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대륙 충돌
"…후우."
카타콤에서 걸어나오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미가 죽고 나니 기괴한 인간형 괴물들은 전부 우리를 보자마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기 바빴으니, 메이가 원거리에서 마법을 쏴갈기는 정도면 충분했다.
거미를 잡는데 본인이 한 게 없으니 뭐라도 하게 해달라는 메이의 적극적인 요청에 따른 일이었지만, 사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긴 했었다.
죽어서 널부러진 소사체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니, 금방 눈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 카타콤의 입구였다.
"…아, 오셨군요. 의인이시여."
카타콤의 입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붉은 머리의 성녀가 걸어나오는나와 메이를 보더니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뒤에는 토니가 옆구리에 성유물을 끼운 채 그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토니도 빠르게 빠져나갔는지 몸에 흠집 하나 없었다. 인간형 괴물놈들도 산성이 있어서 걱정됐는데.
"무사해 보이는군. 다행일세."
토니도 내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안도하는 듯 억지로 한숨소리를 내길래, 나는 픽 웃으며 대충 손을 흔들었다. 헬멧이 내 의지에 따라 전면부를 열었다.
"산을 좀 뒤집어 쓰긴 했어. 내가 아니면 크게 다치거나 죽었겠지."
메이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토니는 내 멀쩡해 보이는 모습과 메이를 번갈아서 보더니 말했다.
"다친 곳은 없어보이네만."
"갑주가 내 신성으로 자동 수복되니까 그렇지."
"아, 그렇군."
토니도 납득하는 눈치길래, 인사를 건네놓고 뻘쭘하게 서있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는 성유물에 손을 뻗다가 거두고, 어색한 미소를 내게 향해왔다.
"토니, 성유물 드려."
"자네가 쓰는 게 맞다고 보긴 하지만… 알겠네."
토니가 떨떠름하게 건넨 황금 잔을 받아든 성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생긋 웃었다. 속물적인 미소였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메이가 슬쩍 내 뒤에 붙고, 나는 그런 메이의 머리를 쓸어주면서 말했다.
"그럼 그것만 챙기면 갈 준비는 다 된 겁니까?"
"예, 그렇지요. 사람들을 모아올까요?"
말은 다 되었다고는 하지만, 난민들이 짐 챙기고 사제들도 짐 챙기고 하면 조금 더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를 떠나보내고는, 떨떠름한 눈치의 토니를 흘긋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아무래도 불편하다네. 날 만들어낸 이들도 주를 섬기는 신이었으니… 조금 상하관계를 느낀달지."
어쩌라고. 픽 웃으니 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
그렇게 성유물과 약간의 보급품, 교단에 필요한 자잘한 종교적 정치적 도구를 챙긴 후에야 행렬은 다시 출발했다.
내가 든 깃발의 뒤로 길게 이어지는 행렬은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띄는지 종종 괴물이 습격해왔다.
다행히 이 행렬엔 병사의 비율이 꽤 높은 편이고, 나를 비롯한 전투력이 뛰어난 간부들이 많은 탓에 피해가 나오진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떠 괴물을 식량원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부 병사들은 괴물이 나오면 조금 의욕이 오르는 경향을 띄었다.
물론 그 의욕 상승에 식량을 얻어내는 것 역시 있을테지만, 사제가 생겼다는 점에서 더욱이 그런 걸 부추기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고 겨울의 신부가 말했다. 나는 깃발을 어깨에 걸친 채로 생각했다.
확실히, 사제가 생기니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독특하다고 해야할까.
경건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도피였으나, 그 도피에 종교인들이 추가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 도피행이 어떤 거룩하고도 종교적인 걸음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잠깐의 휴식을 갖기 위해 멈춰설 때마다 사제들이 모여들어기도를 하거나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니, 그 독특한 분위기는 더욱이 가속되었다.
나쁜 것도 아니니 가로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산왕국 너머의 무신자들이 창조신으로 종교를 갈아타는 건 진풍경이었다.
어쩌면 고대의 도시에 도착할 때 쯤이면 이미 이 행렬이 모세와 피난민들이 되어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메이는 종교적인 부분에서 있어서는 공감해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하나의 문화가 생길지 모른다는 부분에서는 동의했다.
