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대륙 충돌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레베카는 내 질문에, 별로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정신 없이 끄덕거렸다. 이를 덜덜 떠는가 싶더니 이를 부득부득 갈기도 하고, 증오가 듬뿍 느껴지는 눈으로 다리를 붙들고 헐떡이면서 죽어가고 있는 도일레흐 남작을 노려보기도 했다.
그 독기 가득한 모습에 내가 별 대응을 하지 않으니, 그녀는 비척비척 일어섰다. 넘어지려는 것을 부축하니, 그녀는 내 부축을 받으면서 바닥에 떨어져있는 메이스 자루를 집어들었다.
내가 휘둘러, 도일레흐 남작의 다리를 부숴버리고 파손되었던 그 메이스였다.
메이스 머리가 뜯겨져나간 그 자루는, 뾰족한 끝을 가지고 있었다.
뭘 하려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말리진 않았다. 오히려 부추길까 하다가 조용히 있었다. 내 일이 아니라 그녀의 일이니까. 그녀는 비척비척 다가서더니, 메이스 자루를 높이 쳐들었다.
"자, 잠―"
푸욱
내리찍어진 자루는 남작의 눈구멍을 꿰뚫었다. 밀려난 눈알이 눈구멍에서 흘러내리고, 흘러내리는 수정체와 함께 회백질이 꿰뚫린 것인지 남작은 몸을 떨더니 늘어졌다.
"오우…."
덜덜 떠는 몸으로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찔러죽이다니. 존나 오지네.
악에 받친 레베카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 키가 큰 소녀는 제 주홍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채 호흡을 골랐다. 과호흡에 가까운 그 발악을보면서 뒤에서 등을 두드리니,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 이제… 탈출 합시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내게 말하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땀과 새로 흘러나온 식은 땀으로 젖은 몸은 가냘프게 흔들렸다.
나는 그녀의 말과 흔들리는 문짝,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의 수, 내 무력으로 가늠했다.
문짝으로 다가가 거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으니, 그녀는 숨을 들이키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성에 부하나 병사, 뭐 그런 사람들 남아있습니까?"
"아뇨, 이, 이 돼지새끼는. 제 사람들을 거의 다…."
"그럼 문 밖에 있는 새끼들 좀 쳐죽인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겠네요."
"…예?"
그녀의 당황이 음성에 녹아 내게 들려오고, 나는 그 음성을 들으며 목을 꺾었다. 뚜둑 소리가 들리고, 뭉친 어깨가 좀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삼 생각해보자면, 도망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내겐 무력이 있고, 인질도 확보했다. 조용히 빠져나가고자 하는 건 인질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긴 입구가 하나고, 그녀는 안전하다. 거기에 다른 인질은 전혀 없었다. 내 행렬은 아예 전장에서 벗어나 있었다. 메이가 따라잡힐 걱정도 없었다.
그러면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거검을 뽑아들고, 문짝을 걷어찼다.
콰아아아앙!
"끄으악!"
"뭐, 뭐야!"
문앞에서 애쓰던 병사들이 튕겨져 나가고, 나는 거검을 쥐고 앞으로 쏘아졌다. 휘둘러지는 거검을 본 병사들의 비명이 달밤에 울려퍼졌다.
*
다행히 내 검 앞에 모든 병사가 목숨을 잃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제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을 도일레흐 남작이 나와 레베카의 손에 죽었음을 알고는 빠르게 항복했고, 자신들은 그저 고용된 이들일 뿐이라며 선처를 요구했다.
나는 처음엔 레베카가 저 병사들 모두를 처형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냉막한 표정으로 그러하겠노라고 하면서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정확히는, 한 가지조건만을 가지고.
그들 병단을 이끄는 이들 중 가장 높은 이의 목.
당연하게도 병사들을 제외한 지휘관 역의 가신은 거부했으나, 내 칼날을 피할 순 없었다.
