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8화 〉대륙 충돌 (198/274)



〈 198화 〉대륙 충돌

한 개인이 머무르기엔 너무 거대한 숙영지 곳곳에서는 불이 피어오른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지른 불이라면 금방 꺼져야 할테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고되게 움직인 발을 장화를 벗고 모닥불에 말리며 휴식하게 했고, 오히려 피어오르는 불을 제 벽난로에서 피어오르는 그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무수한 병사들이 발을 쉬게 하거나, 지친 몸에 알코올을 때려넣어 녹이는 동안, 나는 그 중심지에 위치한 야영지에 앉아있었다.  중심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행복해보였다.

긴 행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다지 절망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끔찍한 상황 직후이기 때문인지 다소 기뻐하는 듯한 기색마저도 보이고 있었다.

출발 당시의 비관적인 분위기는 피로 속에서 사라졌는지, 그들은 별 거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다를 떨며 장작을 구해와 모닥불에 집어넣는 이부터, 마차에서 식량을 덜어와 나누는 이들까지.


피로 속에서 잠을 취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나는 턱을 괴었다.

7천명이 넘는 인원이 숙영하기 위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우리의 캠프는 거대하고 눈에 띄었으며, 식사 준비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심지어 부상병을 수송하거나 하는 것도 꽤 어려웠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남아있는 마차가 꽤 있으며 보급품이  남아있는 덕이었다.

그 한적한 풍경에, 경계하는 하나도 없었으나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눈에 띄는 건… 근처를 돌아다니는 NM-21이 알아서 하겠지. 무난하게 이뤄지는  숙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한창 깃발을 만들고 있던 겨울의 신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왜 그러시나요?"

"첫 숙영이 걱정돼서요."

"그렇네요… 이정도 보급품이면…."

그녀는 말을 아낄 생각인지 그정도만 말하고는 도로 깃발에 집중력을 할애했다. 한 번에 여러가지를 집중하진 못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의외인 부분이었다.

그녀가 만드는 깃발은 피에 젖어있던 깃발과는 달리 깨끗한 천이었고, 깃발의 상징은 그녀의 손으로 직접 만들고 있었다. 깃발 자체도 꽤 긴 것이, 완성되면 들고 다닐  볼만할 것 같았다.

물끄러미 그녀가 만드는 깃발을 보다가, 깨어나지 못하는 메이를 번갈아 보면서 시간을 떼우고 있자니 간부들이 다가왔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대전사님."

"제가 물을 말입니다, 대공님."

"허허, 농담을 하시는  보니 드셨나 보군요."

대공과 기사단장 퍼시벌, 세네카, 살로메였다. 세네카는 여전히 팔이 부러졌는지 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지만 표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NM-21과 근위대장은…."

"캠프 주변 초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심이었다 NM-21의 색적 능력과 지치지 않는 몸은 초계엔 특히 특화되어 있었으니.


내가 납득하는 듯 보이니, 그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끌고 온 나무둥치나 바닥에 주저앉은 이들은  몸을 두드리거나 무심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풍경에서, 어쩐지 1회차 꿈을 보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대장으로 있던 용병단의 간부들과 모여앉아서 앞날에 대해서 얘기했던  기억이.

기억을 떠올리면서 모닥불을 낙인으로 들쑤시자, 그들은 모여앉은 채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기는 좀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가장 먼저 대답한 건 기사단장이었다.

"보급 상태는 어떻죠?"

"그건… 현지 조달을 하거나 사냥을 하는 등, 빠르게 추가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일주일도 가기 전에 식량이 동날 거라고 봅니다. 방법을 강구해야 하겠죠."

"그건 안 좋군요."


"의약품도 부족합니다. 현성씨와 가을의 마녀의 분투로 부상자 자체는 크게 줄었지만, 적지만은 않으니 말입니다."


세네카의 말이 끝나고,다음으로 살로메가 말을 받았다.

"대전사님 지시대로 부상자의 치료를 서두르고 있지만… 의약품이 충분하지 않으니 힘들어요. 부상병들의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고 생명에 지장은 없을테지만, 아직 제 힘으로 걷기엔 힘이 부족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 날 살아남은 이들이 생각보다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모닥불을 한창 쑤셔대던 도끼를 거두어 허리춤에 끼워넣으니, 기사단장은 품에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제대로 만들어진 양피지 지도와, 대충 휘갈긴 듯한 지도로  장이었다. 기사단장은 두 장의 지도를 나란히 펼쳐두었다.

