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6화 〉대륙 충돌 (206/274)



〈 206화 〉대륙 충돌

이 행렬은  수록 거대해지고, 그 거대해지는 만큼 많은 식량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병사가 늘어나는 건 아니니 사냥에  힘을 쏟아야 하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깃발을 들고 행렬을 이끌다가도 괴물이 보이면 뛰쳐나가 사냥해야 했다.

깃발을 떠넘기고, 행렬에 괴물이 다가서지 않도록 정리하는 동안에도 고기를 신경 써야 하니 손이 많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확한 공격으로 머리만 터트려 먹을 부위를 최대한 존속한 채로 행렬에 가져가면, 도축과 뒷처리는 다른 이들이 도맡아서 해냈으니 그나마다행이었다.


사제들이 일손을 돕고, 그렇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 식량을 준비하고, 병사들이 행렬을 보호하며, 간부들이 행렬을 직접 관리한다. 나는 그 모든 이들을 이끌면서도 갖가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괴물들이 많은 것치고는 그 거미처럼 강력한 괴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슬슬 이상하게 강력한 개체가 나올 법도 했건만, 병사들의 기준으로나 좀 강력하고 나한테는 별 거 아닌 괴물들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슬슬 행렬의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도괜찮지 않느냐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때마침 모습을 드러내는 숲들을 볼 때마다 움직였다.

괴물들만 먹을 수는 없으니, 숲에서 먹을 수 있는 식자재를 채집하고, 나무를 베어마차를 만들기 위해 가공하고, 숙영지를 폈을 때 목수들이 실력을 발휘해 수레나 마차를 만든다.


탈 짐승이 많지 않으니 대부분은 수레였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수레에 사람들이 솔직하게 기뻐하는 것은, 나로서도 썩 기쁜 일이었다.


소소한 기쁨이랄지. 난민들의 감사를 받으며 만들어진 수레에 실려지는 사람들의 가재도구나 식량 따위를 보고 있자니 이 행렬이 마냥 나쁘게 흘러가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는 마을이나 도시 따위를 찾을 때마다 행렬에 합류할만한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나아가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작령에 인접한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 맞냐?"


"맞다네. 내 나침반은 틀리지 않으니, 측량과 지도에 대조해본 결과로는 확실하다네."

넓고 상당히 잘 가꿔진, 대륙 충돌로 인한 지진의 영향이 적게 드러나는 거대한 숲. 자흐렌 자작령이 임업으로 코넬지어 남작령과 분쟁했던 사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당히 품질 좋은 숲이었다.

 숲의 어귀에서 멈춰선 행렬이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는 와중에, 나는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는 몸을 돌렸다.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인마는 메이와 메이의 박차로 만들어진 전투마였다. 그 백마의 갈기를 살살 쓸며 멈춰선 메이는, 슬쩍 몸을 숙였다.


"쭉 살펴보고 왔는데, 뭐가 보이진 않았어. 깨끗해. 자작령까진 못 갔지만… 어떻게 할래?"

"쓰러진 나무나 불안하게 비틀린 나무라던가, 괴물은 없고?"


"응, 없어."

확실히 이 근처는 지진의 영향이 적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거의 없다시피 한 것 같기도 했고.  이유에 대해서 판가름 하기엔 내게 이과적 지식이 부족했다.

아니면 마법적 지식이던가. 당장에 군주들의 아버지가 사용한 마법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니, 동대륙의 인접지인 이 곳에 영향이 적은 까닭을 알 수 있을리가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니 메이가 말에 탄 상태로 고개를 기울였다.


"숲이 많이 우거졌고, 괴물은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병력으로 행렬을 감싸고 움직여야겠지. 메이는 후열에서 병력들이랑 행렬들 보호  해줄래?"


"알겠어. 이따 봐."

생긋 웃으며 명령에 따라 행렬의 후방으로 향하는 메이를 눈으로 쫓으니, 토니가 제 허리를 짚으며 메이를 바라보았다.

"참한 여자일세."


"그렇지."

"나는 어쩌면 좋겠는가?"

"너는 측면을 맡아줘. 원래 이런 대형은 측면이 약하잖아?  색적 능력도 뛰어난 편이니까."


"그러지. 이따가 보세나."


토니 스타크마저도 행렬을 보호하기 위해 내 곁을 떠나고, 병사들이 재빠르게 모여 행렬을 감싸는 대형을 취했다. 그렇게 자리한 병사들을  둘러본 나는, 나무에 기대어놓았던 깃발을 집어들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에 행렬이 뒤따르며 웅장하게까지 느껴지는 군세의 약진 같은 소리를 흘렸다.


나와 내 행렬은 숲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숲은 메이가 일러준대로 평화로웠다. 쓰러진 나무는 드문드문 보이나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었고, 괴물의 기척이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산짐승이 드문드문 보였다.

상상 이상의 평화였다. 이 근처에 뭐 결계라도 펼쳐진 건지,  곳만 종말적인 분위기에서 유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경계를 놓을 순 없었다. 깃발을 단단히  채로 나아갔다.

