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0화 〉대륙 충돌 (210/274)



〈 210화 〉대륙 충돌

 뒤로, 레베카의 침실과 집무실, 바깥을 잠깐 왕복하는 것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그 일주일의 일정에서의 대부분은 레베카의 난자에 내 정액을 끼얹어 임신시키고자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레베카는 갖고 있던 거부감을 도일레흐 남작에 대한 증오와  남작이 뿌린 씨앗에 대한 혐오로 씻어버렸는지 오히려 매달리듯이 나와 교합해왔다.

나는 겨울의 신부나 메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바람 피는 듯 모호한 느낌으로 레베카와 몸을 섞었다.

그렇게 또 한창 몸을 섞고, 그 날 나올 정액을 전부 레베카의 자궁에 때려박은 후에야 침대에 누워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난민들과 병사들  희망하는 이들은 받아주는 거지?"


"예, 그렇죠. 바라는 이들만으로 한정하겠지만요."

왠지 묘하게 성의 없는 말이었지만, 레베카가 마지막까지 제 의무를  하는 인간인 걸 확인한 후라 별로 불안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련히 잘 하겠거니 하는 생각이 전부였다.

나는 그 수속을 위해서 간부들에게 미리 이 안에 대해서 난민들에게 설명하고, 그에 따르고자 하는 난민들을 미리 꾸려 명단을 만들어놓으라고 말해놨던 차였다.

레베카는 내 옆에 누워, 제 배를 쓸더니 뭔가 알  없는 오묘한 성인 기구를 꺼냈다. 그 기구는 며칠  처음 몸을 섞을 때에도 보았던 마개였다.


정액과 애액으로 끈적이는 제 질구를 한참 그 성인 기구로 집적대던 레베카는, 달큰한 숨을 흘리며 마개로 제 보지를 틀어막았다.  정액은  안에서 오래 체류하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보지를 틀어막은 후에야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시죠?"

"아니 뭐… 좀 심하다 싶어서?"


"그 돼지새끼의 씨앗이 들어설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예요. 양해해주세요."

"뭐라고 하는 건 아닌데."


역시 좀 무섭다. 얼마나 그 새끼 애가 아니길 바라는 거야.


그래도 낳았을  구분이 어렵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 머리색은 검은색이고, 도일레흐 남작은 금발이었으니.

낳고 나서 판가름 해야겠지만, 그녀가  태아를 목졸라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어도 그녀와 닮은 주홍빛 머리칼에 초록 눈으로 나와 판가름할 것도 없기를 바랐다.

애한테 죄는 없으니까.


푹신푹신한 침대에 머리를 떨어트리니, 레베카가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것이 역시 죄악감이 묘하게 아려왔다.

"떠나신다고 하셨던가요."


"어, 떠나야지."

"어디로 떠나시는 거죠?"


레베카의 표정에 깃든 것은 내가 쉬이 판단할  있었다. 그건 욕심이었다. 낳게 될 아이의 아버지가 되길 바라고, 이 자작령의 관리를 도우며, 나타날 괴물들을 상대해주길 바라는 그런 욕심.

나는 그 욕심을 읽어낼 수 있어서 입을 닫았다.  욕심을 받아줄만큼 나는 관대한 인간이 아니었다.

"집으로."

내 집은  세계에는 없었으나, 인정해야 했다. 나는 고대의 도시를 내 집처럼 여기고 있었다. 내가 돌아갈 곳으로, 내가 머무를 곳으로.

적어도 이 세계에서 해야할 일을 다 하기 전까지는, 그래야만 했다.


레베카는 그 말에 대답하려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더니 침대에 도로 몸을 뉘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레베카가 나를 포기하고, 나도 그녀와의 육체 관계를 단순히 사무적인 것으로 미뤄놓은 후에야 그녀는 나를 방에 부르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일주일간 질내사정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이지 않는 일주일 사이에 준비할 것들은 모두 준비했고, 이직과 이주를 희망한 이들은 자작령에 남게 되었다. 그렇게 남은 이들을 뒤로 하고, 나는 배웅하러 나온 레베카에게 악수했다.


그녀는 처음 이 대륙에 넘어오고 봤었을 때와는 다른, 독기 어리고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누는 악수에 그녀의 결의와 굳은 살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히 가시길, 몸조리 잘하시길 하며 그녀는 나를 놓아주었다. 놓아주는 게 가장 어렵다는  감안하면 과감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우리 행렬은 남쪽으로, 더욱 남쪽에 있는 남작령을 향해 이동했다.