"길은 얼마나 왔죠?"

"이 지도가 제대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측량이 애매한 면이 있어 명확히 판단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현재 지형으로 미루어 판단하건데 산왕국까지는 한참은 더 가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충 표시된 지도에 그려진 그림은 확실히 대강 만들어진 감이 없잖았다.

"아마 가는 길에 변방의 소국이나 영지, 부족 사회와 맞닥드리게 될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의향을 묻는 말에, 나는 턱을 쓸면서 고민했다.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보고 결정하죠."

"…으음, 알겠습니다. 대전사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니 말을삼가겠습니다."

명확한 고평가였으나, 괜히 기쁘진 않았다. 이제 이들이 나를 떠받드는 것에도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리더라면 줏대가 있어야 하니까. 기사단장이 지도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품에 집어넣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제 부하들을 돌보러 가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너무 깨어계시지 마시고 일찍 주무시길."

나머지도 그 말에 동의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서서 어디론가 흩어졌다. 세네카 정도만이 가장 오래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세네카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 멀어지는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자니, 겨울의 신부가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다 만들었어요."


"오, 어디 봅시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들어올린 깃발은 길게 늘어진 삼각형이었는데, 끄트머리가 무척 길어 제대로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면  모습이 꽤 그럴 듯할 것 같았다.

색이 붉은색이 베이스에, 검붉은색의 테두리를 갖고 있는데다 중심의 상징도 검은색의 도끼인 게 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간지는 났다.

선역다워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이건 무슨 깃발입니까?"


"이건 당신께서 '이전 세계'에서 쓰시던 깃발이었어요. 당신께서는  깃발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이끌었죠."

1회차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얘기인가. 턱을 쓸며 은근히 신경 쓰이던 부분을 물었다.


"눈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기억하고 만드셨습니까?"


"당신께서  깃발을, 이 문양을 좋아하셔서 당신의 갑주에도 새겨두셨어요. 자수로 옷에 넣는 경우도 있으셨죠. 제가 직접 당신의 갑주와 옷을 수선하고는 했으니… 기억하고 있답니다. 색은 당신께서 제게 종종 일러주시던 그대로 만들어봤어요."


실제와 얼마나 비슷할진 모르겠다며 겨울의 신부가 말을 흐리는데, 모양새가 꽤 그럴 듯한  보면 완벽히 일치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보였다.

"당신께서는 이 깃발을 정말 좋아하셨어요. 지금 다시 만들어낸 것도… 당신의 취향에 맞았으면 한답니다."

"예, 멋지네요. 들고 다닐 맛 나겠어요."

 칭찬에 겨울의 신부는 배시시 웃더니 깃대에  깃발을 매달고서 우리의 천막 바깥에 기대어 두었다. 밤하늘 위로 흩날리는 깃발의 모양새가 꽤 그럴 듯 했다.


겨울의 신부가 깃발을 내려놓고 내 옆에 다가와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의 차가운 체온이 내 드러난 팔뚝 위에서 느껴졌다.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나 추억도 많지만… 당신께서 얼마나 기억할지 모르니 겁이 나네요."

내 옆에 딱 붙어 앉은 그녀는 제 손가락으로 내 손목을 쓸었다. 쓸어내리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그녀의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자니 괜히 몹쓸 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얼마나 기억하는지 알 턱이 없었으니, 얼추 어디까지 설명해도 된다고 말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나마 된다면.


"첫 만남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겠죠. 제가 50대일  만난 게 아니라면요."


"아, 그거라면 걱정 없겠어요. 당신께서 정말 많이 어리실  만났으니까요."


"…얼마나 어릴 때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당신께서는 15살이라고 하셨어요."

…씨발 족히 10년도 전이잖아. 진짜 애잖아.

어쩌다 만났는지도 짐작할 수가 없어서 아가리를 닫으니, 그녀는 손을 고이 모으고서 말했다.


"당신께서는 웬디고라는 괴물과 싸우던 어떤 용병단의 단원이었어요. 소년이고 몸은 작고 무기도 보잘 것 없어서, 당신께서는 싸우다 그만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하셨어요. 여기저기 다치고 까져서 의식이 흐리던 당신을 주워서 치료하던 게 저였어요. 당신께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껴서. 저도 모르게 찾아내고 치료하고 있었어요."