그렇게 나아가다 방향이 옳다면 슬슬 자작령이 보일 거라고 생각될 쯤이었다.

[불굴의 정신이 발동됩니다.]

내 위기를 감지하여 자동적으로 발동되는 권능이 그 이름을 밝히고, 그렇게 내 세상이 감속했다. 감속하고, 내 자신의 모습을 객관으로 보여주었다.

그러자 내 안면을 향해 화살이 날아들었다. 정확히는 헬멧으로 가려진 안면을 향해.

평범한 나무 화살대에 강철 화살촉, 깃털이 달린 화살. 나는  화살을 향해 손을 휘둘러 쳐내면서, 깃발을 뒤로 물렸다.


눕혀져 시야에서 깃발이 사라지자, 병사들이 경계하며 무기를 들어올리고 난민들이 고개를 숙이거나 자세를 낮추고, 수레 뒤나 마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행렬의 모습에 안심하고 시야를 움직여 화살을 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화살은 그야말로 평범한 화살이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고, 신성이라고는 일말도 느껴지지 않는 화살.


기습의 방식이 익숙해서 혹시나 준신인가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하기 짝이 없고 화살의 궤적이 움직이지도 않아서, 나는 쉽게 화살을 쏘아낸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나무 위. 정직하게 날아온 화살은 얕은 포물선을 그렸다. 위력은 경미하다. 파워아머에 정통으로 맞더라도흠집 하나 안 가해질 위력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나무들을 시야 안에 두었다. 과연, 신성은 느껴지지 않고 마력 역시 느껴지지 않지만 희미하게 사락대는 소리나 인기척 따위가 느껴졌다. 감속된 세상 속에서 정보를 처리하던 내 뇌가 읽어내는 정보였다.

등에 짊어진 거검을 끌어내려 손에 쥐고, 바로 앞으로 달려나간다.


그런 나를 향해 날아드는 화살들. 9발의 화살들이 반절은 내게 빗나갈 궤도로, 나머지 반절은 명중할 궤적을 그리며 접근해왔다.

하지만 피하거나 막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내 파워아머를 두들기고 튕겨져나는 화살들을 무시하고, 거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자자자자자작!


그 거검의 궤적에 끼어든 나무 다섯 그루가 한꺼번에 쓰러지고, 그렇게 쓰러지면서 나무 위에 있던 궁수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낙법을 취한 것처럼 보이나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 떨어진 궁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선 하나. 날아온 화살로 짐작하자면 남은  여덟. 수를 헤아리며 거검을 쥐는데, 화살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뭐지? 지금이 찬스 아닌가? 아니면 포기하고 도주?

노림수가 뭔지  수 없어 인상을 찌푸리는데, 나무 위에서 일제히 궁수들이 내려왔다.

"…허?"


내 이 무력을 보고도 근접전으로 맞붙을 생각인가.


명백한 악수에 의아해하니, 궁수들이 내려선 그대로 활을 등에 걸치거나 어깨에 짊어졌다.


차자작, 하는 일련의 질서정연한 소리와 함께 거두어지는 살의들. 난 그렇게 무기를 거두는 이들을 보면서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섰다.

무슨 전술이지.


"…당신, 자흐렌님을 죽였던  신살자입니까?"

영문을 몰라 당황한 내게 질문을 던지는 이는, 그 궁수들 중 한 명이었다. 얼굴에 복면을 두르고, 큼직한 장궁을 등에 짊어진 것이 전형적인 암살자나 궁수를 떠올리게 했다.


"나에 대해서 아나?"

역문하니, 그 궁수는 제 복면을 끌어내렸다. 끌어내려지자 보이는 건 30줄을 조금 넘은 듯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어, 왠지 익숙한 얼굴인데.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복면을 쓰고 있던 남자가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서 감도는 감정은 정말 많아서, 쉬이 어떤 상태라고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기억하시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저희는 자흐렌님을 섬기던 가신과  사병들입니다."

아?


그 말을 듣고 바라보니, 왠지 저 남자의 얼굴을 자흐렌 자작과 싸울 때 봤던  같이 느껴졌다. 진위 여부는  수 없었으나, 굳이 그런 걸 헤아릴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눕혀놨던 깃발을 집어들어 올리니, 그제야 행렬이 내 뒤로 따라붙었다.

"그분들이군요. 여기서 뭐하고 계셨습니까? 사냥이나 초계입니까? 습격자나 괴물이라도 막으려고요?"


내가 쏟아내는 질문에, 그들은 무장을 풀고 다가왔다. 그들의 표정에서 감도는 감정은 이제 수심이 주된 것처럼 보였다.

"아뇨, 뭐라고 해야할지… 영지를 빼앗겼습니다."

"…예?"


그걸 어떻게 뺏겨. 조금 어이 없어 바라보니, 내게 말을 걸어왔던 자작의 측근이 면목 없다는  낯을 굳혔다.

"군대가 많았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그렇겠군요. 그 외에도 여러 요인이 있고… 여러 사건이 있었으나 신살자님께 드릴 말씀은 아니군요. 자세한 건 직접 보시면 아실테니."


그들은 나를 영지 근처까지 안내해갔다.

