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7화 〉대륙 충돌 (197/274)



〈 197화 〉대륙 충돌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나는 내게 그렇게 말을 붙이는 해골의 머리에 새겨진 흠과 쪼개진 흔적을 보고서는 차마  되었노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공님은 별로 안 무사해보입니다."

"아, 이거 말이십니까?"

대공은 제 머리의 쪼개진 틈을 백골 손가락으로 슥슥 문지르더니 일부러 웃는 소리를 흘렸다. 폐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닐 웃음소리가 들렸으나, 섬뜩하다기 보다는 측은했다.


"저야 이미 죽은 몸. 저보다는 휘말려 죽은 병사들이 걱정입니다. 그래도 대전사님께서 돌아오셨으니, 걱정은 없지요."


그 신뢰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간부 중에서는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이가 나온 것 같진 않았다. 기사단장은 황망한 표정이나 여전히정신을 부여잡고 있었고, 세네카는 어쩌다 다친 건지 팔에 간이 부목을 대고 있었으나 다친 게 고작일 뿐, 목숨에 지장이 있진 않았다.


살로메, 근위대장, NM-21은 아예 상처 하나 없었다. 그들이 대동한 부관들은 전장에 퍼져있어 파악할 수 없었으나, 핵심적인 간부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병사들입니다. 지진 중에 사상자가 꽤 나왔습니다. 죽은 이들을 다 헤아린 건 아니나 전투 중에 죽은 이들과 합산하자면 100여명 정도 죽었습니다. 병기들도 대다수가 파손되었고, 보급 물자들도 몇몇은 못 쓰게 되었지요. 허나 그 이상으로 문제인 건 병사들의 사기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참상에 정신을 놓은 병사들도 일부 보입니다."


허허롭게 웃으며 나를 안심시키려던 대공과는 다르게, 기사단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그 말이 맞는지, 고개를 슥 돌리면 메이의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병사들의 일그러진 얼굴들이 보였다.

내가 그 얼굴들을 헤아리고 있으니, 기사단장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우선 웜홀을 엽시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멀쩡해 보이는군요. 병사들을 제자리로 되돌려보내고, 저희도 이만 물러납시다. 교단까지 병사들을 이끄는 건 제가 해도…."

"그것이…."


그런  제안에 대답한 것은 대공이었다. 그는 표정 하나 보이지 않는 백골로 우물쭈물 하더니 말했다.

"웜홀을  좌표가 완전히 꼬여버렸습니다."

내가  말을 이해하려 생각하는 동안, 대공은 그런  무지의 사이로 현재 상황에 대한 낙관할  없는 침통한 사실들을 때려박았다.


"아마 직접 가보지 않는  확신할 순 없을 터이나, 서대륙과 동대륙을 잇는 웜홀도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좌표가 이리도 완벽히 꼬여버린 것은 처음이라, 다시 웜홀을 열려거든… 목적지가  그 장소에 직접, 다시 한 번 들려야  겁니다."

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빡대가리인  아니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이해하기엔 찾아오고 수반될 정신적 충격은 상당했다. 입을 떡 벌리고 있으니 대공이 웃었다.  웃음은 왠지 뒷맛이 썼다.

"적어도 동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득입니다. 장기간 항해를 할만한 자원을… 지금의 서대륙이 감당 가능할지 알  없으니까요."

조금 새삼스럽지만, 가을의 마녀가 했던 말이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칼날처럼 솟아있는 산맥들이었다. 가을의 마녀는 저 산맥이 대륙의 접경지, 정확히 환경이 변하는 부분에서 생겨나 있었다고 말했다.


즉, 저건 대륙의 접경이었다. 억지로 이어붙어 충돌하면서 생겨난 산맥인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대륙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탈 필요는 없었다. 대신 저 거대한 산맥을 지나가야 할 뿐.


그 칼날 같은 산맥 너머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소리와, 분화하는 화산들의 소리는  등골을 오싹거리게 하는 감각을 남겼다.


거기에 언뜻 보이는 날아다니는 괴물들은 서대륙의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약한 축에 속하는 괴물들과는 달리, 동대륙에서나 볼 법한 변질된 이형을 갖추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자신만만히 대답할 순 없었지만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어떻게 할텐가?"

