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6화 〉대륙 충돌 (196/274)



〈 196화 〉대륙 충돌
"…커헉."

언제 의식을 잃었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떠지는  앞이 멍하고, 머리가 징 울리는 것이 내가 언제 기절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절로 폐부에서 기침이 새어나와서, 콜록대면서 겨우 숨을고른다.

일으키는 몸뚱이가 왠지 무거웠다. 피곤한 걸까. 쌕쌕 내쉬는 숨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데, 주변은 어둑했다.

밤인가?

멍한 정신으로 어떻게든 유추해보지만, 그다지 보이는 건 없었다. 하늘이 어둑한 게 아닌 건가? 하늘이 어둑하더라도 희미하게 잔상이 남아야 하건만, 마치 빛 한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어두웠다.


"…어쩔 수 없지."

허리춤에 메어져 있던 도끼를 끌어내려 쥐고, 그 위로 화염 부여를 사용하니 불이 피어오르며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풍경은 결코 깔끔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말하자면, 개판이었다.

박살난 지형과 장식물들, 군데군데 섞인 건물의 잔해. 그야말로 폐허라고 할 수 있을 풍경 사이로 새겨진 인위적인 파괴의 흔적.  파괴의 흔적들은 다른 흔적들과는 달리 내 손으로 이뤄졌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 물건들도 있네."


그제야 상황이 좀 떠올랐다. 나는 군주들의 아버지와 싸웠다. 녀석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녀석의 부하들 역시 그랬고, 놈이 휘두르는 공격 수단은 내가 대응할 수 있는 것 뿐이었다.

그대로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마지막 순간에 놈은 제 신성을 태워서 뭔가를 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으니 그렇지.

그 결과 나는 의식을 잃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폐허였다. 마지막에 찾아온 밑도 끝도 없이 찾아온 추락감과 충격, 주변의 대대적인 파괴 정도로 보아 판단하자면 하늘에 떠있던 섬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거검과 방패를 회수하여 몸에 붙이고 있자니, 몸이 뻐근하고 근육이 울려왔다.

하지만 생각보다 견딜만 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이정도로 그치면 다행인데다,  피로감은 아마 영혼 발화의 반동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실상 추락으로 인해 다친 곳은 없어보이기도 했고.


그게  거인의  덕인지, 아니면 파워아머의 작용인지는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주변을 훑어보며 낙인을 내밀었다.

타오르는 불덩이에 의해 비추어지는 폐허는, 생각 이상으로 어지러웠다.

"메이! 어딨어?!"

내 몸은 사실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내 몸뚱이라면 뭔 짓을 당하더라도 어지간하면 멀쩡할테니까.


하지만 메이는 그렇지 않았다. 메이는 몸에 갑주를 두르고는 있다지만 그 갑주의 수준이 엄청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니.

방호력이 부족한 메이라면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괜히 걱정되어 크게 이름을 부르며 주변을 훑는데 모습은 커녕 인기척 하나 떠돌지 않았다.

메이만 걱정인 것도 아니었다. 이런 엄청난 질량의 병기라고  수 있을 것이 고공에서 떨어졌는데, 전장에 있는 이들도 멀쩡하긴 힘들 터였다.


걱정되는 심리를 억지로 찍어누르며 주변을 불안하게 훑던 와중에, 나는 뒤늦게 잔해 사이로 사람을 찾아냈다.


"…겨울님."

메이는 거기에 있었다. 메이는 다쳤는지 갑주가 벗겨진 채 알몸에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고, 의약픔 특유의 역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겨울의 신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다친 것 같긴 하지만, 겨울의 솜씨라면 언제나 믿을 수 있었다.

안도하며 다가서는데, 뭔가 이상했다. 예를 들자면… 겨울의 신부의 몸에 상처 하나가 없는 거라던지.

새삼스러운 의심이었지만, 겨울의 신부는 그런 내 기색을 모른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알아챈 건지 내게 손짓했다.


"당신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몸에 이상은…."

"아뇨… 딱히 없습니다. 조금 결리긴 하는데, 싸워서 그런 거고…."

