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군주들의 아버지
느껴지길, 몸으로 흡수되는 신성이 없었다. 허나 눈 앞에 떠있는 메세지는 군주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명시하고 있었다.
사실 죽지 않았다? 그럴리는 없었다. 시스템 메세지가 거짓말을 해봤자 어떤 쓸모가 있다고?
그럼 뭐지? 확고하게 외칠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으니, 빈약한 상상력이 가열차게 돌아갔다. 그 상상력에게 판단을 떠맡긴 채로 눈을 돌리자, 지면이 보였다.
그건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은 빛나고 있었다. 제 주인의 뇌수와 피에 적셔진 이후로, 빛을 내며 마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망설일 틈은 없었다. 어떤 마법인지, 어떻게 한 것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발을 크게 들어올렸다가 굴렀다.
콰아아앙!
쪼개지는 마법진과 튀어오르는 파편들.눈에 도저히 보이지 않도록새겨놓은 마법진이 깨져나가자, 불길한 붉은색으로 달아오르며 빛나고 있던 마법이 일렁였다.
그 순간 빈약한 상상력이 답을 내었다. 이 마법진은, 군주들의 아버지가 자신이 죽는 걸 전제로 하고 짜여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럴 듯한지, 어떤지는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 조악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파괴된 마법진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스멀거리며 달궈진 공기를 맴돌고 있었다.
안 멈춘다고?
흘러나오는 마력이 간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에 준하는 마력은 헤로디아가 신이 되기 위해 사용했던 마법에서 정도 밖에는 보질 못했던 규모였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거대했다. 한 생명체가 신이 되려는 것보다 더 거대한 마력이 그 마법진에서 떠돌고 있었다.
파괴된 탓인지 흐름은 불안정하고 약화되고 있는 것이 체감되었지만, 마법 그 자체를 가로막을 순 없어보였다.
발동은 여전히 되고 있었다.
슬쩍 눈을 돌려서 군주들의 아버지의 시체를 바라보니, 그 몸뚱이는 머리를 잃고 편하게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리저리 쪼개지거나 두들겨 맞아 박살난 몸뚱이가 흉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몸뚱이를 보는 순간, 많은 것이 떠올랐다.
"씨발."
도끼를 던져서 저 놈의 팔을 부수고, 저 놈이 부리나케 도망갔을 때, 전사가 아닌 저 놈이라면 나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없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었다.
놈은 황제이자 마법사일 뿐, 본래 전사는 아니었다. 천칙이 아닌 일을 시킨들 능히 해낼리 만무했고, 그러니 자신의 죽음을 쉬이 예상했을 터였다.
그렇게 예상된 죽음을 전제로 놈은 계획을 세웠다. 어느덧 거센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을 보다가 다리를 구르기 시작하면서, 떠오르는 가능성을 머릿 속에 담았다.
쾅, 쾅!
지면이 부숴지고 어지럽게 마법진이 튀어오르는 가운데 가능성들이 나열되었다.
군주들의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마법진을 설계한다. 설마하니 두 개를 설치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테니, 두번째 마법진은 보이지 않도록 투명한 도료, 시료 무엇이 되었든 보이지 않도록 그려넣는다.
쉽게 부서지지않도록 난잡한 모양으로 한다.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마법진과 평범한 마법진 두 개다. 그렇게 속임수를깔아놓고 승부에 응한다.
나름 애를 쓰는 듯 싸워서, 어떤 신살자가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뒤는 뻔했다. 일부러 죽어, 마법진을 발동시킨다. 마법진에 새겨진 마법을 알 수가 없으니 내가 막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마법진을 억지로 때려부수면서 나는 생각했다.
실수했다. 메이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메이와 함께 올라왔어야 했다. 이런 마법을 비틀어낼 마법적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초조함과 억울함, 한 방 먹었다는데서 오는 좆같음을 담아 마법진을 집어던졌던 거검으로 내리찍는 찰나, 뒤에서 인기척이 물씬 풍겼다.
"…혀, 현성아?"