휘날리는 깃발과 함께.

남작령까지 남하하는 길목에는 괴물이 많지 않았다. 미리 두둑하게 받아놓은 식량 덕분에 굶주리는 이들은 나오지 않았으나, 확실히 적어진 괴물의 개체수가 남쪽은 왠지 다르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 괴물의 수가 적은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도 없어 묵묵히 괴물을 해치우면서도 구태여 의문을 품지 않았다.


괴물이 나오지는 않는 건 또 아니었으니, 세상이 씹창나고 있다는 자각은 충분히 가질  있었다. 그 자각은 내게 잔잔한 죄악감을 심어주었다.

내가 만약 군주들의 아버지를 문답무용으로 때려죽였다면 이렇게 됐을까?


이걸 오래 준비한  아니라면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잠깐 멍청하게 방심한 탓에, 아가리를 놀린 탓겠지.

그리고 나로 인해 대륙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사람을 죽일 때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꾸준히 내게 그런 환경을 비추었다.


무너지고 파괴된 마을들, 길가에 보이는 시체들, 전투의 흔적.

그에 덧씌워지듯 근근히 덤벼오는 괴물들.


그 환경이 겨우 지겹다고 여겨질 때가 되어서 겨우 남작령이 눈에 들어왔다.


피로 깔린 카펫 위를 거니는 듯한 기분과 함께 도착한 코넬지어 남작령은 이전에 들렸을 때와는 달리 꽤나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성병기로 인해 부숴진 곳이 있었던 성벽은 말끔하게 보수되었고, 길은 잘 닦여져 지평선까지 뻗어있었다.


영지전의 피해는 이미 씻은 듯이 찾을 수 없어서, 나는 남작이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작을 찾아갔을 때, 남작이 보여주는 피로한 표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저 피로해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거의 노쇠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남작의 집무실, 바깥의 잘 갈고 닦아진 성채나 커다래진 마굿간,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인들과는 다른 황량함을 자랑하는 사무만을 위하는 공간.

거기서 나는 남작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주보았다.

"강도 때문입니다, 신살자님."

"강도요?"


"예, 강도입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요?"


그는 내 질문에,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앞의 잔을 휘저었다. 잔 안에 들어있는 것은 뭔지 알 수 없는 검은색 차였는데, 지구에서도 자생하는 풀 같진 않았다.


커피 같은 건가, 하기에는 안에 떠있는 것은 찻잎이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니 강도가 많습니다. 살아남아야 하는데 터전이 파괴되고 농지에서는 건질 게 없으니, 살아남기 위해 있는 자에게서 빼앗는다 이거죠. 저희 상행단도 몇번당했고, 저희 영지로 오는 길이었던 상행단도  당했습니다."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나만 하더라도 8천명 행렬을 끌고 지나가는데 달려드는 난민을 봤었으니.

그걸 감안하면, 이런 영지를 향해 움직이는 소규모 상행단 쯤이야 얼마든지 습격당할 수 있어보였다.


"그 뿐만이면 차라리 호위를 더 붙여서 보냈을텐데… 괴물까지 나오는데 그 괴물도 용병으로 어쩌지 못할 수준이니 교역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차를 들이키더니, 퀭하게 내려앉은 눈으로 그 잔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교역도 다시 이뤄지겠지만, 당장은 빠듯합니다."


"그럼 못 도와주는 겁니까?"

남작은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와줄 수야 있지요. 문제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 끝을 흐리는 남작을 보며, 나는 내 부탁을 떠올렸다.

대륙을 건너가게 배를 빌려달라.

그 배는 안 돌아올 가능성이 높지만.


과연 지금 같은 각박한 상황에서 선뜻 들어주긴 모호한 부탁이겠지. 산을 가로지르는 길이라도 찾아야하나 고민하는데, 남작은 고개를 다시 가로저었다.


"최남단에서 물길을 따라 대륙을 건너가실 생각입니까?"

"예, 그렇죠.  행렬을 데리고 산을 넘을  없잖습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무실의 창문으로 바깥을 보았다. 거기에는 남작령을 둘러싸고 세워진 수많은 천막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에서, 난민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단란한 가정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죠. 건너는 과정에서 괴물들의 습격도 습격이지만, 건널 수 있을지부터가 불투명하니…."


