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0화 〉대륙 충돌 (200/274)



〈 200화 〉대륙 충돌

"…그래서?"


조금 한적한, 늘어선 병상의 수치고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누워있는 병실. 메이는 내가 건넨 외투를 몸에 두르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흘렸다.

눈가에서 감도는 잔잔한 감정은 자신이 거의 일주일 가까이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일주일 동안 자신이 전력 외였다는 사실을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메이를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별 문제 없이 여기까지 왔지. 난민도  받아들여서 수가  불어나기도 하고, 불안한 면도 없잖긴 했는데… 여차저차 여기까진 왔어."

"…내가 되게 오래 잠들었나봐. 미안해."


축 쳐지는 메이의 모습은 내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책망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웃으며 손을 뻗으니, 메이는 그 손을 우물쭈물 하면서 바라보다가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보들보들한 뺨을 손으로 슥슥 쓸면서 어루어 만지니, 메이는 금방 미안함과 기분 좋음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헤헤 웃었다.


"그 높이에서 떨어졌으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네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좋아."


"…으, 고마워."


흠칫하며  말에 감동했는지 눈시울을 붉히던 메이는, 제 눈가를 옷소매로 슥슥 문질러 닦더니 내 손을 붙잡았다. 내 손 위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손의 체온이 뭔가 반가웠다.

"언니한테 얘기는 해봤어?"

"…어, 했지. 다 인정하던데. 1회차를 기억하고 있던 것도,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

"이유는?"


메이는 뜻 밖의 반전이라도 나올까 두려워 하는 모습이었으나, 메이의 예상처럼 심각한 일은 없었다.


"내가 1회차를 떠올리지 못하고, 겨울님을 완전히 떠올리지 못한다는  두려워서. 혹은 내가 그 1회차에서 봐왔던 사람이랑 다를까봐. 속앓이 하기 싫었나봐. 차라리 혹시 모른다거나… 떠올릴지도 모른다거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나봐."

메이는 내 대답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침울한 표정으로  손에 제 뺨을 부볐다. 말캉말캉하고 솜털 같은 것이 잔잔히 느껴지는 덜 여문 뺨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라도… 현성이가 나를 잊어버린 듯이 행동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겠지. 생각만 해도 코가 좀 시큰거려. 가슴도 욱신거리고."


상처 때문이 아닌가 싶었지만, 메이가 제 가슴을 짚으며 그 큼직한 빨통을 움직이는 걸 보자니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환자랑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니, 메이는 내 손에 몇 번 뺨을 더 부비다가 그 손바닥에 입맞췄다. 잩게, 여러번 입맞추는 행동에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근데, 여긴 어디야?"

그렇게 한창 입맞추던 메이가 뺨을 기댄 채로 물어왔다.

"산왕국."

"…여기가?"

메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나는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고개만 돌려도 알 수 있었다.

벽을 뚫고 나온 돌조각은 위협적으로 날카롭고 높이 솟아 천장을 꿰뚫어 있었다. 그 탓에 본래라면 더 많은 병상을 차지하고 있어야  환자들이 다른 건물로 옮겨져 있었다.


"전에 지나갈 때는 좀 멀쩡했던 거 같은데…."

"그랬지."

내 짧막한 동의에, 메이는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싸움의 마지막에서, 군주들의 아버지가 발악하면서 벌인 마법 때문에 이렇게 된 거 같더라고. 이제 깨어났으니 알게 되겠지만… 이렇게  곳이 엄청 많아."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책하는 메이는, 곧 눈물이라도 떨굴 듯 침울해보였다. 나는 그런 메이의 뺨을 살살 쓸면서 위로했다.


"괜찮아. 오히려… 내가 막았어야 했지. 내 실수고. 그러니 널 꼬집을 생각은 없어."

"으아야, 으, 꼬집을 생각 없다면서어!"

볼을 가볍게 꼬집으니, 메이는 뺨이 늘어나 툴툴대면서도 키득키득 웃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했던 눈가는 붉었지만, 메이는 울지 않고 배시시 웃었다.

그런 메이의 기분을 풀어주고서 손을 떼니, 메이는 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뭐 어떻게 할  달리 있나. 대답을 하려는데,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 마침 좋은 타이밍에 찾아왔군요.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지도를 수정해왔습니다. 어머니의 안부도 함께 말이죠."


