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대륙 충돌
산왕국에서 시약을 완성한지 이틀, 예정보다하루 늦춰지긴 했지만, 우리는 별 문제 없이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산왕국에서 제공해주기로 한 보급품과 피난민들의 준비, 병사들의 무기나 물자의 재보급을 맞춘 후였으니 하루 더 걸린 건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동하면서 괴물들을 사냥했다. 동대륙과 서대륙이 충돌하여 산맥들이 생겨난 이후에 다발하는 괴물들은 이 행렬을 귀신 같이 찾아냈다.
그렇게 새로운 먹이를 찾아낸 괴물들이 득달 같이 달려들고, 나와 동료들, 병사들 등 전투가 가능한 이들은 괴물들에게 적극적으로 맞섰다.
내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덕분인지 괴물들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처리된 괴물들을 도축하고, 시약에 재우며 이동하다가 야영할 때가 되면 숙영지를 펼치고서 괴물 고기를 조리했다.
처음엔 조리된 괴물 고기에 부담감이나 거부감을 가지던 사람들조차 받아낸 식량 물자가 동나면 곤란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지 묵묵히 괴물 고기 스튜를 비웠다.
빠르게 익숙해진 까닭이 생각보다 먹을만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괴물 고기라는 본질을 잊기 좋은 스튜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행렬이 그렇게 원만하게 진행하여 대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이렇다할 트러블이 없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멀찍이서 보이기 시작하는 대성당의 광경에 일부 병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으음, 생각했던 것 이상의 손상이군요."
기사단장이 얹는 말은 그답지 않게 다소 당황하는 감정이 섞여있었는데, 그 말에 과한 반응이라며 나무라는 이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높게 솟은 첨탑이나 외벽, 거대한 부지가 있었던 것이 거짓말인 양 대성당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폐허였다.
무너진 건물들이 겹쳐서 쌓여져 있고, 쌓여져 있는 건물들 사이로 부숴진 지면이 치솟아 흉하게 한 때는 자랑이었을 탑을 산산조각으로 분해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병사들 중 대성당 출신인 병사들이 눈에 띄게 불안해하거나 겁에 질렸다.
제 고향이자 거점이라고 할 수 있을 장소가 이렇게 처참하게 파괴된 현장을 본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 번에 부숴진 걸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가까이 가봐야 알겠지만…."
살로메가 질문하고, 내가 대답하면서 다가선다. 행렬은 나를 뒤따르면서 그 처참한 폐허를 바라봤다.
지진으로 한 번에 파괴된 것인지, 괴물의 영향으로 파괴된 것인지 판가름하기 힘들었다.
파괴의 흔적은 너무도 어지러웠고, 그 폐허에서는 드물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인간은 아닐 터였다.
"…정지."
확실히 하기 위해 다가가니 보이는 형체의 수가 늘어난다. 서성이는 흔적이나 크기로 보아하니 인간은 결코 아니었다.
이 행렬을 가지고 그대로 들이받기엔 수도 수거니와 지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차라리 소수정예로 다가서는 게 좋아보였고, 저런 난전을 강요하는 지형에서 수월하게 싸울 수 있는 존재는 한정되어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깃발을 메이에게 건넸다. 메이는 별 질문조차 없이 깃발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와."
이제는 걱정도 안 하네. 픽 웃으며 주먹을 풀고, 등에 짊어진 거검을 끌어내리려다 손을 내리고는폐허를 향해서 달려나갔다.
몸을 기울이고, 지면을 걷어차며 거리를 좁힌다. 내가 나아가는 속도에 맞추어 세상이 울부짖는 듯 생각될 정도로, 내 몸을 멈추어 서려는 공기가 두들겨댔다.
갈 수록 가까워지는 대성당의 잔해는 지진만으로 파괴된 건 분명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언뜻 보이는 인위적인 파괴 흔적에 눈쌀을 찌푸리고 빠르게 접근했다.
그르르―!
퍼어어엉!
가장 먼저 죽어나간 건 사족 보행을 하는 개새끼였다. 나는 그 집채만한 개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스트레이트라고도 할 수 없을 마구잡이 주먹질에 늑대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그 소음과 찐덕하게 날아가는 살점. 그에 괴물들이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달려온다. 멈춰서면서 다리를 휘두르고, 불굴의 정신을 발동하여 후면에서 달려드는 괴물의 목덜미를 잡아채 내던졌다.