물음은 NM-21에게서 나왔으나 간부들 대부분의 표정에서 떠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 해결법을 요구했다. 그 요구가 마냥 틀린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간 나를 믿고 따라왔으니, 이번에도 내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하라고?


착잡한 마음으로 칼날 같은 산맥을 보았다.  산맥은 건너려거든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기분으로 올라야할 것처럼 보였다. 생겨난지 얼마 안되어 그 봉우리에 눈이 쌓여있진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고도가 높을 수록 온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8천명에서  수가 줄긴 했지만, 나머지 7천 몇백이 전부 따라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산맥은 나 혼자 오르기도 힘들다.


근데 7천 몇백에 부상자들까지 대동하고 저 산을 넘어서, 거리가 좀 있는 편인 고대의 도시나 발데가리아까지, 저 많은 괴물들과 혹독한 사막의 환경을 이겨내면서 횡단한다?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돌아갈 수 없었다.


가장 편리한 이동 수단인 웜홀이 차단되었다면, 바로 돌아갈 순 없었다. 적어도 돌아가려거든 가장… 안전하게 지날 곳을 찾아  방향으로 지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어쩌면 대륙을 횡단하여 최남단에서 배를 타고 크게 돌아서 가야할 수도 있었다.


방법이 없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그 산맥을 바라보고 있으니, 간부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 흘긋 보였다. 항상 대답을 내놓던 내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그들도 직감하는 모양이었다.


군주들의 아버지가 남긴 빅엿이, 아주 제대로 먹혔다는 걸.

내 잘못이었다.


조금 숨이 거칠어지고, 머릿 속에서 사고가 엉킨다. 뒤엉키는 실타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박살나가는 이성을 쥐려고 하는데.


"…으."

메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앓는 소리였다. 앓으면서, 뒤척거리는 소리였다. 내 파워아머 위를 스치는 머리칼이 부슬부슬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릴  있었다.


그러자 내 뒤에 서있는 이가 눈에 보였다.

겨울의 신부는 눈물이 흐른 자국을 문질러 닦으며 내 손을 쥐고 있었고, 가을의 마녀는 조금 뒤에서 내가 대처하는 꼴을 보고 있었다.


그 뒤에 보이는 이들은 병사들이었다. 당황하고, 놀라고, 분노하고, 침통하여 전장 전체에 넓게 퍼져 번민하는 이들.


나를 믿고, 나를 따라 신을 죽이기 위해 긴 여정을 함께 해온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제 할 일을 충실히 이행한 이들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할 일을 알  있었다. 힘든 여정이 된다고 하지만, 힘든 길을 피하겠노라고 가만히 서있어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힘든 길 밖에 없다면, 그 힘든 길이라도 마다 않고 걷는 수 밖에.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일단 병사들을 진정시키고모아주십시오. 광란하는 이는 제압하여 약을 먹여 재우시고, 부상자들도 한데 모아 처치부터 합시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이견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고서 흩어졌다. 살로메와 대공 역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리를 뜨자, 그들을 알아본 일부 병사가 그들에게 모여 해결책을 묻는 것을  수 있었다.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그 말에 설득된 고참 병사들은 병사들을 다독여 일으켜세우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겨우 입을 닫으니, 가을의 마녀가 내게 다가왔다. 흔들리는 큼직한 털뭉치 꼬리와 귀가 쫑긋거렸다.


"어쩔 생각이냐, 나의 아들아."


"일단 사람들을 모아야지."

"그 뒤엔?"


"…내려가야지. 돌아갈 방법이 가로막혀 하나 밖에 남진 않았지만, 가만히 앉아 뒈질 수는 없어. 돌아갈 사람을 돌아갈 곳으로 보내주고, 피난하고자 하는 이들을 이끌어야지."


내 대답에 가을의 마녀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라면 전투가 끝났으니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나의 아들아. 자처하여 인간을 이끄는 기수가 된다고 한다면 시련을 관장하는 어미로서 돕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녀는 창을 등에 짊어진 채로 내게 다가와,  뺨에, 내 헬멧 위로 손을 얹었다.