"…과연 끝까지 전원이 생존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들을라."
"괜찮아, 거리 좀 있어."
메이는 괜히 뒤를 살피면서 사람들이 내 말을 들었는지 살피는 기색이었으나,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안심하고는 내 바로 옆에 붙었다.
나는 그렇게 붙어오는 메이를 보면서 카타콤 내부에서 잡았던 거미를 떠올렸다.
거미는 괴물치고는 상당히 강했다. 그걸 상대하는 게 나라서 쉽게 잡은 거지, 다른 간부나 메이라면 잡고 나서 초재생물약을 반드시 써야할 정도로.
거미는 특이하기도 했다.
산성을 두른 다리와 거미줄, 구멍을 파고 구멍과 구멍 사이로 움직이며 적을 기습하는 괴이쩍음.
마치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괴물한테서나 볼 수 있을 사냥 방법은, 단순히 자연적인 진화로는 이뤄낼 수 없을 무언가처럼 보였다.
그 거미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개 보스에 맞먹었다.
사막의 포식자, 회색의 주인, 붉은 어머니 헤로디아 같은 공략 필수가 아닌 보스들.
그 독특함과 기믹조차도 그러했다.
메이도 내 의견에 동의하는지, 내가 저 말들을 들려주니 흐린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나도… 평지에서 싸우거나 했으면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거기서 상대했으면 크게 다쳤을 거 같아. 강한 거 이전에… 까다로워."
메이의 생각은 맞았다. 평지라면 이 행렬에서 병사들이 활 한 발씩만 쏴도 잡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가장강력할 장소에서 도사리고 성유물에 집착까지 하며, 그 환경에 딱 맞는 기믹을 갖추고 있다니.
아무리 봐도 평범치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세상이 씹창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왜?"
메이가 되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 이미 까마득하기 시작하는 게임을 떠올렸다.
"게임에서 4신을 어떤 순서로 잡는지, 그건 완전히 자유라는 얘기. 헀던가?"
"음… 으응, 했던 거 같아."
"게임의 주 무대인 동대륙에서 지역을 크게 나눈다면 5곳이야. 고대의 도시와 각 4신의 영역. 어떤 순서로 잡는지는 자유라고는 했지만, 잡는 순서가 아예 영향이 없는 건 아냐."
"무슨 뜻이야?"
옆에서 따라붙는 메이가 묻고, 나는 그런 메이의 뺨을 슥슥 문질렀다. 건틀릿 위에서 말캉대는 뺨이 폭신해보였다.
"나중에 잡는 신의 영역일 수록, 강화되거든. 얼마나 나중이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신의 영역에서는 괴물이 넘치는데다 아주 강력해져. 지역도 소소하게 변하지."
그래서 회차를 돌면서 지역마다 분기별 차이점을 기록하는 놈들도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여기서까지 먹힐지 모르지만, 먹힌다면.
"그럼…."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그 게임 시스템은, 세상이 씹창나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면 대충 지금에 딱 들어맞기도 하니까."
메이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흘긋 뒤를 보았다. 조금 애매하게 먼 거리에서, 가을의 마녀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신 둘을 빨리 죽여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가을의 마녀는 제 얘기를 하는 것을 놓칠 정도로 어리숙한 여자가 아니었다. 조금 빠르게 다가온다 싶더니 어느새 우리의 앞까지 다가온 여우 꼬리와 여우 귀의 여자가 우리에게 인자한 표정을 보냈다.
"으악."
그 인자한 표정으로 한참 나와 메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강 위로 뛰어오른 연어를 다시 집어삼키는 강물처럼 메이를 껴안았다.
메이는 그 포옹에 당황하면서바둥댔지만, 신격인 가을의 포옹을 빠져나올 만큼 근력이 강하진 않았다.
"물론이지. 나의 자식들아. 너희의 목적지에 도착할 때면, 너희는 나를죽여야겠지. 그리고 나는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으니, 도전은 받아주겠다."
인자한 표정으로 늘어놓는 것은, 싸우다 죽으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이긴다고 자신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말에서는 자신이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감 따위가 풍기진 않았다.