내 동작 하나마다 죽어나가는 괴물들의 모습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계속했던 행군의 스트레스가 다소 풀리는 듯 했다.
괴물의 형태는거의 다 짐승 형태였다. 기괴하게 생겨먹은 근래의 괴물들과는 다른 정상적인 형태.
어쩌면 대륙 충돌 이전의 괴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마구잡이로 괴물을 쳐죽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깨갱, 깨깽!
집어던지는 제 동료의 몸뚱이에 쳐맞아 다리를 절면서 도망가는 큼직한 늑대와 그보다는 살짝 작을 늑대들.
그 괴물들이 도망치는 방향은 행렬의 반대였으나, 뛰쳐나가 전부 죽인다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후환을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크라우칭 스타트에 가깝게 자세를 숙이는데, 문득 폐허 위 잔해가 들썩거렸다.
습격인가? 숙였던 자세를 기울이려고 하는 때에, 갑자기 그 잔해가 들썩이던 그대로 튕겨지면서 그 위로 돌로 된 해치가 벌컥 열렸다.
"…어?"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익숙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 일견 화려하지만 경건해보이는 로브를 두른 존재는, 성녀 에일렌이었다.
에일렌과 눈이 마주치고, 내가 몸을 숙인 그대로 다시 자세를 되돌릴 무렵, 그 붉은 머리의 성녀는 자신이 튀어나온 해치 아래를 향해 외쳤다.
"해방자님이다! 의인께서 돌아오셨다!"
그렇게 외치는 소리에 곧장 해치 아래가 시끌거리는 소리로 가득찼다. 열명? 아니면 스무명 정도 되는 걸까? 저 아래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겠지만 북적대는 소리로 보아하니 꽤 많은 사람들이 있는 듯 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괴물들이 도망치는 궤적을 눈으로 쫓았다. 도망치는 건 고작 5마리 가량. 그렇게 많은 수도 아니고, 그렇게 썩 대단한 괴물들도 아니었다.
에이, 씨발. 뭐 어때. 어차피 몇 마리인데. 주먹을 풀고서 파워아머에 묻은 살점 조각을 손을 털어내는 것으로 흘려내고 있자니, 해치를크게 열어젖히고 성녀와 사제들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나를 봐서 정말 반가운지, 눈물까지 흘려대고 있었다.
*
"…이런 시설이 있었군요."
"숨기려고 한 건 아니지만요… 저희도정말 오랜만에 쓰는 것이라…."
변명하는 성녀를 따라 걸어들어오니, 확실히 대성당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족히 천년 가깝게 존속한 종교 조직은 그냥 폼이 아닌 모양이었다.
넓게 트여있는 공간. 거주구로 쓰던, 피난구로 쓰던상관 없을 법한 거대한 크기는 마치 소설 속 지하 도시 같은 걸 떠올리게 했다.
실제 도시 크기는 아닐테지만, 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보아 수천명은 가벼이 들어올 수 있을 법 했고, 실제로도 수천명을 가볍게 수용하고 있었다.
안에 질서 있게 들어와 자리를 잡은 난민들의 얼떨떨한 표정을 눈에 담으면서, 나는 성녀를 따라 걸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신다면…."
"지진 이후에요."
"으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런지…."
곤란해하는 기색으로 성녀가 시작한 이야기는 그다지 예상을 벗어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짚어낸 것이 정확하다며 동의해주는 것에 가까웠다.
지진이 일어나고, 대성당은 크게 무너졌다. 구조적 약점 때문은 아니고, 바깥에서도 보았던 돌출된 지형 때문인 게 분명했다.
그렇게 무너지는 대성당으로 인해 사제 몇이 다치고 죽었으나, 그렇게 인명 피해가 막대하진 않았다.
천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성당이 완전히 반파되기 전에 교단은 예전 성인이 추진하고 만들어냈던 쉘터로 몸을 숨겼다. 이들은 여기를 요람이라고 불렀으나, 요람처럼 편하고 안락한 공간은 아니었다.
요람에 들어선 대성당 측이 당황하는 동안, 바깥에서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은 대성당을 완전히 파괴했다.
무너지는 건물 파편과 파괴되는 소음, 괴물의 신음이나 울음소리 따위가 어지러이 울려퍼지고, 대성당의 사제들은 평정을 가까스로 다스리며 요람에서 구조를 기다렸다고 했다.