내가 그녀의 앞에 주저앉으니, 그녀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내게 얼굴을 향해왔다.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감정은 잔잔한 행복감이라,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차마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1회차 꿈에 대해서 물어보지 못하던 내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지금껏 내게 1회차를 알고 있었다는 것만 같은 신호는 은연 중에 흘렸으면서 직접 말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늪지에서 나를 보호했을 때, 내게 아는 척을 하거나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는지. 처음 본다는 것처럼 그랬으면서 내게 호감을 보내온 이유는 뭔지.

물끄러미 바라보니, 겨울의 신부의 창백한 손이  뺨을, 정확히는 헬멧을 타고 올랐다.


그녀의 손은 헬멧에 흠집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녀의 악력이 나와 준하는 수준인 걸 감안하면 터무니 없을 정도의 완력 조절이었다.

…아니, 어쩌면 완력 조절이 아닐 수도 있었지.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내 뺨을 매만지다가, 생긋 웃었다.


"평소와 다르시네요.뭔가… 신경 쓰이시는 일이 있으신가요?"

"…예."

겨울의 신부는 내 음성과 태도에서 무언가를 짚어냈는지 묵묵히  뺨을 매만졌다.


차마 묻기엔 여러가지가 내 목에서 말이 새어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있었다.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심리에서부터, 헛다리가 아니라 뭔가 엄청난 꿍꿍이가 있을 경우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까에 대한 것까지.

그래서 입을 열었다 닫으니,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알고 싶으신 건가요?"

그 상냥한 물음에 담긴묘한 거리감. 그 거리감이 내게 침묵을 선사했다. 입을 닫으니, 그녀는 그 슬픈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헬멧 위로 손을 문질렀다.


"당신께서는, 절 알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음성에 담긴 감정은 그다지 삭막하지 않았다.차갑게 내 심장을 내리누르지도, 위협하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 같은, 죄악감이 짙은 목소리였다.

나 외에는 관심도 없었고, 내가 시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않던 그녀였으나 그녀가 판단력이 없거나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아니라는 건 잘 드러나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기색을 숨긴다는 느낌이 짙었다.


여전히 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는 내 뒷목에 손을 얹어 끌어당겼다. 주춤하며 끌려가니, 그녀는  헬멧 위로 이마를 툭 얹었다.

"당신께서는 의심하고 계시는 거겠죠. 제가 많이… 이상하니까요. 처음  때부터 조건 없이 사랑하며, 의심과 숙고도 없이 당신께 봉사하겠노라고 했었으니까요. 합리적이지 않았겠죠…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의심을 살만도 하고, 당신께 불안감을 선사할만도 한 행동이었죠. 그저… 제가 당신께  믿음을 드리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예요."


내 심리를 꿰뚫는 듯한 말에 입을 벙긋거리니,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내 손을 겹쳐 잡았다. 내 손보다 한참 작은  손이 끌어당겨져, 제 목에 얹어졌다. 내 건틀릿 아래에서 가냘픈 겨울의 목이 느껴졌다.

"제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답니다. 당신께서 느끼실 불안과 공포 역시."


"무슨 말을…."

"저는 당신의 종자, 부디 제가 필요 없으시거나… 저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거든 망설임 없이… 저를 죽여주세요."


그 음성에서 거짓이라는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속이려거든 얼마든지 속일 수 있겠지만, 왠지 거짓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내게 뭔가를 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수 있었을테고, 변명을 하거나 모른 척  수도 있었을 거다.

오히려 이 행동이 그다지 신뢰를 심어주지 못한다는 건, 아무리 내가 병신이어도 잘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헬멧 너머에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체념과 죄책감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겨울의 신부의 목에 드리웠던 내 손을 치우며 말했다.


"저는 겨울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올려 내 얼굴이 있을 방향에 수심 어린 표정을 보냈다.


"하지만 제가 겨울님을 의심하는 이유는, 제게 애정을 보내오는 모습에서 수상함을 느꼈다거나 제게 뭔가를 하려고 해서가 아닙니다. 겨울님이 가진 비범한 능력 때문도 아니예요. 제가 겨울님을 의심하는 이유는…."


차마 말하기 힘들었으나, 그녀는 어느새 내 손을 쥐고 있었다.

"…겨울님이 제게 말해주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겨울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어떤 취미를 가지셨는지, 저와 함께한 몇십년간, 제게 겨울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며 어떤 미래를 그려나갔는지. 제가… 제가… 마지막에 어떻게 끝을 맞이했는지."