메이도 그걸 눈치챘는지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바둥대는 것을 포기했다.
가을의 마녀는 우리가 대성당을 떠나 남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났다.
벼락을 타고 나타난 그녀가 내리꽂히자, 대부분의 난민들이 당황하고 짐승들이 미친 듯이 날뛰어 진정시키는데 꽤 고역이었음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가을의 마녀의 지금 언행을 보고 생각한 거지만, 혹시 시련을 내린답시고 산왕국을 초토화시킨 건 아닐까 걱정됐다.
그녀는 내 그런 불안한 표정을 보고는 웃기만 했다. 그 미소가 무척이나 불길해서, 나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명심해라, 내 사람들 건들면 넌 뒈지는 거야."
물론 내 사람들은 이 행렬 전체다. 가을의 마녀는 빼고.
가을의 마녀를 잡는 건, 조금 나중에 생각해도 될테니까. 아니면 겨울의 폭군을 잡고 나서라도.
한숨을 내쉬는데, 가을의 마녀가 문득 내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나의 아들아."
"…뭐."
슬쩍 눈을 돌리니, 가을의 마녀는 제 금안을 내 눈동자에 마주치고는 생긋 웃었다. 그 미소는, 전부 알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네가 이끄는 모든 이들의 시련을 등에 업고, 얼마나 오래,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 씨발년이.
나는 표정을 굳혔다. 바이저 너머로 보이지도 않을 표정을 찌그러트리니, 안겨있는 메이가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가리 해. 너한테 그깟 소리 듣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니까."
"…내가 뭐라고 하겠느냐. 나는 만물의 어미, 시련을 내려 가장 건실한 것을 수확하는 것이니, 나의 아들아. 너는 부디 개의치 않고 너의 시련을 만끽하도록 하거라. 내가 너의 시련을… 가중시키거나 덜어가는 길은 없을 터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그러겠다고 하지 않느냐."
믿을 수가 있어야지. 눈쌀을 찌푸리고 노려보니, 가을의 마녀는 내 기색을 읽었는지 웃으며 메이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발이 닿은 것에 안심한 메이가 몇 걸음을 오도도 딛더니 내 옆에 서서 내 팔을 붙잡았다.
가을의 마녀는 그런 메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생긋 웃고는 도로 행렬의 뒤로 향했다.
"현성아."
"응."
"괜찮은 거 맞아?"
메이는 결코 눈치가 없지 않다. 왕따를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메이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다.
나는 그런 나를 걱정하는 듯 슬픈 표정을 짓는 메이를 보고서 손을 뻗어 그 머리를 슥슥 쓸어주었다. 결을 따라 흔들리는 곱슬머리가 사락거리는 게 기분 좋았다.
"별 거 아냐. 너무 걱정하지 마."
메이의 눈에 감도는 걱정을 애써 모른 척 하면서 깃발을 고쳐드니, 메이는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내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래, 이정도는 털어놔도 되겠지.
나는 앞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가 가장 큰 전력이잖아. 나는 반신이고, 신살자에, 고인물이니까. 내가 더 많이 일해야 사람들이 덜 다치고 덜 죽지. 그래서 열심히 하는 거야. 그냥… 책임감 같은 거지."
"…괜찮은 거 맞아?"
"어, 괜찮아."
괜히 웃음 소리를 흘리는데, 흘긋 바라본 메이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젠장, 이게 아닌가?
물론 대충 보기엔 내가 힘들어보일 수도 있었다. 사냥, 초계, 방위, 토벌까지 전부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건 없지 않나.
"나 거인의 힘도 있잖아. 이거 있으면 진짜 어지간한 일 아니면 지구력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걸. 솔직히일주일 내내 무한히 밀려오는 괴물이랑 싸워도버틸 수 있을 거 같고."
내 의기양양한 웃음소리에, 메이는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더니 씩 웃었다.
"그렇지, 응. 현성이는 대단하니까. 그래도 있잖아…."
뭔가 말하려던 메이는, 잠시 꾸물거리더니 불안한 눈으로 웃어보였다.
"힘내."
"그래."
괜히 머쓱해져서 정면을 바라보는데, 불안한 메이의 표정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