈을크게 뜨며 놀라는 듯 싶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메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전장을 돌파하고 탑으로 가서, 군주들의 아버지를 쳐죽이러 가는 건 너랑 나야."


메이는 그 말에 우물쭈물 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왜 하필 탑이야…? 탑에 뭐가 있는지 아는 거야?"


지당한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지. 정확히 뭐가 있는지, 함정인지 아니면 적의 기지인지도 몰라."

"그럼 왜 가?"

"정황상 저 탑이나 저 거대한 땅덩어리에 군주들의 아버지가 있을테니까. 그리고 저 땅덩어리에 오르려면 각력과 가속을 생각하더라도  탑의 꼭대기까지는 오를 필요가 있어."

메이는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만약 탑에 군주들의 아버지가 있다면 탑을 오르는 중에 만날테니 좋고, 탑에 없고 땅덩어리에 있다면 계획대로 진행하면 되니까. 결국 탑에는 가야해."

"만약 위치가 다르다면 어쩔텐가? 괴물들 사이에 섞여서 내려오거나, 도망친다면? 자네가 오기 전에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걸세."


NM-21이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제 목소리를 변조하여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갖고 있는 게 일부 없었더라면, 저 의견에 나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을 거다.


아무리 가을의 마녀가 있다고 한들, 상대는 마법을 사용하는 신.

신의 권능을 다루는 능력만큼 마법을 쓴다면, 군대는 마법사 앞에서 종이인형처럼 허물어질테니.

"그럴 일 없을 거다. 다  방법이 있거든."


"흠, 그렇다면 걱정 없겠군."

토니 스타크는 간단히 나를 신뢰했다. 그 신뢰의 까닭을 내가 짚어낼 수는 없었으나 구태여 지금 물을 건 아니었다. 나는 시야  구석으로 향해있는 메세지를 바라보았다. 그 메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을의 마녀 현재 위치: 세상의 끝]


[겨울의 폭군 현재 위치: 영원한 겨울의 땅]

[군주들의 아버지 현재 위치: 세상의 끝]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녀석이 도망친다면, 저기에 뜰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나를 경계하고 있으니, 나에게 전력을 쏟으려고 하지구태여 군대에다 훼방을 놓진 않을 거라는 걸.


내 확신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약간 울상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 근데…  방해만 되는 거 아냐? 지난 번에 현성이 싸울 때도 나는 그렇게 도움이 되진 못했어. 현성이가 깔리고 있을 때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아마 내가 잔해들에 깔릴 때를 얘기하는  같았다.

"가을의 마녀님이랑 같이 가는  좋지 않을까?"


저건 그렇게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수 없음을 감안하면 전장에도 신격이 하나 남아있는 게 좋아보였다.

나와 가을의 마녀 모두 탑으로 향하면, 확실히 군주들의 아버지를 잡으러 가는 길은 쉬워지겠지만 그만큼 전장의 부담도 커질테니까.


하지만  뿐만은 아니었다. 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파워아머의 건틀릿으로 메이의 뺨을 어루어 만졌다.

"못 믿을 사람한테 등을 맡기기 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너한테 등을 맡기는  낫다고 보거든."

메이는 내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싸워온 플레이어니까, 너라면 내 의도를 말하지 않아도 정확히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잖아. 그럴  있는 건 너 뿐이야. 알겠어?"

메이는 내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복잡하게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 쳐서, 나는 일순 메이가 화난 것인지, 좋아하는 것인지, 부담스러워 하는 건지 알  없었다.

메이는그런 표정을 채로 대답했다.

"실망 안 시킬게."

언제 실망시킨 적이 있다고.  웃으며 메이의 뺨을 쓸어대니, 메이는 헤실헤실 웃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내 대답에 안심한 메이를 어깨에 걸치니,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가을의 마녀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메이를 어깨에 짊어진 채, 몰려오는 괴물들을 보며 다리를 구부렸다. 도약하고, 달려나가기 위해 몸을숙인 채, 때를 기다렸다.

쾅, 콰콰쾅!

불을 뿜으며 쇳덩이를 쏘아내는 대포들과 발리스타.  궤적에 겹친 괴물들이 후두둑 쓰러지는 순간, 나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지면을 걷어차며, 탑을 향해 달려나간다.


달려나가는 나를 본 괴물들이, 본진을 향해 뛰어가다 말고 몸을 틀어서 내게 발톱이나 손톱을, 턱을 휘둘러댔다.


 궤적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기 짝이 없었으나, 맞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바닥을 박차 뛰어올라 피하고, 공중에 뜬 내게 휘둘러지는 발톱을 가속으로 피한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앞으로 나아간 내게 날아드는 새. 그 새를 향해 곧장 불덩이가 쏘아진다.