*


자작령을 제대로 오래 들렸던 건 아니었지만, 원래 이런 구조가 아니었다는 것 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영지라고 할만한 꼬라지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공성캠프나 칸이 있던 시절의 몽골 숙영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자작령을 둘러싸는 형태로 늘어선 천막들의 수는 상당하고, 영지의 외벽을 넘어 지평까지 닿아있는 목책들은 먼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임에도 꽤 방비가 되어있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목책 속의 마을과그 마을을 거니는 무장하고 횃불을 든 병사들.

수를 헤아리자면 족히 천명은 되어보였다. 그 천명이 전부 숙련병이라면 꽤 전투력으로는 뒤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함락당한 걸 보자면 그럴테지.

턱을 쓸다가 바로 옆에 자리한 자작의 측근에게 말을 걸었다.

"저거  귀족 연합 같은 겁니까?  이리 병력이…."

"단 한 명의 군대입니다. 도일레흐 남작이죠."

"도일레흐 남작?"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군요."

"그럼 처음 듣죠. 저 대륙 건너온새끼입니다."

"그렇군요…."

조금 곤란해하는 측근의 얼굴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저 많은 병력을 어떻게 끌고 들어온 건지 생각했다. 저 큰 군대를 데리고 남하해서 노른자 땅을 쳐먹는데, 주변 귀족은 아무것도 안 했나? 그게 말은 되는 건가?

 의문을 물으니, 측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시라면 그랬을테지만, 의문의 대지진과 다발하는 괴물들 탓에 인접해 있는 영지나 마을, 귀족들은 이도저도 못하고  영역에서 발이 묶여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잠시 고개를 들어올려 어둑한 하늘을 흘깃 바라봤다. 그 하늘에서는 날개가 달린 괴물이 슬쩍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지진으로 인해 박살난 도시와 영지, 마을을 보았다. 그 수는 많았고, 그런 곳에 살던 이들은 난민이 아닌 강도가 되어있는 경우도 많았다.

덤벼오는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사기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입맛을 다시니, 측근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럴만도 하네요. 그럼 코넬지어 남작은 뭘 한 겁니까? 제가 이 자작령을 남작에게 양도한 걸로 아는데…."


"코넬지어님께서는 제 딸이자 후계인 레베카님께  영지를 일임하셨습니다."

"아니, 그래서 뭐했냐니까요. 군대 같은 거  보내줬답니까?"

"아까 말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괴물들과 지진 때문에 쉬이 보내지 못하고 계십니다. 천명이나 되는 군세에 대항할 이들을 끌어모으기엔 최근 상행로의 안전도 좋지 않아 오가는 이들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상황이 상상 이상으로 곤란했다. 나는 숙였던 몸을 펴며 자작령을 내려다보았다.


"레베카 코넬지어는 어디에 있습니까?"

"도일레흐 남작은 제 영지가 완전히 파괴되어 여기로 것이었으니, 아마 영주성에 머물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레베카님을 지하감옥이나 별채에 감금해두고 있겠죠."


나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충절과 비슷했다.

"저나 코넬지어 가문은 당신네들한테 원수 아닙니까? 저 때문에 자작이 죽었고, 저들이 자작이 죽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도일레흐 남작한테 안 붙은 이유는 뭡니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묻는 거였다. 여기에 있다는 건, 도일레흐 남작을 거절하고 숨어있다는 뜻이었으므로.

자작의 측근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작께서는 마지막으로 저희의 처우를 당신께 넘겼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희를 남작에게 양도했죠. 남작은 저희를 기용치않고 내쫓거나 처형할 수도 있었습니다. 얌전히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진짜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들은 저희를 공정하게 썼습니다.  딸인 레베카님도 그랬죠. 그러니…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코넬지어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흐렌 자작님의 유산인 자작령을 지키기위해서 싸우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코넬지어 가문처럼 공정하게 일할 이들이 필요합니다."


…뭐야, 존나 멋있네.


이런 공정함과 떳떳함, 나쁘지 않았다. 괜히 오랜만에 의욕이 치솟는 기분에, 어깨를 풀고서는 말했다.

"자작령에 사람들이 좀 살아도 되겠습니까?"


"예, 아마 집이 좀 빌테죠."


"괴물들한테서는 좀 안전합니까?"

"저들이 지어놓은 목책도 있고, 자작님이 지어놓은 외벽이 마을을  둘러놓고 있어 안전할 겁니다. 레베카님은 그를 보완하는 외부 장벽을 두를 생각이었으니, 완성된다면 더욱이 안전하겠죠."

그럼 난민들도 안심할 수 있겠네. 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니, 측근이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서대륙 사람들은 서대륙에 살아야 맞겠죠. 제가 잘 구출하면 레베카 코넬지어에게 잘 말해주세요."

측근은  제안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툭 내뱉었다.

"당신 좀 변했군요."

"변해야죠. 이런 시대 아닙니까."


픽 웃으며 거검을 고쳐메니, 측근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나는 헬멧 속에서 그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짐작가는 곳  불러보세요. 새벽이 지나기 전에 다녀올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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