나는 플레이어고 그녀는 NPC이기 때문일까. 짐작하기에 그래보였다. 그게 아니라고 뭐라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께서는 제 도움을 받아 회복하고, 새로운 무구와 철저한 준비로 겨우 쓰러트릴  있었죠. 저 역시당신의 싸움에 한 손 거들었으나, 미력한 도움만으로 충분하신지 당신께서는  괴물의 목을 떨어트렸답니다."


그거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15살의 내가 괴물을 잡다니. 진짜 어지간한 수준의 지원으로는 힘들었을텐데.

"그 뒤에 당신께서는 웬디고의 목을 들고 영지를 찾아가 보수를 수령하셨고, 그 보수로 새 용병들을 끌어모아 일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후로 그녀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예상할 수 있으나 끊어놓을만큼 흥미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뒤로 나는 내가 한결 같이 기술을 갈고 닦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온갖 모험에 말려들거나 살아남고자 하면서, 때로는 사람을 잃거나 얻거나 하면서 살아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기억이 동반되지 않기 때문인지 꽤나 듣기 흥미진진했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는 표가 났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나름 싸울 수 있는 것도 그게 계기인지도 모르고.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니, 그녀가 표정을 조금 굳히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그렇게 살아가시던 도중, 갑작스레 세계가 더럽혀져 간다고 말씀하셨어요. 직접 자신이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자신이 선택받은 이이니 뭐라도 해야한다고 그러셨죠.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당신을 말리려고 했지만…."


 들었겠지. 나는 플레이어니까. 이 세계를 지키는 역할은 나한테 있다고 믿었을테고,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으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당신께서는 패배하셨어요."


아, 씨발. 그럼 그렇지.

"팔도 잃고, 동료 대부분도 잃으셨지만… 봄의 순례자는당신의 특별함을 알아본 건지 당신을 대전사로 삼았어요."

꿈에서 내가  새끼의 대전사였다는 걸 보았을 때, 어떻게 그런 음침한 씹새끼의 대전사가 되었나 했었는데, 역시나 강제적이었던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쉬니, 겨울의 신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더듬었다.

"피곤하신가요?"


"아뇨, 그냥… 이전 세계는 좆같이 흘러갔구나 싶어서요."


정말 그랬다. 봄의 대전사라니. 비록  새끼를 위해서 단 한 번 싸웠다지만, 그 새끼는 좆같은 놈이었다. 두 번 이상 만나긴 좀 그런 놈. 턱을 괴며 내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녀가 느릿느릿 손을 뻗어  손을 꼭 쥐었다.


"…뭐하세요?"


그녀는 내 손을 꾹 쥐고는, 자기 손으로 살살 쓸면서 뭔가 애쓰는 듯 싶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귀엽긴 한데… 영문을 알  없었다. 내 질문에,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내게 향해왔다.

"당신께서는 어릴 때부터, 불안하실 때마다 제 손을 잡아 안정하고는 하셨어요. 제 손을  잡으면 불안한 게 좀 가신다고…제 미력한 도움마저 기쁨이 된다고 그래주셨죠. 혹시… 그때처럼 제가 당신이 기운을 차릴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 말과 그녀의 행동, 내 손을 꼭 쥐고 기운을 불어넣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자니 내가 하는 생각이 존나 하잘 것 없어보였다.


"고마워요. 위로해줄 부분은 좀 달랐지만."

"네?"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내 기운을 살피려는 것처럼 허둥지둥거렸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왠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손을 뻗어 머리에 손을 얹으니, 잔잔하게 차가운 체온이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슥슥 쓰다듬으니, 그녀는 그제야 허둥대던 것을 멈추고서 얌전해졌다.

"슬슬 쉽시다. 내일도 걸어야 해요."


그녀는 내 말에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놓고서,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들어올린 얼굴에 맺혀있는 표정은 어쩐지 불안해보였다.


"…당신의 옆에서 자도 될까요?"

그녀의 물음은 그 불안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아직 그녀를 믿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을 불안해하는 그녀의 모습은 왠지 무구해보였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녀는 그제야 표정을 펴고, 내 몸을 껴안아왔다. 잔잔하게 차가운 체온이 살갗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