퍼어엉!


불덩이에 직격한 새가 떨어지고,  몸에 올라타 다시 한 번 뛰어오른다. 내게 걷어차인 새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나 내 기세는 죽지 않았다.


추격하는 괴물들을 피하고, 이용해가며 탑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내  앞으로 무언가 날아왔다.


쐐애애애액!

화살들이었다.


금속으로 이뤄진, 준신의 근력으로 쏘아낸 화살들.


그 화살을 보고 떠오르는 건 절망이 아니었다. 옳거니, 하는 확신 뿐이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명확한 선언에, 나는 웃으며 가속을 사용했다.

투화아아악!


투두두두둑!

날아든 화살들이 지면에 틀어박히고, 아직 꽂히지 않은 화살들이 방향을 꺾어 내가 지나간 궤적에 제 몸을 부딪힌다. 튀어오르는 흙을 보면서,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펑!

 후두부를 향해 접근하던 화살이 메이의 마법에 떨어지고, 나는 망설임 없이 최고 속도로 달려나갔다. 전장을 가로지르며, 달려드는 괴물과 준신의 흉살을 피하며.

탑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며, 나는 그제서야 그 탑이 제도에 꽂혀있던 것임을 눈치챘다. 제도의 가장 위, 가장 높은 위치에 꽂혀있던 그 탑은 지금은 비스듬히, 공중에 떠있는 땅을 향해 솟아있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 수록, 괴물의 수는 줄어들고 화살의 갯수는 늘어난다. 나를 향해 날아드는 화살의 갯수가 시야를 까맣게 덮을 쯤이 되어서야 그 화살들은 일제히 날아들었다.

"혀, 현성아!"

"알고 있어, 입 닫아! 혀 깨문다!"


메이가 내 말에 입을 헙, 하고 손바닥으로 덮고, 띄워낸 화염구를 쏘아 화살들을 격추하는 동안, 3인칭으로 내려다보이는 내 몸뚱이가 빠르게 쏘아졌다.

탑의 입구가 가까워진다. 비스듬하게 바닥에, 반 정도 쳐박힌 입구에.

닫혀있는 거문은 내게 장애물조차 아니었다. 어깨를 세우고, 몸을 낮추고, 가속한다.

투화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앙!


가속한 내 몸뚱이는 문짝에 부딪히고, 부딪힌 문짝은 파워아머 위에서 산산히 부숴져 흩어졌다. 흩날리는 나무 파편 사이로, 탑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허름해보이는 실내에 허름해보이는 가구들. 문짝을 틀어막을 수 없는 것들.

선택지는 없었다.


몸을 돌리며 등에 짊어졌던 거검을 꺼내들어, 그대로 내가 쳐부순 입구를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부숴지는 탑의 입구와 흩날리는 돌파편. 그렇게 쏟아져내린 돌무더기가 길을 틀어막고, 그 위로 화살다발이 박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투두두두두둑!!!

하지만 뚫고 들어오진 못했다. 아무리 강력한 화살이라지만, 입구 전체가 무너져내리니 화살만으로는 뚫어낼 수 없었다.


선명하게 내리는 강철비 소리에, 메이의 몸을 어깨에서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메이와 나는 눈빛을 한 번 교환하고는 무기를 꺼내들었다. 넓게 뻗어진 탑의 입구에는, 양측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며, 느껴지는 신성에 정신을 집중했다.

느껴지는 신성의 수준은 끽해야 준신. 혹은 괴물.


예상하며 어깨에 짊어진 거검을 오르내리니, 잔해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래, 소문대로의 강함이군. 보는 것만으로도 알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는 척봐도 전사였다. 몸에는 중갑을 두르고, 손에는 묵직한 양날도끼를 든 전사.


든든히 두른 갑주와 무기는 얼핏 보기에도 상등품이었고, 미약한 신성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한 명씩 준신을 보내 길을 가로막고, 시간을 최대한 벌어내겠다는 속심이 여실히 느껴지는 구성이었다. 쓰러트리진 못하더라도, 최대한 붙잡고 늘어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겨우 저딴 거에 발목 잡힐 우리가 아닌데도.


코웃음을 치며 거검을 끌어내려 양손으로 쥐니, 메이는 적조를 뽑고서 그 위로 화염구를 띄워올리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전사의 표정이 딱딱히 굳고, 나는 목을 풀면서 슬쩍 읊조렸다.


"가자."


"응."

대답과 함께 화염구가 쏘아지고, 내가  옆에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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