남작에게 동의하며, 나는 멀찍이 보이는 산을 바라보았다.   거리에서도 높아보이는 산맥은, 대륙과 대륙의 충돌로 인해 생겨났다. 상세한 원리 따위는 전혀 모르겠지만, 존재하는  존재하는 거였다.


그리고 저 산은 인간이 넘을만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높이도 높이지만, 인간이 지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가파르고 돌과 토사 외에는 보이는  없었다. 인간이 붙들만한 초목은 커녕 생명의 흔적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괴물들도 저 근처는 쉬이 날아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이 대규모 행렬을 이끌고 산을 넘어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정상에 이르기도 전에 사람들 중 반절은 죽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배를 이용하는  아니면 대륙을 건널 방법이 거의 없음에도, 나는 남작을 책망하지 않았다.

배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자원은 상당하다. 그리 오래 타지 않을 거고, 고급스러운 배를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배는 숙련된 목수들과 조선공이 있어야 겨우 만드는 게 아니던가.

거기에 7천명 쯤 되는 인간과 짐을 모두 실어야 하니, 한 두척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빌려주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남작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고서 짐작했는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문득 말했다.

"물론 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교역에 쓰이던 교역선과 신살자님이 타고 오셨던 배도 항구에 남아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있다면…?

내 아리송한 표정에 잠시 갈등하던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하게 휘청대는 자세가 그의 건강 상태를 대신 말해오고 있었다.

"바다에 괴물이 들끓고 있습니다."

"…예."


 언젠  그랬나 싶어 바라보는데,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한참은 많을 겁니다."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잠시 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번뜩 일어나 남작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갑자기 어딜 향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렇게 남작이 나를 이끌어 안내한 곳은, 병영의  켠이었다. 병영 한 켠에는 대충 만든 칸막이외 그 칸막이 너머의 비명으로 얼룩져 있었다. 누르스름한 천을 걷으며 그 안으로 들어간 남작은 내게 손짓했다.


"도대체 뭐길래."

뒤따르며 한 마디를 얹으니, 그는 설명 대신이라는 듯이 턱짓했다. 그의 턱짓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것은 남자였다.


그 남자는 팔다리가 없었다. 원래 없는 것 같진 않았고, 누워있는데다 전신에 붕대를 잔뜩 두른 채로 허공을 노려보며 횡설수설 하는 것을 보자니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다.

"말씀하신 그 해역에서 어업을 하던 어부 중  한 명의 생존자입니다. 항구에서 주기적으로 보내던 어부들이라,  수와 배는 상당했지요. 족히 20명은 되었을 겁니다. 배도 크기가 꽤 되었을테죠. 하지만 전부 죽고 살아남은 건  남자 뿐입니다."

그 남자는 여전히 횡설수설 하고 있었는데, 눈은 흐리게 풀려  한 마디 듣는 것조차 쉽지 않아보였다.

"원래는 팔과 다리가 하나씩은 남아있었는데, 독 때문에 썩어들어가 절단했다고 합니다."


과연 팔다리를 묶어낸 붕대에는 뭔가 거뭇한 피가 묻어있었다.


 중독의 흔적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니, 남작은 설명했다.

"혼자서라면 얼마든지 건너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행렬 모두가 그걸 따라하진 못하겠지요. 배는 가라앉을테고, 대부분이 죽거나 다치겠죠. 어쩌면 신살자님께도 위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 나를 단정짓는 말에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대륙을 건널 때 심해엘프 새끼들한테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육지생물은 수중에선 불리한 법이었다.


"바닷 속 괴물을 전부 죽이는  아닌 한… 힘들겠죠."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그대로 멈춰섰다.

섬뜩하지만 쓸만한 아이디어가 뇌리를 지나고 있었다.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는 계획이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내가 남작을 슬쩍 돌아보았다. 제 딸과 닮은 초록 눈과 주홍 머리의 영주는 의아한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가 깨끗해지면, 선박을 내어주실 겁니까?"

"예? 아, 물론입니다. 바다만 깨끗해진다면…."

남작은 떨떠름하게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설마 뛰어들어 전부 죽이는 무모한 계획을 짜고 있을까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그 시선을 받아넘기며, 당당히 허리에 손을 걸치고 말했다.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건  취향이 아닙니다. 한 번 해볼테니 기다리고 계시죠."


남작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서면서 산맥을 노려보았다.

바닷가를 향해 트여있는 산맥들이 웅장하게 달밤 아래에서 그림자를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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