그렇게 자흐렌 자작령의 성벽에는 두 남성의 목이 내걸리게 되었다. 도일레흐 남작과 그의 가신의 목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병사들이 덤벼들지 않는다는 게 놀라웠다. 아무리 내 무력이 강력하고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한들, 제 충절을 맹세한 이가 죽음을 맞이한다는데 그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라리 집단 자결이라도 하는 일파가 있을 줄 알았으나, 그들은 새로 섬기게 된 주인을 빠르게 받아들여 레베카와 코넬지어 가문에게 제 무기를 바쳤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도일레흐 남작의 카리스마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어찌됐건, 행렬은 자흐렌 자작령을 둘러싸고 있는 숙영지에서 머무르며 재충전의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레베카는 제 관할 영지를 되찾아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자흐렌 자작령은 돌아온 자작의 측근들과 새로 머무르게 된 병사들로 인해 빠르게 평화와 질서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 평화의 중심지, 내가 실수로 다리를 날려버렸던 그 영주의 침실과 같은 층에 위치한, 조금 한적하고 창문 하나 존재하지 않는 집무실.
나는 그 집무실에서 레베카와 마주보게 앉았다. 그녀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그녀가 바라보는 서류에는 도일레흐 남작의 체취와 함께 필체가 남아있었다.
그 편지를 엉망으로 구겨버린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독기를 띈 얼굴을 지우고 좀 편하게 풀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오세요. 숙소는 어떻게, 좀 지낼만 하신가요?"
"뭐, 야영하다가 지붕 있는 곳에서 지내는데 어떻게 불평을 하겠습니까. 지낼만하죠."
내가 웃으며 대답하니, 그녀는 뭔가 묘한 표정으로 웃더니 몸을 돌렸다.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간 집무실의 의자가 그녀의 옆면을 내보였는데, 그녀의 그 옆얼굴은 왠지 이전에 봤었을 때보다 성숙해보였다.
머리가 좀 길어진 탓일까. 아니면 몸이 전체적으로 커진 탓일까.
풍만해진 그녀의 가슴에 눈을 두지 않으려고 얘쓰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입니다. 저희 병사와 난민들 중에서, 여기에 머물길 희망하는 이들을 받아주세요."
"좋죠. 은인께서 하시는 부탁인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좀 냉소적인 반응이나, 거부하려는 기색은 없어 안심했다. 의자에 몸을 기대어 휴, 하고 한숨을 내쉬니 그녀는 왠지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를 보면서, 나는 다른 대화 거리를 생각해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생각하면 당연한 질문이었다.
"남작령이 어떻게 됐는지 좀 물어봐도 될까요?"
"코넬지어 남작령 말이신가요."
"예, 거기요."
그녀는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더니, 몸을 기울여 의자를 원위치했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앉은 그녀가 조곤조곤 설명을 늘어놓았다.
"코넬지어 남작령에도 그다지 인명피해나 천재지변은 없었어요. 여길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그래서 그다지 문제는 없죠. 당신께 드렸던 요새는 함락됐다는 게 아쉬운 일이죠. 지진에 가라앉았다고 들었답니다."
어차피 웜홀도 끊겼을 그 요새에 볼일은 없었다. 딱히 두고 온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인명피해가 그다지 없다고 했던 걸 보면 빠져나올 이들은 잘 빠져나온 모양이었으니.
다음 질문은 더 직접적이었다.
"최근에 연락은 해봤습니까? 아니면 남작령의 근황을 아신다던지."
"아직 안 해봤죠. 하지만 별 일 없을 거예요."
그럼 좋겠는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레베카 코넬지어는 제 옆머리를 쓸어넘기고서 팔짱을 꼈다. 풍만한 가슴이 팔짱 낀 위에서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하는 건, 의외라는 거였다.
강간은 PTSD를 남긴다는 얘기를 꽤 들어봤고, 그녀가 겪은 상황은 평범하지 않았으니 완전히 정신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런 거지같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독기에 차있긴 하지만 제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었다.
처음에 봤었을 때만 하더라도 좀 어리숙한 꼬맹이인 줄 알았는데, 이정도면 존나 당찬 년이었다.
하기야, 그때 처음 구했을 때만 하더라도 구출되자마자 자기 계책을 술술 늘어놓았던 걸 보자면 극한상황에서도 정신줄 놓지는 않는 여자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거친 녀석들이 싫지 않았다.
"뭐 도와줄만한 거 있겠습니까? 난민도 받아주고, 식량도 내어주는데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해주겠습니다."
그러니 내 제안은 그렇게까지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는지, 레베카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보내왔다.
"원래 이런 분 아니지 않으셨나요? 좀 피곤해보이는 느낌이신데요."
"착각입니다. 제가 좀 성장한 걸 수도 있지만요."