그들은 산왕국의 귀족들이었다. 산왕국의 전사들 중에서도 지략이 좀 있다고 할 사람들은 이들 뿐이었으므로, 지도의 개량을 맡겨놨었다.


산에 사는 거친 민족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갈한 말투로 인사를 건넨 그들은 표지판 같은 것처럼 생긴 판자와 지도를  장 가지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끌고 온 판자가 멈추고, 그 귀족은 새로 수정해온 것이 분명할 지도를 펼쳐 그 판자 위에 덧붙였다.

"저희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자면, 대륙 전역에서 혼란이 퍼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파괴되었고, 영지나 소규모 마을도 존속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붙여놓은 지도를 바라보니, 기존 지도를 따라 그린  하지만 일부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는 게 명확히 보였다.


예를 들자면 산왕국 서쪽의 산맥의 일부가 지워지고 거기에 큰 구덩이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라던가.

지도를 붙인 귀족의 가죽 장갑을 두른 손이 지도 위를 짚어나갔다.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눈을 돌리니 보이는 것은 한 때는 해안가가 있었을 방향이었다.

"동대륙과 직접 접해있는 지역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해안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지형이 일괄적으로 변하고 그 자리를 따라 길게, 혹은 아주 거대하게 산맥이 자라났습니다. 최고 높이는 아직 측정하지 못해 정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 천산의 높이와 견줄 수도 있겠더군요."

천산은 이들이 수도로 삼은 아주 높은 산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맥의,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안되는 비경이라던이들의 말을 감안하면 상상 이상으로 높은  분명했다.

"그 산맥에서부터괴물이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도있더군요.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직접 보시면 아시겠죠. 허나  산맥에 접해있는 인간의 거주지, 사유지, 도시와국가는 예외 없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보면 괴물이나 그에 준하는 재앙이 있으리란 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귀족의 말에 턱을 짚었다. 산맥과 괴물. 아예 연관이 없다고 하기에는 내가 아는 게 없었다.


애초에 괴물의 습성 같은 건 거의 모르기도 하고.

"그 외에도, 괴물의 변이를 전해드릴 수 있을 거 같군요."

"변이?"

"예, 변이."


내가 되묻는 소리에 즉답한 귀족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정확히 무슨 변이?"


"칼날로는 죽지 않는다거나,불을 뿜는다거나, 관절이 가역 범위 이상으로 움직이며 실시간으로 변형을 하는 등… 보고되는 사례만 하더라도 수십가지입니다. 그야말로 괴물마다 다른 생김새를 갖는 것처럼요."


그건  묘한데. 서대륙의 괴물들은 얌전했던 걸 생각하면  그랬다.

"누가 억지로 변이시킨다고 보기엔 너무 빠르게, 다발적으로 변이하고 있어서 자연적인 작용이 아닌가 하고 저희 마법사들이 짐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수십가지나 된다면 한 새끼가 진을 치고 변이시키는 거라고 보기엔 너무 빠르고 다양했으니까.


게다가 효율성이랄 것도 안 보이는 게 자연적이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괴물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전선을 미루면서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일부 소국이나 지원을 받지 못한 영지는 이미 초토화된 모양이더군요."

거기에 대륙 전역에서 발생한다면야. 누군가의 소행일 가능성은 없겠지. 이 유감스러운 변화가 너무도 갑작스럽다고 하기에는, 짚이는 점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다.

동대륙의 괴물들. 그 중에서 네임드라고 할만한  그럴 듯한 몬스터들. 그 몬스터들이랑 얼추 양상이 비슷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지? 그런 괴물이 나온 적이 있었나?"

내 질문에 귀족은 처음으로 거친 민족답게 웃어보였다.


"아예 없진 않았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종종 그런 귀찮은 놈들이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희 산왕국의 전사들은  괴물들을 토벌해냈습니다. 이 대륙 어디를 가더라도 저희만큼 괴물을 잘 잡는 놈들은 없을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에, 나는 왜 산왕국이 비교적 멀쩡한지 짐작했다. 괴물과의 연전 경험이 이상한 괴물들과의 싸움에서도 꽤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었다.