"전사들은 내가 알아서 데려다주겠다. 데려다준 후에는네게 돌아올테니, 그때 나를 죽이든, 아니면 나를 힘으로 쓰든 마음대로 하자꾸나. 중간까지는 함께일테니, 이 어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생긋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네는 가을의 마녀는, 그 표정을 쉬이 읽어낼 수 있었다. 그 표정에서 떠도는 감정은 환희였다. 인간들이 모두 시련을 겪게 된다는 것이, 내가 사람들을 이끈다는 고생길을 고른 것에 기쁜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나는 굉장히 거부감이 일었다. 언제든 내 뒤통수를 노릴 수도 있어보이고, 힘도 강력한 존재가 내게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내가 거부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얼굴은 예쁘고 몸도 상당히 그렇다지만, 그게 내 목숨을 부지해주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겉껍질만 그럴 듯한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좋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 중간까지는 함께겠지. 잘 부탁한다."

 대답에, 가을의 마녀는 예상 밖인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고개를기울이며 의아한 기색을 남김 없이 드러냈다. 쉴새 없이 흔들리던 큼직한 꼬리는 멎어 위로 들려있었다.


"실리적이구나, 나의 아들아. 갑자기 무슨 이유로 변심한 것이냐?"


"…글쎄. 내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실력에 대한 자신보다는, 내 개인의 감정과 의심은 차치해놓고  새끼의 힘도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가을의 마녀는 내 대답과는 다른 내 감정을 읽었는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뺨에 얹은 손을 움직여  턱을 잡았다. 언뜻 음흉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 얼굴에서는 흉계 이상의 흥미가 감돌았다.

"재밌구나. 나의 아들아. 그렇다면 이 어미는 네 일을 방해하지 않으마. 너와 내가 결판을 내는 건 네가 해내야 할 일을 끝마친 이후로 하자꾸나."


빠져나가는 손길에, 내 파워아머에 스친 옷가지가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 거창한 옷차림과 마찬가지로 거창한 창과는 달리, 그녀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아닌 위험한 느낌을 줄곧 뿜어대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기색을 무시하며 겨우 고개를 돌리니, 병사가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상은 입었으나 거동할 수 있는 자, 다소 당황은 했으나 여전히 내 말을 듣고 광란하지 않을 자들.

그들이 한데 모여, 불안감을 공유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감도는 선연한 감정은 생존욕구였다. 나를 믿고 따라온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겁에 질려있었다.


그들의 이목이 한데 집중된 와중에, 나는 메이를 겨울의 신부에게 건네고서 그들을 마주보았다.


추레한 행색과 부상의 흔적. 긴 전투로 인해 제 애병을 잃어버린 흔적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들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이상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을 이를 바라고 있었다.

솔직히 그런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존재인 척 하는 것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을테지만.

나는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깃발을 찾아냈다.

그 깃발은 길었다. 충분히 길고, 피에 젖었는지 언뜻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제 아무리 멀리 있다로 하더라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만큼 눈에 띄어,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들었다. 들어올리는 깃대는 꽤 묵직했다.


들어올려지는 깃발. 그 끄트머리에 매달린 피에 젖은 백기. 한 때는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음이 분명한 그 깃발에, 병사들의 이목이 꽂혔다. 그들이  깃발을 보며 침을 삼키는 동안, 나는 말했다.

"필시 불안할 것이다. 절망하고, 상황이 이해가지 않아 당황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차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런 말은 할 수도 없고, 그런 말은 그저 기만일 뿐이니까. 그러니 내가 제안하는 건 오직 하나다."

높이 들어올린 깃발을 따라, 깃발이 출렁이더니 바람을 따라 잔잔히 흩날렸다. 그 깃발이 흩날리는 모양새는, 왠지 기묘한 고양감을 선사했다.

"나를 믿어라. 나를 따라라. 너희가 걱정하는 모든 것을 내가 쳐부수고, 너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내가 짊어지겠다. 그러니 모든 부감정을 내려놓고, 이 깃발만을 따라와라.그리한다면 너희는 살아남을  있으리라."


병사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그 깃발을 주시하는 동안, 나는 그 깃발을 어깨에 짊어지고서 전장을 가로질러 나아가기 시작했다.


곧, 내 뒤를 눈으로만 쫓던 병사들은 절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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