레베카는 여전히 의뭉스럽다는 표정을 보내고 있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것 같진 않았고, 오랜만에 보는 내가 전과는 다르니 이상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뭘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힘을 쓰는 일이라면 뭐든 상관 없을텐데.
고민하는데, 그녀는 불현 듯, 아. 하는 탄성을 흘렸다.
"예?"
"마침 도울 일이 하나 있긴 하네요."
탄성을 흘린 그녀는, 왠지 묘하게 독기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말하자마자 물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제안 취소를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알고 계실 거예요. 도일레흐 남작 그 돼지새끼가 절 겁탈하고 제 안에 싸재꼈다는 거."
"…예."
강간당하면 보통 저러나?
"아마 이대로 넋놓고 있는다면, 저는 그 돼지새끼의 씨앗으로 임신해서 그 돼지새끼의 애를 낳게 되겠죠. 안 그런가요?"
"…뭐, 그렇겠죠."
현대가 아닌 이 다크 판타지에서 도중에 지우는 방법이나피임약 같은 건 없을테니, 자연적인 법칙에 따르면 그럴 것이었다.
설마 신성으로 지워달라던가 그런 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녀의 제안은 내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제 부탁은 한 가지예요. 그 빌어먹을 새끼의 씨앗을, 당신의 씨앗으로 지우고 저를 임신시켜주세요."
"…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게 되는 말이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니, 그녀는 묘한 웃는 낯으로 말했다.
"듣자하니 신살자님은 아내도 많고, 정력도 좋다던데요. 아내가 많은 만큼 한 번에 여러명이랑 하는 경우도 있다고도… 들었어요. 맞나요?"
"예, 예…."
내 여성 편력을 여자의 입으로 듣는 건 끔찍했다. 입을 꾹 닫고 바라보니, 그녀는 다리를 꼬더니 몸을 기울였다. 그 풍만한 가슴이 흔들리고,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묘하게 이상야릇한, 색기가 깃든 눈이었다.
"어차피 그 돼지새끼가 몇번이고 제 안에 싸질렀어요. 글렀죠. 후계 없이 영주 노릇을 할 순 없고, 제 뒤를 이을 자식은 얻어야하지만 그 돼지새끼의 씨앗은 싫어요. 그냥 투정으로 받아들이실지도 모르겠지만."
"아뇨, 그건 아닌데…."
보통 강간당한 다음에 자기를 임신시켜달라는 소리를 하나?
상식적이지 못한 제안이었고, 그녀도 그 사실을 아는지 조금 비틀린 미소를 지어올렸다.
"제 후계는 이 격동하는 대지에서 살아남을 강한 지도자여야겠죠. 강단 있고, 강하며, 지혜로워야 할 거예요. 그럼 당신의 씨앗처럼…우수한 씨앗이 필요해요."
내 자식새끼라고 반드시 우수하다는 보장은 없는데, 그녀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않는 것 같았다. 아니지, 마치 도일레흐 남작의 씨앗이면 반드시 쓰레기가 나온다는 것처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니, 그녀는 그 비틀린 웃음을 유지한 채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정 곤란하다면 거절하셔도 돼요. 그러신다면 이 글러먹은 씨앗이 제 난자에 닿을테고, 제 자궁에선 그 혐오스런 새끼의 자식이 자라게 되겠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는 제 배를 갈라 그 새끼를 손수 목졸라 죽여버릴 거예요."
태어나지도 않은 애를 목졸라 죽이겠다는 표현에, 나는 이미 그녀의 저것이 독기라고 할 수준을 넘어섰음을 알 수 있었다. 저것도 PTSD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도 있었다. 광기에 가까웠다.
가장 큰 문제는 저게 허언처럼 들리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좆까라고 하고 그냥 갈 수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안 끌리는 것도 아니었다.
레베카는 반반하고, 몸도 이전에 볼 때마다 풍만했으니.
"그럼 죽지 않을까 하는데요."
"안 죽을 수도 있죠.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툭, 투둑
내가 갈등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녀는 그 비틀린 미소를 유지한 채, 제 앞섬을 슬쩍 풀었다. 풀려난 젖가슴이 골을 이루어 내 눈에 들어오고, 나는 슬슬 피가 몰리는 기분에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가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는 씩 웃더니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침실로 가실까요?"
지금부터 하자는 제안에, 나는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