메이였다. 메이는 회랑의 입구에 선 채로, 시체들과 빛나는 마법진을 보고 있었다.
메이의 표정이 굳어진다. 무슨 마법인지 눈치챈 것처럼, 당황과 경악으로 표정에서 넋이 빠져나간다.
저 표정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무슨 마법이든, 무척이나 위험한 마법이란 걸.
당황하여 얼어붙은 메이에게 손을 내저으며 가까스로 외치는 순간.
"…나가! 도망쳐! 여긴―"
마법진으로부터 거센 빛이 터져나왔다. 그 빛은 순백에 가까웠으나, 무척이나 짙게 신성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군주들의 아버지가 제 신성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내 전신을 타고 흐르는 이질적인 기운과 막대한 부유감에 그 사이에서 떠돌던 의식이 멋대로 사라졌다. 나는 절로 욕지기를 뱉었다.
"이런 씨―"
쿠우우우우우웅!!!
그리고 세상이 어둑해졌다.
*
가을의 마녀가 뻗은 창이 재빠르게 머리를 으깬다.
벼락을 품은 창날에 가격당한 괴물은 제 머리를 잃은 것도 모른 채 팔을 휘적이다가 쓰러지고, 그런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는 소형 괴물을 NM-21의 철권이 응징했다.
"쏴라!"
이어서 세네카의 명령. 화염석을 매단 화살들이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어, 괴물들을 침묵시킨다.
그 양옆으로 밀고 들어오는 기사단과 기병들, 전사들.
전황은 여유로웠다. 상상했던 것만큼 여유롭진 않았지만, 괴물을 상대로 이정도 사상자를 내면서 겨우 싸워나간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 생각은 전체적으로 전장에 머무는 병사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는데, 그들은 이대로 올라간 신살자가 신을 죽이면 끝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했었다.
이따금씩 뿜어져 나오는 공간파와 화염. 언뜻 비치는 후광과 폭음. 그 소리와 작용에 사람들은 기도를 올렸다. 여유로운 전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치였다.
가을의 마녀 역시 제 아들이 해낼 거라 믿으며 창을 휘두르고, 재앙을 뿌렸다.
아무런 문제는 없어보였다.
지금까지는.
가을의 마녀는 심상치 않은 신성의 유동을, 타오르는 신성을 느끼고서는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땅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사실 추락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저게 누군가의 마법이나 신성으로 인한 작용이라면, 유지하던 이가 죽었을 때 그 효과가 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가장 중요한 건, 현재 봄의 순례자의 신성으로 보이는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괴물들이 떨어지는 땅에 깔리면서도 두려워 하고, 두려워 하는 괴물들이 전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칠 때, 그녀는 의아해 하는 병사들을 보았다.
모든 병사가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극히 일부의, 아주 감각이 좋거나 수준이 높은 병사들만이 의아해 했다. 뭔가 이질적인 감각이 그들을 휘감고 있었으므로.
헌데 그 감각이 너무 거대해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노라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가을의 마녀조차도.
하지만 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가을의 마녀는 병사들에게 경고를 할까 하다가, 시련을 이겨내는 것은 어미의 몫이 아닌 자식된 이들의 도리라고 생각하면서 창을 바닥에 쳐박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몇 병사나 산왕국의 전사들이 안전한 수목선까지 오르고, 조금 위에서 상황을 괄목하던 지휘관들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에 떠있던 땅덩어리들이 내려앉는다. 돌덩이나 먼지 따위가 어지러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들은 거대한 마력파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마력파는 지천을 뒤덮는 것을 넘어 세계 자체를 삼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퍼져 나갔다.
그에 가을의 마녀의 표정이 드디어 무너졌다. 그녀가 예상하던 것보다 한참은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굴레가 더 짙어지겠구나."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몇 병사들이 불안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퍼져나가는 불안감에 지휘관들이 웅성대고, 간부들이 그것을 다잡으려는 때에.
갑작스럽게 이변은 나타났다.
쿠구구구구구구구
그것은 지진이었다. 주변에 화산지대는 커녕 인근에 산 하나 드문 설원의 위로, 짙게 지진이 퍼져나갔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땅은수목선을 무너뜨렸고, 나무가 쓰러짐에 따라 몇 병사는 깔리거나 즉사했다.
