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대륙 충돌
"어떻게 하실지는 정하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대비하지 못한 질문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펼쳐놓은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지도에 새겨진 표식들은, 내가 아까 산왕국 귀족들에게 들었던 정보의 대략적인 버전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느 산길이 끊겼고, 어느 길은 지형이 바뀌어 지나가기 힘들고, 어디는 괴물이 다량 출몰한다던가. 그런 정보들.
길을 떠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길에 대한 정보라고 누가 그랬던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공감할 수 있는 일이라, 나는 그 지도를 보면서 구체적인 행로를 떠올려 보았다.
물론 실제로 조사가 되지 않은 부분들도 있는 만큼 쉬운 여정이 되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기사단장을 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는 지도로 다시 시선을 끌어내렸다. 지도에 새겨진 기호 중 대부분은 산왕국과 공화국, 장검 연맹과 공국 방향으로 몰려있었다.
대성당이 있을 방향과 제국령이었던 부분은 대부분 조사가 이뤄지기는 커녕 인근으로 접근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원인은 직접 알아보겠지만, 원래 경로로 지나가려고 하더라도 꽤 애로사항이 꽃필 것 같았다.
"우선 여기서 남서로 이동합니다."
내 손가락이 지도를 짚어가며 움직이자, 간부들의 시선이 내 손가락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을 대성당을 찾고… 만약 없을 경우엔 그 잔해라도 찾아봅시다."
"그렇군요. 저희 중 대성당 측 인원도 꽤 있으니…."
"그것도 있지만, 대성당에서 키우는 거대 비행 가오리를 쓰면 어느 정도 기동력과 정찰인력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탑승감이 거지 같긴 하지만…."
기사단장은 그 비행 가오리를 보진 못했는지 의아한 눈치였으나, 메이와 겨울의 신부는 눈치챘는지 납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엔 대성당에서 보급품을 얻어내서 남하합니다. 다음 목적지는 자작령입니다. 자작령은 해안가에서 거리가 좀 있는 편이고, 숲이 우거져 방어에도 용이해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흐렌 자작의 부하들도 유능한 편이니까요."
"흐음, 그렇군요."
기사단장은 그들을 본 적이 없으니 납득이 가지 않는 눈치였으나, 내게 이견을 댈 생각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내 의견을 신뢰하는지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남작령을 거쳐서 더욱 남하하여 대륙이 끝나는 지점까지 갑니다. 저희 배가… 남아있을진 모르겠으나 거기서 바다를 통해 산맥을 우회해 동대륙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내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이제는 간부들이 그 의견에 대한 제 추가사항을 덧붙일 차례였다.
한참 제 턱을 쓸며 이야기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대공이 말했다.
"허나 만약 대성당이 완전히 파괴되어 목표하던 것 모두 달성하지 못하실 경우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그 말에 근위대장이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짚이는 부분이 있는 듯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가하니, 근위대장은 불편한 낯으로 말했다.
"전하, 보급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아님 말고'라는 느낌으로 그저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 중간에 길이 얼마나 바뀌었을지도 모르며, 그렇게 지형이 격변했을 경우에는 추가적인 보급품을 구하거나 중간 보급을 해야할 겁니다. 당장에 식량조차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근위대장의 말대로, 식량은 그리 충분하지 않았다.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난민들이 없다면 식량은 소모는 당연히 줄겠지만, 그것도 영원하진 않았다. 난민의 수는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은 병사였으니, 난민이 빠진들 식량 소모에 가시적으로 큰 차이가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현성씨… 아니, 주현성 전하. 저 역시 이정도 병력의 식량을 구하려거든 단순히 사냥으로 충당할 수 없다고 봅니다. 숲과 숲의 모든 짐승을 잡은들 조금 더 버티는 정도에 불과할 겁니다. 게다가…."
세네카가 제 팔을 흘긋 보더니 말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괴물의 수는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산맥 너머에서도 그런데, 이 너머의 숲에서 괴물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괴물로 인해 짐승이 멸절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니, 세네카는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문제였다. 이동식 농장을 차릴 수도 없으며, 이 인원 전부를 숲에 풀어놓아 먹을 걸 구한다고 한다면 사고가 생길 가능성도무척이나 높은데다 효율도 떨어질 게 분명했다.
착잡하게 턱을 쓸어내리면서 쓸데 없는 생각을 했다.
자주 수급할 수 있으면서도 크기가 거대하고, 죽여도 우리에게 그 어떤 피해를 주거나 하지 않으면서 편리하게 고기를 수급할 수 있는 존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전자 조작 돼지 같은 거 기르는 게 이런 마음인가 생각하면서 턱을 쓸자니, 퍼뜩 내 뇌리를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 그런 존재가 있었다.