 기이한 괴물들의 출몰이 동대륙과의 대륙 충돌이 계기인지, 아니면 굴레가 박살나기 시작하고 세상이 멸망해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썩 좋은 일이 아니라는  확신할  있었다.


헌데 굴레가 다 소모되면 어떻게 좆되는 거지? 세상이 불지옥이 되나?


턱을 쓸고 있으니 귀족이 지도와 판자를 주섬주섬 거두었다.

나는 그 거두어지는 지도로 눈을 돌려 그 모양새를 눈에 담으며 대충 궤적을 그렸다.

대충 대성당도 들리고, 자작령과 남작령을 통과하여 최남단 바다에서 산맥을 우회해 대륙을 건너가는 궤적을.

그 여행 경로를 떠올리니, 귀족들은 판자와 지도를 완전히 회수하고서 내게 인사를 하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멀어지는 가죽 장화 소리에서는 자부심 따위가 느껴지고 있었다.


새끼들, 속도 편하지.

한숨을 내쉬며 메이에게 고개를 돌리니, 메이는 내 눈에 제 눈을 마주치고는 해맑게 웃었다.

"일어날  있겠어?"

적어도 내가 말하기 전까진.

메이는  질문에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갈등했다. 메이의 갈등은 빠르게 끝났다. 메이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내게 팔을 내밀었다.

"아니… 못 일어날 거 같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현성이가 업어줘야 할 거 같아."

누가 봐도 구라였지만, 나는 메이를 업어들었다.

*

메이의 병실이 있던 성채 2층에서 나와, 목조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니 산왕국 전사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푹 쉬고 있는 난민들이 보였다.


그들은 시선 따위는 이미 개의치 않기로 했는지 모닥불을 짧막하게 피우고는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는 얼핏 듣기에도 다양했다. 크게는 세상이  꼬라지지만 우리는 깃발을 따라갈  있어 다행이라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양을 얼마나 오래 풀어놓는 것이 가장 양의 육질에 큰 영향을 주는가 하는 사소한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이도, 성희롱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누는 이도, 계단을 내려와 그들을 가로지르기 시작하는 내가 보이자마자 안색을 밝히며 손을 흔들었다.

심지어는 내 칭호인 해방자를 연호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의 반응을 대충 넘기며 성채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로 향하니, 메이가  목에 팔을 두른 채로 당황한 음성을 흘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해서, 웃어 넘기니 메이는 뚱해졌는지 내 뺨을 꾹꾹 눌러대면서 장난을 쳤다.


나는 메이의 장난을 받으면서 난민들을 가로질렀는데, 그 수는 성채의 입구가 보이는 곳까지 쭉 뻗어있었다. 족히  수만 하더라도 천명에 가까웠다.

그 천 명에서 여자와 훈련 받지 않은 농민, 어린아이의 수를 감안하면 전력으로   있는 이는 10분의 1도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식량 사정에도 그다지 보태지 못할 것은 자명했고.

산왕국 측에서 뜯어낸 보급품이 좀 있다지만, 그걸로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다. 비관적인 생각을 읽었는지 메이가 내 목덜미에 입맞추고, 난  촉감을 즐기며 성채 밖으로 나섰다.


성채 밖에 자리하고 있는 건 숙영지였다. 군데군데에서펼쳐진 천막과 크게 피어오른 모닥불이, 그 모닥불의 불빛 틈으로 보이는 병사들의 얼굴이 낙관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큼직한 숙영지의 한 켠, 큼직한 천막으로 향하면서 병사들은 나와 메이를 보았다.


병사들은 난민들과는 다르게 메이 역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던 메이는 몸을 꿈틀꿈틀 하더니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나, 나 부끄러워져서… 내릴래. 내가 걸을게."

언젠 못 걷겠다면서. 피식 웃으며 메이를 내려놓자, 메이는  손을 붙잡아 왔다.

메이의 손을 붙잡고 천막으로 향하니, 병사들은 손수 입구를 가리고 있던 천을 거두어 나와 메이를 안으로 들였다.


들어선 천막 내부에서는, 간부라고 할만한 이들 전부가 나와 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 기사단장이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오셨군요.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의 바로 옆에 자리한 테이블 위에는 지도가 있었고, 그 지도에는 이런저런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지도를 보고, 다른 이들을 슥 훑어보고서 씩 웃었다.

"시작합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