내 예상대로 지진으로 완파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요람에서… 뒤집을 방법을 찾기 위해카타콤에 사람을 보내는 등 노력하고 있었으나 가망이 없었어요. 헌데 의인께서 참으로 적절한 때에 나타나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카타콤?
그녀가 늘어놓는 말에서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으면서 의아해지는 단어가 있어, 나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그녀를 보았다.
"카타콤이요?"
"예? 아, 예. 모르시겠군요. 본래 외인이신 걸 종종 잊고는 하네요. 선대 성인들의 유해와 함께 일전에 말했던 강력한 성유물을 잠재워둔 장소예요."
오, 그때 그거 말인가. 성유물 기둥 앞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것도 회수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잘됐네요. 그것만 회수해서 바로 뜹시다. 여긴 글렀으니 이제…."
"그게… 그러지는 못할 거 같아요."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날카로운 눈매의 성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한층 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안될 거 뭐 있대. 교리 때문인가?
그녀는 열려있는 헬멧 사이로 보이는 내 표정에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아직… 카타콤에서 성유물을 회수하지 못했어요. 애석하게도…."
"예? 그, 여러분들 소유가 아닙니까? 아니면 누가 훔쳐가기라도…."
"원래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네요. 일단 보시면 아실 겁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쉬는 에일렌 성녀는, 잠시 주변을 훑어보더니 나를 이끌었다.
그녀가이끄는대로 걸으면서, 무수한 사제들과 난민들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나아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장식되고 화려했던 기둥이나 석벽과는 달리 칙칙하고 반듯하기만 한 구조의 복도가 나왔다.
그 복도는 점차 내려가는 형태로 이뤄져 있었는데, 나는 그 길을 내려가며 연신 한숨을 내쉬는 성녀를 보고서는 의뭉스럽기만 했다.
지진 때문에 묻혔나?
그런 거라면 내가 제격이긴 한데, 굳이 다른 곳으로 데려가서 말하려는 이유가 뭐지?
이유조차 듣지 못한 채 걷다보니, 성녀가 갑작스럽게말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건 아무것도 몰라요. 어떤 일인 건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하지만 이거 하나만 확신할 수 있어요. 카타콤 내부에 뭔가 있고, 그 내부에 있는 것이 성유물 회수를 위해 보냈던 성전사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요."
음?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었다.
"그렇게 회수대를 두 번, 구조대를 한 번 보냈지만…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죠. 카타콤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턱은 없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안에 뭔가 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고, 도착한 카타콤의 입구는 열려있었다. 바로 옆에 지키고 선 성전사들의 긴장된 표정으로 보건데, 원래 열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카타콤 입구의 안은, 무척이나 어둡고 칙칙했다. 내 뒤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간부들 역시 그 내부를 흘긋 보고서는 각양각색의 불길함을 드러냈다.
"저거… 어두운 건 원래 그럽니까?"
그 카타콤 내부는 어두운 걸 넘어, 어쩐지 불온한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마치 던전의 입구라도 되는 것처럼, 안에서부터 짙은 살기 엇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기분 탓인 감각이면 좋겠지만, 이 세계에 떨어지고서 그런 감각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는 걸 두고 봤을 때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해보였다.
"아뇨, 원래 카타콤 내부는 성인들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는 장소. 원래는 아주 밝은 광원이 함께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존나 어둡네.
안에서 사는 존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어둠을 더 좋아한다는 건 확실했다.
수상했다.
그냥 놔두기에는 과할 정도로.
무슨 일인이, 안에 뭐가 있는 건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뭔 일이 일어나고 나서 처리하는 건 사양인데다 두번 다시 뭔가의 음모에 당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대륙 충돌 후 다발하는 괴물들을 보건데, 안에 뭔가 흉측한 괴물 같은 게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서대륙에서는 괴물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정은 빠르게이뤄졌다.
"제가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아… 의인이시여…."
"대신 저희 사람들이랑 난민들, 병사들을 잘 부탁합니다."
"예, 물론이죠. 주께 맹세코 그러겠습니다."
다소 격양된 그녀의 대답에도, 나는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오묘한 시선 같은 기척에 눈을 뗄수가 없었다. 눈을 떼는 순간, 어둠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