비록 잡는 것 자체에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것들이.
심지어 무한히 솟아나는데다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굳이 찾으러 다니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내 표정을 보고 간부들이 오, 하는 소리를 흘렸다.
"마침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들은 눈을 빛내며 내게 일제히 시선을 보냈고, 나는 그들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씩 웃었다.
"괴물 고기는 어떻습니까?"
기립박수가 나올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간부들은 당황한 표정과 허탈한 표정을 양립시키며 고개를 가로젓거나 탄식을 흘렸다.
"…물론 혐오감은 들겠죠. 인간을 먹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못 먹고 아사하느니 뭐라도 먹는 게 낫습니다. 스튜로 끓이면 혐오감도덜할테고, 정 뭐하면 가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괜찮지 않습니까?"
내 적극적인 의견 피력에도 그들은 참담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판타지 주민과 현대인의 차이인가.
먹고 사는 문제가 된다면 곤충으로 고형 음식을 만들거나하는 현대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사고 방식이라 착잡해하니, 기사단장이 말했다.
"…가끔 대전사님께서 야만인 출신이라는 걸 잊고는 합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그것이… 의견 자체는 파격적이나, 저희가 그 의견을 떠올리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거부감이 아니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니, 기사단장이 난처하게 웃었다.
"괴물의 고기에는 독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먹을 수 없지요. 예외 없이 모든 괴물이 그런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저희 동대륙인에게는 상식에 가깝습니다. 괴물의 고기를 먹고 살아남은 이는 없습니다."
아… 그렇구만. 뜻밖의 지식을 얻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니, 기사단장이 허허 웃더니 내게 인자한 미소를 흘렸다. 그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간부가 그럴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보내오고있었다. 토니 스타크는 표정이 없으니 그러려니 하는데.
"그럼 다른 방법을…."
알아보려고 하는데, 문득 누군가 손을 들어올렸다. 은근히긴 손가락은 상처랄 게 없이 깔끔하고, 쭉 뻗은 것이 모양새가 아름다웠다.
그렇게 손을 들어올린 존재는 겨울의 신부였다. 그녀는 이런 회의를 할 때 단 한 번도 제 의견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는데. 그녀는 웬일인지 의견을 피력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좌중의 이목이 쏠렸다. 그녀를 오래 보아온 이들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기색을 읽은 건지, 아닌 건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독성만 없어지면 먹는데 문제는 없는 건가요?"
무언가를 숙고하는지 천천히 나오는 말.
세네카는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점이 놀라운지 당황한 듯 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아차하더니 대답했다.
"예, 예… 맞습니다. 독성만 없으면… 아마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에 겨울의 신부는 방긋 웃었다. 싱그러운 미소였다.
"그거라면 제가 정화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께서 허하신다면… 이겠지만요."
약간의 심려가 섞인 표정이 나를 향해왔다. 내 목소리로 내 방향을 추측한 것이리라.
"연금술입니까?"
"네에, 그 어떤 생물도 그 자신이 자신을 파괴하는 독을 혈관과 근육에 돌게하진 않으니, 그 독성은 죽인 이후에 오염되거나… 부패가진행되면서 나오는 것이겠죠. 그럼 약간의 시약과 기름으로 부패를 되돌리거나, 오염을 치료하면 될 거예요."
내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는 그녀는 다소 의욕이 넘쳐보였고, 우리 중 유일하게 연금술적 지식이 있는 살로메는 제 혀를 낼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어요. 실험적인 방식이나, 이론적으로는 가능성이 있어보여요. 추측이 맞다는 전제이니 조심하셔야 할테지만…."
이게 된다고?
내가 제반 지식이 전혀 없으니 판가름 할 수도 없는 가운데, 유일한 전문가가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문외한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물쭈물 하는 겨울의 신부를 보며 망설이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 망설이는 와중에, 겨울의 신부가 그 정보를 단순히 증거가 없어 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찌 말해야할지, 섣불리 말하면 안될 정보가 있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으로 보았다.
설마 1회차 관련인가? 그때에도 이런 짓을 했다고 했었으니, 그때에도 식량난이 있었다는 것 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간단했다.
"좋네요, 그거. 추진합시다."
겨울의 신부가 내 말에 안도하고, 간부들이 어쩔 수 없다며 동의하고 나서, 난 살로메를 바라보았다.
"살로메씨는 겨울님을 도와서 시약을 만들어주시고. 토니."
"왜 그러나."
"가서 괴물 시체 좀 가져와봐. 아마 널려있을 거야."
NM-21은 내 말에 별 대답도 않고 텐트 밖으로 나섰다. 나는 그 모습을 눈으로 쫓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간단히 실험해보고, 된다 싶으면 이걸 정식으로 추진하는 걸로 합시다. 피험체는 접니다."