인간이 쉬이 죽어나가고, 땅이 갈라져 슬쩍 생긴 틈으로 시체가 낑겨들어가는 동안, 맹주를 비롯한 일부 강자가 발바쁘게 뛰쳐나가 나무를 쳐내거나 병사들을 보호했다.
괴물들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누군가 내뱉은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려앉은 거대한 땅덩어리가 튀어오른다. 미약한 부유감이 그들을 감돌았다.
"꽉, 꽉 잡아!"
누가 무심결에 외친 말에, 10m 가까이 떠오른병사가 어어어 하는 소리를 내다가 추락해 죽고, 그 광경을 본 후에야 병사들이 대부분 제 병장기를 바닥에 쳐박거나 나무를 붙들었다.
거친 지진이 땅을 뒤흔들어대니 진동에 시달리는 이들이 넘어지거나 크게 다치거나 죽는 와중에, 대공은 의아한 모습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진이라지만, 이렇게 길고 강력한 지진은 처음이었다. 마치 누군가 대륙을 집어들어 내던지는 것 같았다.
사실상 평원이라서 이정도 피해에 그쳤지, 도시라면 더 큰 피해가 나고 있을 게 뻔해보였다.
방금느낀 마력파와 불길한 지진에, 대공이 퍼즐을 짜맞추던 찰나, 기사단장이 읊조렸다.
"저, 저건."
읊조린 음성에서는 공포가 휘몰아쳤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기에 나오는, 선연한 공포.
기사단장의 늙은 얼굴이 몇년은 더 폭삭 늙은 듯이 보이고, 그에 대공과 세네카, 살로메는 일제히 고개를 들어올려 하늘을 보았다.
"여, 여름이시여…."
그들 중 당황하는 음성을 낸 것은 살로메였으나, 다른 두 명의 당황감도 그에 못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당황스럽긴 하나 공포스럽지는 않아 하는 가운데, 일부 병사들만은 압도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병사들은 여름의 도살자를 믿는 이들이었으며.
주현성의 위대함을 가장 처음 보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공포에 떠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지가, 무척이나 익숙했으므로.
가을의 마녀는 고개를 들어올려, 자신의 예상이 맞음을 알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눈 앞에, 그리 멀지 않은 평야 너머에 보이는 것은, 여름의 땅이었다.
사막과 화산, 그 위에서 우후죽순으로 자라나던 괴물들을 보면서 가을의 마녀가 한가로이 창을 등에 걸치고, 여름을 신앙하는 이들이 절망적으로 기도했다.
한 때는 떠났다고 자신할 수 있었던 땅이 눈 앞에 보이는 것에, 기사단장을 비롯한 여름의 교단 간부들이 당황감과 공포를 드러냈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
개중에 가장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기사단장이 씹어뱉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현실은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당황하면서도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나갔다.
제발 눈 앞의 사막이 그저 모습이 비슷한, 다른 곳이기를. 그럼에도 눈 앞에 보이는 사막의 자취와 그 모양새를 읽어낼 수 있음에 절망하면서.
가을의 마녀가 그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후, 하는한숨을 내뱉었다.
"한 방 먹었구나, 나의 아들아."
그녀라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으나, 몇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스륵 움직여 한 켠을 보았다. 설원이 끝나는 접경, 억지로 이어놓은 것처럼 융기하여 솟아오른 거친 모양새의 땅. 어울리지 않고,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없던 풍경.
그 산은 칼날처럼 생겨 제 몸 위로 무언가 오르도록 두지 않았다.
그 땅덩어리의 너머에는, 사막에 살아서는 안될괴물들이, 신성이 없이 꿈틀거리는 괴물들이 득시글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가을의 마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번 사태를 시련의 탑에 옮기노라면 이렇게 명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륙 충돌.'
군주들의 아버지가 부린 마지막 대마법의 결과물은, 그 간단하면서도 섬뜩한 말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일어날 시련들이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