그녀의 표정이 울 듯해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말했다.


"그걸 말해주지 않아서, 의심하고 있는 겁니다."

"…기억, 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울 듯한 표정에는 물기 어린 음성이 섞여 있었다.


"전부는 아닙니다. 다만… 드문드문 기억에 있어요. 꿈에서 봤어요."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궜다. 눈물이  방울, 지면에 투둑 떨어진 후에야 그녀는 내 손을 쥐고 있던 손을 끌어당겨 매만졌다.


"…일단여기서 벗어나는 게 먼저고,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니까 굳이 더 캐묻진 않겠습니다. 다만… 전부 설명해주셔야  거예요."


 이상 숨기는 건 금지입니다. 하고 덧붙이는 말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끄덕임을 보고서,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겨울의 신부가 치료하고 있던 메이를 등에업고, 한손으로 겨울의 손을 붙들고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잔해들이 헤쳐진 흔적 사이로, 드물게 들어오는 빛을 따라가서야 나는 밖에 나설 수 있었다. 어둑하게 흘러내리는 달빛과 점점이 박힌 별들. 극지답지 않은 후덥지근한 공기가 내 파워아머를 두들겼다.

그 후덥지근한 공기 사이로 보이는 건, 예상하며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것보다 한층  심각한 개판이었다.

사람들은 죽었는지 널부러져 있고,  사이로 부상을 입은 이들이 어미나 신을 찾으며 뒹굴었다. 다치거나 죽은 이들이 생각보다 더 되는지 차마 처치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을 눈에 담고 있자니, 누군가 내게 저벅거리며 다가왔다.

"나의 아들아, 딸아.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그 누구도 저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오지 않아 걱정하던 차였단다."

…딸?

딸'들'이 아니고?

예상하던 것 중 하나가 맞아떨어지는 감각에 유감스러워 그저 고개를 끄덕이니,  오른손을 쥔 겨울의 신부의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가을의 마녀에게 시선을 향하니, 그녀는 방긋 웃었다.


"싸움은 무사히 끝났느냐?"


"…뭐, 그렇지. 개쳐발랐어."

"그럴 것 같더구나."


무난한 대화 속에서, 가을의 마녀는 창을 등에 짊어진 채로 내게 공격해오려는 기미조차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너나 네 전사들의 도움 없었으면 더 힘들었을 거야."


"어머, 웬일로 솔직하구나."

가을의 마녀가 흘리는 웃음소리가 재난 상황에 가까운 참상 위에서 울러퍼졌고, 나는 그 웃음에서 미묘한 불길함을 읽어낼수 있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니, 가을의 마녀가 썩 즐거운 기색으로 말했다.


"힘을 아끼라 하고 싶지만, 그리 쉬이 풀리진 않겠지. 저 지평을 보거라, 나의 아들아. 너의 시련이 저기 있나니."

그 한껏 꾸민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건 화산이었다. 여태 여기까지 오는동안 제 모습을  번도 드러낸 적 없는, 어딘가 낯선 화산. 그 위로 피어오르는 용암과 화산재는, 이 풍경이 현실임을 넉넉히 알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군주들의 아버지가 사용한 마법이 화산을 만들어내는 거였나?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도 강력하고 압도적인 마력이었다. 헤로디아가 신이 될 때 사용한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출력의 대마법이었다.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도로 가을의 마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의 아들아,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선지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으니,  번개에 올라 대륙을 살펴본 풍경이 참으로 가관이더구나. 너는 전투에선 이겼으나 전쟁은 승리했다 자신할  없으리라."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질문에, 그녀가 홍소를 흘렸다.

"동대륙과 서대륙이 이어졌다. 압도적인 신성을 태워 얻어낸 마력으로, 대륙 자체를순간이동 시켰다. 그 결과, 대륙과 대륙이 접하는 부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서대륙 전역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 성, 도시, 국가가 무너졌다. 제 살 길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아, 이토록 많은 시련이라니. 가슴이 떨리는구나."


행복해 하는 그녀와 달리, 내가 당황감에 얼굴을 굳히니, 가을의 마녀는 정말 행복한  웃었다.

그 미소에서는, 짙고 솔직한 행복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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