*
시약 준비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빠르게 만들어졌다.
재료도 간단한편이었다. 동대륙과 서대륙 모두 자생하는 약초에, 많은 양이 있는 건 아니지만 구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식물성 기름과 술, 그 모두를 모아 증류 과정만 거치면 되는 간단한 시약이었다.
괴물 자체도 산왕국에서 괴물 시체를 쓰질 않으니 남아있었고, NM-21은 적당한 크기의 멧돼지 비슷한 괴물을 주워올 수 있었다.
시식할 새끼는 나. 유사시에 쳐먹을 초재생물약도 있다. 모든 준비가 끝난 가운데, 썰려진 괴물 고기와 모닥불, 프라이팬이 내게 배달되었다.
보랏빛을 띄는 큼직한 고기는, 연골이 거의 붙어있지 않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이뤄져있는지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 질긴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설령 독을 덜어내도 씹기 힘들 것 같을 정도로.
나는 그 썰어낸 고기를 향해 시약을 들이부었다. 정확히 겨울의 신부가 정량이라며 건넸던 양이었다.
보랏빛 고기 위로 흐르는 보랏빛 시약. 어떻게 보라색이 되었는지 모를 시약이 타고 흐르고, 밑의 접시에 고인 시약을 고기가 들이마시는 것처럼 보랏빛 고기에 시약이 스며들었다.
뭔가 가시적인 변화는 없었다. 색이나 형태 모두, 시약을 뿌리기 전과 그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냄새가 지독하지도 않았다. 들어간 재료를 생각하면 꽤 그럴 것 같았는데.
많이도 아니고 소주잔 한 잔 분량만큼 뿌려진 시약에 고기를 뒤집어 가며 적시다가 프라이팬으로 옮겼다.
프라이팬에 살짝 기름을 두르고, 자취하면서 쳐먹었던 것을 응용하여 괴물 고기를 굽는다. 지글거리며 기름을 튀겨대는 고기는, 시약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처럼 그 어떤 시약도 프라이팬에 뿌리지 않았다.
구워지는 냄새도 그다지 지독하지 않았다. 그냥 고기 냄새였다.
그렇게 무난하게 구워지고, 고기가 갑자기 뛰어오르거나 공격해오지 않아 실망할 무렵, 나는 구워진 고기를 프라이팬째로 모닥불에서 내려 나무 접시 위에 덜었다. 시약이 뿌려졌던 그 접시였다.
지글지글하게 기름을 보랏빛 육질 위에서 흐르게 하는 그 고기는, 시각적으로는 멀리하고 싶으나 청각적, 후각적으로는 내 군침을 흐르게 만들었다.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고기를 집어들어 아가리에 넣었다.
"…으음."
질겅질겅 거리며 씹는데, 근육질 괴물새끼 고기라서 좀 질기고 딱딱한 걸 빼면 평범한 고기 같은 맛이었다.
딱히 문제랄 것도 안 느껴지고, 내 몸에 뭔가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진 않았다. 먹으면 뒈진다고 그랬던 거같은데.
1회차 때 진짜 이런 걸 쳐먹었나?
"…이거 독성이 어떻게 작용한다고요?"
내 모습을 빤히 구경하던 기사단장에게 말을 건네니, 그는 곤란한 낯으로 대답했다.
"전신 마비와 토혈, 심장마비로 이어집니다. 효과가 언제 나타나는지는 저도 잘…."
하긴, 이런 걸 쳐먹을 새끼가 없으니 그런 걸 어찌 알겠어. 마비나 토혈, 심장마비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아 고기를 한참 질겅이니, 간부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화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 겠죠."
우물거리며 대답하니 기사단장이 염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바라보았다.
한참 그렇게 씹던 나는 불현듯 눈을 크게 뜨며 헉, 하는 소리를 흘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뭔가 문제라도…!"
"빨리 재생약을…!"
"대공, 마법을 써서…!"
내 모습에 당황하는 이들이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내게 조치를 취하려 하며 다가올 때, 나는 고기를 씹어삼키며 말했다.
"술 땡겨요."
"…예?"
기사단장의 멍청한 표정과 근위대장의 헛웃음에, 토니 스타크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뒤따랐다. 살로메는 꺼낸 약을 쥐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고.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로, 세네카 아, 하는 탄식을 흘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고기를 씹어삼키고 씩 웃었다.
"별 문제가 생기는 거 같진 않습니다. 내일까진 봐야겠지만, 내일까지 보고 아무 이상 없으면 시약이나 잔뜩 만들고 출발합시다. 단장님, 근위대장님. 두 분 모두 출정 준비, 수고 좀 해주세요."
그들은 어이 없어 웃는 와중에도 내 명령을 듣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일까지, 나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안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